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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2화)
1. 네체른의 서(2)
크오오?!
자신을 덮치는 어둠에 오우거는 손을 들어 그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 어둠에는 그 어떤 물리적인 힘도 없는 듯 그것은 오우거의 손을 타고 내려가 그의 발아래 땅 밑으로 떨어졌다.
크오오!
오우거는 아무런 충격도 없자 다시 그를 향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크오?
이상하게 오우거의 다리는 땅에 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우거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자신의 발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발밑에는 오우거의 그림자에서 올라온 검은 손이 오우거의 다리를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크에!
오우거는 자신의 다리를 잡은 그림자를 향해 위협성을 토해 냈지만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었다.
단지 손만이 아니라 이제 그림자에서는 검은색 오우거 하나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오우거는 그 그림자를 향해 거세게 주먹을 내려쳤다.
단단한 갑옷과 잘 벼려진 칼날조차 짓뭉개 버린다는 오우거의 주먹에 기어 나오던 검은 오우거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오우거는 널브러진 상대의 모습에 기분이 좋은 듯 낮은 소리를 냈는데 사실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오우거가 조금만 더 지능이 높았다면 눈치챘겠지만, 이미 검은 오우거는 그림자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있었다.
검은 오우거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오우거를 덮쳤다. 두 마리의 오우거가 뒤엉켜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서로의 살을 찢었다.
“하아, 하아!”
제대로 발동된 마법과 눈앞의 모습들에 잠시 굳어 있던 시동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움직였다.
애초부터 괴물들의 승패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도망칠 수 있는 시간만 벌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 위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산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오우거와 같은 괴물을 만날 확률은 높아지고, 해가 지면 더 위험해질 것은 당연했지만 그는 위를 목표로 걸었다.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무작정 내려갈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다가는 한 자리를 빙빙 돌 뿐이라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높은 곳에서 자신이 있는 곳과 주변 지형을 알아낼 생각인 것이다.
“젠장, 젠장, 젠장!”
그러나 걸음을 옮길수록 욕설이 절로 나왔다.
다리를 비롯해 온몸 여기저기가 아팠고 금방이라도 뒤쪽에 오우거가 쫓아올 거 같은 두려움이 그를 감쌌다.
꽤 오래 걸었음에도 오우거의 울음이 바로 뒤에서 들린 것 같은 기분에 그는 벌써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거기다 설사 어느 정도 위로 올라가 주변을 돌아본다고 해도 그 이후에 길을 잃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우거 같은 괴물이나 야생동물의 위협은 물론이고 먹을 건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었다.
또한 그나마 지금은 하늘 위에 해가 있어서 이 정도지, 밤이 되면 그가 할 수 있는 것 따위는 없었다.
하다못해 그는 혼자 힘으론 모닥불조차 피우지 못한다. 부싯돌이라도 있다면 몰라도,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네체른의 서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발!”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계속해서 발길을 옮겼다. 어떤 희망을 갖고 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래야 하기 때문에 말이다.
위로. 그리고 또 위로. 바위 언덕을 오르고 수풀을 지나 마치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물론 아무리 그래 봤자 해지기 전에는 정상, 아니, 중턱에도 미치지 못할 듯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노력이 보답이라도 받은 것일까, 주변 풍경과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돌들의 나열이 보였다.
“설마, 설마!”
그는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은 듯 그것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그는 감격의 환호성을 질렀다.
“우아아아! 길이다!”
그것은 돌길이었다. 투박하고 조잡했지만 분명 사람의 흔적이 묻어 있는, 누군가 손수 만들어 놓은 길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길이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음…….”
벅차오르는 기쁨이 지나고 시동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비록 어느 쪽으로 가야 가까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다지만 몸과 마음 모두가 지친 여행자가 선택하는 쪽은 당연히 한 가지였다.
“그래 이쪽이다.”
시동은 산 아래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물론 산 속에 작은 마을들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시동은 계속 위로만 올라갔던 조금 전의 여파 때문인지 길을 찾자마자 위로 올라가는 것 자체에 질려 버린 것이다.
“아, 살 것 같다.”
시동은 확실히 길을 따라 걸으니 다리가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돌 위보다는 흙 위를 걷는 것이 다리에 무리가 덜 가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도 같은 길을 걸을 때 이야기였다.
방향을 잃어버릴까 정신을 집중한 채 크고 작은 언덕들과 나무와 수풀 사이를 헤집고 걷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붙이기 좋은 환경인 것이다.
지금처럼 그저 길을 따라 걷는 것에 어찌 비할 수 있겠는가. 어느새 시동은 상처의 아픔도 잊고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르고 시동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조금 더 걸어야 하긴 하겠지만 저 밑에 작은 마을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
그런데 정작 마을을 보자 시동은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만일 저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이 네체른의 서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자신을 덮치던 그 푸른빛이 도저히 잊히지가 않았다.
