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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체른의 서 1(3화)
2. 친절. 꿈, 희망(2)


“근데 그건 뭐니?”
“아, 산에서 먹을 걸 넣어 놓던 가방이에요.”
갑작스런 질문에 움찔할 뻔했지만, 시동은 애써 아무것도 아닌 척 가방을 툭툭 쳐 보이기까지 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건 잃어버렸거든요.”
그리고 그럴듯한 거짓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거짓말과 답변이 꽤 도움이 되었는지 상대는 더 이상 의문을 지니지 않았다.
“그래? 뭐 내가 뭐라고 할 건 아니지만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먹어 봐서 알겠지만 저 산에 있는 건 대부분 다 어느 정도 독을 가지고 있거든. 뭐 큰일은 안 나겠지만 배탈 나기 쉽다고.”
“아, 예. 그래도 힘들게 잡은 거라서요.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뭐, 그렇긴 그렇지. 솔직히 살림이 넉넉하면 나중에 갈 때 목적지까지 먹을 음식이라도 싸 주겠지만 보다시피 다들 어려운 상황이라서 말이야.”
남자의 말대로 지나다니는 마을 사람들 얼굴에는 기름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요, 괜찮아요.”
시동과 남자는 이후로도 꽤 오래 동안 걷고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시동은 남자가 또 무슨 질문을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남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 여기가 우리집이야.”
남자의 집은 마을 외곽 쪽에 있었는데 굉장히 작았다.
남는 방 따위는 없을 것 같은 외관에 시동은 조금 불안했지만 눈앞에 이 남자가 자신이 한 말을 뒤집지는 않을 것이었다.
거기다 한때는 동물 우리나 창고에서도 잠을 청해야 했던 그였다. 잠만 잘 수 있다면 방이든 바닥이든 아무 상관없었다.
“걱정 마. 좁아 보여도 빈 방 하나 정도는 있어. 얼마 전에 아내랑 아들이 친척집으로 갔거든.”
“아!”
시동은 문을 여는 남자의 얼굴에 순간 쓸쓸함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뭔가 사연이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의 말에 일단 안심부터 한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했기 때문이다.
“저 방이 아들 방이야. 피곤할 텐데 우선 저기서 좀 쉬도록 해. 나도 좀 눈을 붙일 테니까. 아, 씻고 싶으면 뒤쪽 개울로 가면 돼.”
“감사합니다.”
시동은 남자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말 그대로 친절에 대한 감사이기도 했지만, 그 몸에 박힌 노예 생활 때문이었다.
주인이 잠이 들지 않으면 절대로 잠자리에 들 수 없다.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행동할 수 없다.
그 오랜 습관이 감사나 겸손 뒤에서 비굴함이란 이름으로 숨어 있는 것이었다.
털썩.
“…….”
남자가 침대에 눕는 소리가 나자, 시동은 그제야 그가 가리켰던 방으로 걸어갔다. 침대와 책상 하나가 겨우 들어와 있는 작은방이었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솔직히 말한다면 지금까지 그가 가졌던 숙소 중 가장 좋았다. 물론 베테르가 셰알을 정복한 며칠 동안은 그 또한 화려한 방 하나를 받기는 했다.
다만 침공 대비니 세계 정복이니 하며 그를 부려 먹는 베테르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결국 한 방에 무너졌지만 말이야.”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그때 그 푸른빛이 스쳤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하던 푸른빛.
그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음에도 그것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죽음을 직감했다.
너무도 경외로웠던 빛. 그것을 떠올린 것만으로 시동의 어깨는 자기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그는 깊은 심호흡을 내뱉었다. 호흡 한 번에 검은 두려움이 흘러나오고, 미친듯 쿵쾅대던 심장과 흔들리던 어깨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괜찮아, 괜찮아. 난 숨을 거야. 절대 그 늙은이 같은 짓은 안 해. 그래, 난 괜찮아.”
시동은 자신을 다독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정돈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포근해 보이는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후우.”
그리곤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역시 한동안 아예 청소를 안 했는지 먼지가 꽤 날렸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아, 아야!”
정신적 긴장이 풀리자 지금껏 무시하고 있던 육체적 고통이 그를 덮쳤다.
도망치느라 몰랐겠지만, 시동의 무릎에 난 상처에서는 꽤 많은 피가 흘러내렸었고 그의 다리에는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음? 근데 생각보다 상처가 안 크네? 분명 더 심했던 거 같은데…….”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이 정도의 피가 흘러나왔을 정도라면 찢어진 정도가 훨씬 심할 터였는데 그에 무릎에 난 상처는 생각보다 양호했다.
“뭐, 상처가 심하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이지. 그것보다 대체 난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몰래 보석이라도 챙겨 놓는 건데…….”
죽을 위험에서 벗어나 이제 잘 곳까지 생겼지만, 그 가슴에는 안도감이 아니라 걱정이 가득했다.
그로서는 지금에 상황이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살기 위해 무작정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는 했지만,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아니, 이후 며칠 정도야 여기서 신세를 질 수 있다 해도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에겐 지금 돈이 될 만한 물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는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굳이 따지자면 아예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문제였다.
저주받은 마도서 네체른의 서. 가지고 있는 걸 들켰다가는 자신은 그날로 전 세계의 공적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딘가에 버리거나 태워 버렸다가는 저주로 죽어 버린다.
“하아.”
그로서는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게 다 그 미친 늙은이 때문이야!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세계 정복이 뭐야 세계 정복이!”
시동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물론 사실 베테르가 네체른의 서를 찾지 못했다 해도, 아니 찾았음에도 비밀로 하여 만약 아직 살아 있다고 해도.
