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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
네체른의 서 1(1화)
프롤로그
피크닉이라도 떠나야 할 듯한 화창한 날씨였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대지를 스치는 바람도 부드럽기만 했다.
그러나 따뜻한 하늘과는 달리 거대한 도시 성곽 안에는 조용한 붉은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도로에는 시체의 산들이 널려 있었고, 핏물들은 마치 강물처럼 하수도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
그 이질적이고 처참한 풍경은 마치 소리 없이 계속되는 악몽과도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뭔가가 쓸고 지나간 후에 남아 있는 잔재나 흔적 같은 게 아니었다. 말했듯 붉은 침묵은 아직 성안에 내려앉아 남아 있었다.
“…….”
해골 문장을 이마에 그린 사람들이 누구의 피인지도 알 수 없는 붉은빛에 물든 날카로운 검을 들어 무덤덤하게 다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
그러나 응당 구원을 바라는 비명들이 서로를 지우기 바빠야 함에도, 사람들은 그 어떤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자신의 생 전부가 끝나는 그 순간에도 그들은 그저 무덤덤하게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살육을 자행하고 있는 도살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응당 이러한 지옥을 엎어 놓은 듯한 풍경 속에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광기에 휘둘리게 될 터인데도, 그들은 그저 무덤덤하게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죽이는 자도, 죽는 자도. 마치 실 끝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자신들의 역할을 재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창한 하늘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듯하더니 은은한 푸른빛이 비쳤다.
그 변화에 이마에 해골 문장을 그린 학살자들과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일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들이 자신들을 덮치는 푸른 불길을 인식했을 때쯤,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푸른 불꽃 구체. 하늘에서 떨어진 그것은 도시를 집어삼켰고, 거대한 도시는 단 한순간에 푸른 불길 속에서 재가 되어 버렸다.
“과, 과연 대단합니다! 저것이 바로 드래곤 일족의 최강 비술 삼발라(Shambhala)군요!”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서 이제는 한낱 잿더미에 불과해진 도시를 내려다보며 다섯 군의 지휘관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의 뒤에 있는 다섯 깃발 아래에는 수십만 대군이 집결해 있었지만, 이미 그 의미는 그들의 목표와 같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뭔가 인간으로서 참으로 허탈하군요. 아무리 그래도 요새 도시로 유명한 셰알인데, 이렇게 단 한순간에…….”
지휘관들은 이내 고개를 들어 자신들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아득한 저 하늘 높이에는 열 마리 이상 되는 드래곤들이 떠 있었다.
“마법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드래곤들조차 에인션트급이 여덟 마리 이상 모여야지만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비술입니다. 기록을 보면, 대륙 하나를 멸망시켰다는 전설까지 있었다고 하니 도시 하나 정도야 일도 아니겠지요.”
“어쨌든 이걸로 그 저주받은 마도서 네체른의 서는 세상에서 사라졌군요.”
“예. 드래곤들에게 도움을 청한 게 정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도하며 옅은 미소를 짓는 다른 지휘관들과는 달리, 한 지휘관만은 무표정하게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로웬 경, 무슨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라도?”
“아무런 저항도 없었던 게 아무래도 미심쩍습니다. 혹시라도 네체른의 서와 그 주인이 이미 도망친 상태라면…….”
“하하, 과연 신중하시군요. 하지만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마법사들과 드래곤들에 의해 네체른의 서가 저 안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래서 삼발라까지 시전된 거니까요.”
“그렇습니다. 아마 삼발라를 맞을 줄 상상도 못한 채 성안에서 반격을 준비했던 모양이겠죠.”
그러나 로웬이라 불린 이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정말 그랬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1. 네체른의 서(1)
“하아… 하아…….”
길이 없는 울창한 산을 어린아이 한 명이 힘겹게 오른다. 몸 곳곳이 쓸리고 찢기고, 그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아이는 마치 쫓기고 있는 것처럼 그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의 손에는 푸르스름한 가죽 표지에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최강 최악의 마도서 네체른의 서였다.
네체른의 서.
마왕 네체른의 힘이 담겨 있는 이 저주받은 마도서는 그 소멸을 위해 신의 심판이라고도 불리는 드래곤족 최강의 비술 삼발라가 사용되어진 것만 보아도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요새 도시 셰알과 함께 소멸되었어야 할 이 네체른의 서가, 어떻게 지금 이 어린아이의 손에 있게 된 것일까.
“제길! 나, 난 죽고 싶지 않은데!”
사실 이 아이는 몇 달 전 잃어버린 마왕의 무덤에서 네체른의 서를 발견한 흑마법사 베테르의 시동이었다.
네체른의 서가 가진 그 강렬한 마기에 사로잡힌 그의 주인은 그 힘으로 요새 도시 셰알을 정복했다.
결과적으로 네체른의 서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고하는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베테르 또한 노리는 것이 있었다.
그는 셰알의 모든 생명체를 제물로 네체른의 부활을 꾀했던 것이다. 비록 그 사실을 접할 5대 제국과 주변 세 왕국의 연합군이 셰알을 공격해 올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요새 도시라고 불리는 그 방어력과 네체른의 서를 이용해 의식이 끝날 때까지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이 베테르의 계산이었다.