부르르.
그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몇 년 전부터 베테르의 곁에서 온갖 마법과 저주, 합성 괴물들을 봐 왔고 네체른의 서를 손에 넣은 뒤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지옥의 풍경도 봐 왔던 그였지만 그 푸른빛만은 차원이 달랐다.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가 사라질 것 같은 그 아득함과 그것을 뛰어넘는 신성함. 그것은 일반적인 공포나 두려움, 불안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것이었다.
“…….”
그는 손에 들린 네체른의 서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자신의 생명은 심장이나 머리 속에 있는 게 아니었다. 손에 들린 이 책이 바로 자신의 생명이었다. 네체른의 서는 그를 저주에서 지켜 주고 있으면서도, 그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위험과 적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래. 이대로는 안 돼.”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주변의 넓은 나뭇잎 몇 개와 넝쿨들을 모았다. 그것들을 이용한다면 네체른의 서를 충분히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단순히 싸매서 가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 또한 알고 있었다.
혼자 산에서 내려온 어린아이가 뭔가 소중히 들고 있고, 그것이 뭔가에 꽁꽁 싸매어져 있다면 누구든 호기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걸로는… 뭔가…….”
그때 그의 눈에 작은 도마뱀 몇 마리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는 도마뱀을 쫓기 시작했다.
독이 있는 종류인지 어떤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도마뱀을 잡았고 도마뱀 말고도 눈에 띄는 쥐나 좀 커다란 벌레들은 닥치는 대로 다 때려잡았다.
꽤 오래 뛰어다녀 온몸이 땀에 젖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잡은 사냥감의 수가 어느 정도 되자 그는 곧바로 나뭇잎과 넝쿨로 네체른의 서를 싸매기 시작했다. 싸매는 도중 네체른의 서를 놓쳐 간담이 서늘해지는 경험도 했지만 그 결과 네체른의 서가 몸에서 떨어져도 저주와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니 그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추 헝겊 가방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을 때, 자신이 잡은 사냥감들을 같이 넣었다. 물론 도마뱀 꼬리나 벌레의 일부 같은 게 삐져나오게 말이다.
“됐다!”
그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완성품은 얼추 식량을 집어넣은 주머니처럼 보였다. 산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굶어죽지 않기 위해 닥치는 대로 먹을 걸 모아놓은 조잡한 식량 주머니 말이다.
그는 그것을 품 안에 안고 다시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꽤 걸릴 것 같았지만, 적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 친절. 꿈, 희망(1)
시동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집집마다 곧 닥쳐올 어둠을 대비하는 촛불이 켜졌다.
“…….”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하룻밤 묵을 만한 곳을 찾았다. 가진 거라곤 없었지만 흔히 이런 시골 마을은 말만 잘하면 밥은 안 줘도 하룻밤 잘 곳 정도는 주는 법이었다.
“저, 저기…….”
“응?”
그는 지나가던 사람 중 한 명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혹시 여관이 어딘지 아시나요?”
“아, 저기 모퉁이를 돌면 간판이 보일 거다.”
역시나 작은 마을답게 대답은 금방 나왔다. 사실 어차피 돈도 없는 이상 굳이 여관을 찾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빈 방이 많이 있으면 이야기가 더 쉬울 거라는 계산이었다.
“감사합니다.”
시동은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곧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시동을 불러 세웠다.
“이봐! 설마 혼자 저 산을 넘은 거야?”
남자는 이제야 시동의 모습을 제대로 본 듯싶었다.
시동이 돌아보니 그는 여기저기 말이 아닌 시동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네.”
시동의 대답에 남자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어떤 감정이 스쳤다.
“너 대단하구나! 길이야 예전 제국군이 만들어 놓은 길이 있다고는 해도 오우거나 다른 산짐승들이 많았을 텐데.”
“아, 아 예.”
시동은 혹시 이러다 남자의 입에서 어디서 왔냐는 질문이 나올까 초조했다. 아직 이 마을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시동으로서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멀리서 왔다고 하면 문제는 없겠지만, 그 푸른빛을 본 뒤로는 작은 의심이나 주목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 남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이후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근데 여관에서 묵을 돈은 있니?”
조심스런 물음에 시동의 눈동자가 빛났다. 분위기상 잘 곳은 해결된 거나 다름없었다.
“사실은 없어요. 하지만 어떻게 말을 하면…….”
“에이, 에윈한테 그런 건 안 통해.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데. 차라리 우리 집으로 가자. 힘들었을 텐데 여독이나 좀 풀라고.”
“가, 감사합니다!”
시동은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올리며 남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쉽게 잠자리를 얻은 것과 잘하면 식사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