시동 입장에서는 지금보다 나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그의 목숨은 베테르의 손 안에 있을 테고, 베테르가 변덕이라도 부린다면 언제든 실험 재료나 몬스터의 먹이가 될 터였다.
“제길!”
다만 지금 시동에게는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인 악독한 흑마법사에게 그런다고 해서 뭐라 탓할 사람은 없었다.
“대체 이게 뭔데……!”
시동은 넝굴과 나뭇잎으로 싸매어 놓았던 네체른의 서를 꺼내 펼쳤다. 무슨 목적이 있는 행동이 아니라 단순히 화를 표출하는 과정에 일부였다.
“이딴 게 뭔데! 이딴 게 뭔데 사람 목숨을 우습게 아는 거야? 이딴 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냐고!”
시동은 밖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하지만 강력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분노, 두려움, 망막함, 원망, 슬픔, 서러움. 채찍질을 피해서, 또는 살아남기 위해서. 그저 지금까지 마음에 쌓아 놓기만 하던 그 모든 것을 그는 처음으로 밖으로 토해 내고 있었다.
“후우, 후우.”
시동은 그렇게 한참 동안 감정을 토해 내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시동의 눈가에는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있었지만 정작 그는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
흥분이 가라앉자 시동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는 네체른의 서로 향했다.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은 공교롭게도 베테르가 셰알 요새에 사람들에게 사용했던 그 주술이었다.
“새벽 명성 집… 음!”
무심코 제목을 읽어 나가던 시동은 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산에서도 단순히 주문을 읽었을 뿐인데도 발동되었는데 지금이라고 안 그럴 보장은 없었다.
“…….”
그는 무심결에 소리 내어 읽지는 않을까 각별히 조심하며 내용을 읽어 갔다.
새벽 명성 집회.
그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을 뺏고 그 사고 자유까지 뺏어 사람을 말 그대로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궁극에 지배술.
마왕 네체른이 사용했던 수많은 사술들 중에서도 단연 그 악명을 떨쳤던 것으로, 사실 드래곤족이 네체른의 서 소멸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도 과거 네체른이 이 주술로 그 어떤 최면이나 세뇌, 정신 지배도 통하지 않는다는 드래곤을, 비록 해츨링이나 다름없는 어린 용이었지만 꼭두각시로 만든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도의적인 것들을 빼놓고 본다면, 아주 매력적인 주술인 건 사실이었다. 자유의지를 말살하는 완전한 지배라니.
굳이 대규모의 인간이나 드래곤 같은 강자에게 사용하지 않아도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그에게도 충분히 도움이 되는 주술이었다.
하지만,
“뭐가 이딴……!”
노예로서 살아왔던 그로서는 그 주술은 매력적이라기보다는 끔찍할 뿐이었다.
“꼭두각시라고? 생명을 뭐라고 아는 거야!”
욱하는 마음에 집어 던질 듯 책을 들었던 그는, 곧 아차하며 책을 내려놓았다.
“역시 이 책은 없어져야 하는 게 맞아.”
그는 곧 분해했던 넝굴과 나뭇잎들을 다시 모아 네체른의 서를 꽁꽁 싸매었다. 그러곤 마치 다시는 볼 생각이 없다는 듯 몇 번이나 매듭을 묶고는 배게 밑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자자.”
그 모든 일을 마친 그는 그대로 몸을 뉘였다. 변한 것은 없었지만, 한바탕 쏟아 낸 덕분에 잠을 청하기는 훨씬 편했다.
그는 꽤 깊은 수면을 취했다. 죽을 뻔하고, 오우거에 쫓기고, 저주받은 마법서도 읽고. 악몽을 꾸기에 이상하지 않을 하루였지만 다행히 악몽도 없었다.
그는 오랜만에 단잠에 취했다. 그리고 그가 눈을 뜬 것은 달이 가장 높은 하늘에 떴을 때였다.
“으음…….”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그는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는 보름달이었다. 그는 그 아름다움에 자기도 모르게 한참이나 멍하니 보름달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러다 문뜩 뭔가 기억하기 싫은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푸른 보름달이 떴을 때는 조심해라. 늑대가 네 목을 노린다.”

그의 주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로서는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상에 두려울 것 없다는 듯 행동하던 흑마법사 베테르조차 푸른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마법 의식이나 실험을 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심상치 않은 일임은 확실했다.
“……뭐 상관없겠지.”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잠을 청하기로 했다. 솔직히 마법 의식이나 실험은 하고 싶어도 할 줄 몰랐고 어차피 이대로 자 버리면 아무 일 없이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잠에 들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자니?”
“아, 아닙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재빨리 문을 열었다.
역시나 오랜 노예 생활과 시동 노릇으로 몸에 배인 것이었다.
“아, 내가 깨웠나 보군, 미안. 그래도 식사는 해야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커다란 고기 한 점이 담긴 접시와 빵을 내밀었다.
이런 한밤중에 식사를 한다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그는 감사히 받았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하, 감사는 무슨. 네 덕분에 나도 손님 핑계 대고 평소보다 더 많이 받았으니 내가 더 고맙지. 아, 맞다. 물을 안 가져다줬군.”
남자는 곧바로 물 한 잔을 떠와 건네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제가 가져다 먹으면 되는 건데…….”
시동은 거의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이러한 친절에 말 그대로 몸 둘 바를 몰랐다.
철창 속에서 노예 상인이 식사라며 던져 준 음식을 받아먹을 때 말고는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남이 차려다 준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그럼 먹고 또 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