그는 네체른의 부활을 위해 셰알에 살고 있던 모든 생명체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었고 도시 전체를 감싸는 대규모 마법진 속에서 의식을 시작했다.
도시 방어를 위해 일부의 군사들을 살려 두어야 했지만, 그 정도 생명은 전투가 시작되면 충분히 충당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의 적은 인간들만이 아니었고, 결국 드래곤족 비술 삼발라에 의해 도시는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지금 그의 시동과 네체른의 서는 셰알과 꽤 떨어진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셰알의 모든 생명을 제물로 마왕 부활을 이루려 할 만큼 냉혈한 그의 주인 베테르가 자신의 시동을 미리 탈출시키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것도 마왕 부활과 의식에 꼭 필요한 네체른의 서까지 들려서?
베테르는 절대 마왕 부활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광신자 같은 게 아니었다. 그가 마왕 부활을 원했던 것은 그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기 위한 것.
물론 책의 마기에 사로잡힌 탓도 있긴 있겠지만 어쨌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네체른의 서에 의지였다. 삼발라의 빛이 도시를 덮치려는 순간, 네체른의 서가 빛나며 베테르에게서 떨어져 나와 그에게 날아왔다.
그리고 그 힘으로 자신과 아이를 이곳으로 이동시켰다. 어째서 네체른의 서가 이름난 흑마법사인 베테르를 버리고 한낱 시동을 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네체른의 서와 시동은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이, 이딴 거 필요 없는데… 제길! 빌어먹을 미친 늙은이!”
그러나 어쨌든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 마도서를 버리고 싶은 게 시동의 진심이었다.
5대 제국의 연합군과 드래곤까지 그 소멸을 원하는 네체른의 서 같은 건 설사 세상 전부를 가질 수 있는 힘을 지녔다 해도 그에겐 필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차피 뒤질 거 그딴 저주를 왜 걸어!”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몇 년 전 그가 주인의 횡포에 견디다 못해 탈출을 시도했을 때 베테르는 그에게 저주를 걸었다.
그가 자신에게서 도망치거나 자신이 죽었을 때 그 또한 죽게 되는 강력한 소유 저주를.
원래라면 설사 삼발라의 빛을 피했다고는 해도 베테르가 죽은 이상 그 또한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각종 저주와 독에게서 주인의 몸을 보호한다는 네체른의 서 덕분에 저주를 막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네체른의 서를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는 그 즉시 저주의 영향으로 죽을 것이다.
“아앗!”
발밑 나무뿌리에 걸려 그의 몸이 넘어졌다. 그러나 그는 잡고 있는 네체른의 서를 붙잡고 놓치지 않았다.
사실 굳이 잡고 있지 않아도 적정 거리 내에만 있으면 저주를 막아내는 것 정도는 충분했지만 그저 시동에 불과했던 그로서는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아아!”
그는 까져 피가 흐르는 무릎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아픔 때문이기도 했지만 붉은 피가 조금 전까지 있던 지옥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의 목에 칼을 꽂고, 자식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던 곳. 그 지옥에 비한다면 자신이 있던 노예시장의 풍경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었다.
“으윽!”
그는 무릎에 살짝 박힌 작은 돌을 빼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 지 따위는 몰랐다. 단지 지금 그는 살고 싶다는 그 하나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었다.
크르르르!
그런데 어떤 낯선 울음소리와 함께 뭔가 넘어지고 부러지는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그는 두려움에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잘못 들었거나 들개 정도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처참하게 외면당했다.
크르르르!
뒤편에서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은 숲에 난동꾼 오우거였다.
온몸이 초록색인 이 무식한 괴물은 나무들과 돌을 밀어뜨리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우거는 그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의 몸에 난 상처에서 나오는 피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아, 아아!”
그는 자신을 향해 오는 오우거에 모습에 두려워하면서도 재빨리 네체른의 서를 펼쳤다.
비록 이렇게 오우거를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지만, 그 지옥 속에서 베테르의 시중을 들어야 했던 그였다.
죽음과 공포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는 건 그의 생활이었고, 그때의 생활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어느새 그의 몸과 정신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그러나 마법을 배운 적도 없는 그에게 과연 마도서가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거기다 그는 이전엔 한 번도 이 네체른의 서를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손에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어느 부분에 어떤 주문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두려움에 책장을 넘기고 있을 뿐 그 행동에 의미는 없었다.
그나마 글을 읽을 줄 알고 최강의 마도서라는 걸 손에 쥐고 있으니 책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친 몸으로는 도망을 치거나 갑옷도 짓뭉갠다는 오우거에 대항하거나 하는 일들은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미친 듯 책장을 넘기던 그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그, 그노시스, 이데소피아 그림자에 갇혀진 생명아! 그 욕망을 해방하라!”
아무런 행동도, 마력도 없이 단지 입으로 읊어댈 뿐인 주문. 원래라면 발동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의 그 주문에 네체른의 서가 빛나더니 한 줄기 어둠이 오우거를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