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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ase be with me 1권
1권 1화
1. 그녀의 마음에 노크를(1)
조용한 법정 안에 사각사각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누구 하나 침만 크게 삼켜도 일제히 시선이 몰릴 것 같은 정적이다.
그런 숨 막힘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판사석 중앙에 앉은 재판장은 여유롭게 서류를 읽고 양쪽 옆에 앉은 배석판사들에게 귓속말로 의견을 구했다. 원고 측 변호사가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가방을 뒤져 티슈를 꺼내 이마에 배인 땀을 닦았다. 맞은편에 앉은 피고 측 변호인 강한주 변호사는 흘깃 그 모습을 넘겨보고 보일 듯 말 듯 0.1초 정도의 미소를 머금었다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이게 수치 차이가 많이 나는군요.”
검토를 마친 재판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고 원고 측 변호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판장님. 이미 측량 보고서는 저희가 소장과 함께 제출한 것이 인정이 된 상태입니다. 이제 와서 그걸 변경한다는 건 재판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건데…….”
판사의 서늘한 시선이 흥분한 원고 측 변호사에게 가 닿았다가 피고 측 변호사인 한주에게로 옮겨 왔다. 한주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재판이 잘못된 측량 때문에 시작된 건데 원고 측에서 제출한 측량 보고서 수치에 문제가 있다면 재판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강 변호사!”
흥분을 참지 못한 원고 측 변호사의 외침에 판사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원고 측 변호인. 진정하세요.”
판사의 단호한 말투에 원고 측 변호사가 움찔하며 멍하니 판사를 바라봤다. 한주는 종이 몇 장을 들고 와 법정 서기와 상대편 변호사에게 건네주었다. 법정 서기가 판사에게 넘긴 서류를 본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다시피 저희 쪽에서 제출한 측량 보고서를 작성한 기관은 정부에서 공인을 받은 곳입니다. 원고 측에서 저희가 제출한 보고서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적어도 공신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관에서 새로 작성한 보고서를 제출해 주셔야 합니다. 아니시면 원고 측에서 제출하신 측량 보고서를 작성한 기관을 인증할 수 있는 적법한 문서를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를 확인한 원고 측 변호사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감돌았다.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원고 측의 측량 보고서가 작성된 당시에는 해당 사무소에 측량사 자격증을 가진 직원이 없었습니다. 측량 보조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 있었고요. 원고 측에서 피고 구청의 측량사 자격증을 소지한 직원의 보고서를 믿을 수 없다고 하셔서 공인된 기관에서 다시 받은 이번 보고서는 지난번 피고 구청의 직원이 작성한 보고서와 수치가 일치합니다. 재판부에서 제 3의 기관에 다시 측량을 의뢰하셔도 공인된 기관이라면 저희는 인정하겠습니다.”
재판을 마치고 법정을 나선 한주는 시계를 확인하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출석한 재판은 한주가 고문으로 있는 구청이 피고인 행정 사건이었다. 구청 고문은 박한 고문비에 비해 상당히 성가신 일이었지만 꽤 재미가 있기도 했다. 별의별 사건을 다 가지고 오는 담당 직원 덕에 변호사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행정 소송은 서류 싸움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인 지루한 재판이지만 오늘처럼 소소한 재미가 있기도 하고.
“재판부에서 측량 보고서 검토하고 기일 다시 잡기로 했으니까 기일 통지서 오면 알려 주세요. 원고 측에서 증인 신청했는데 증인 신청서 좀 받아 주시고요.”
한주의 담당 직원인 선혜의 책상 위에 방금 다녀온 재판의 기록을 올려놓고 간단히 지시를 한 후 방으로 들어오자 한주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센스 있는 선혜가 가져다 놓은 커피가 아직도 따끈하게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커피 잔을 끌어다 한 모금 마셨다. 한주를 위해 새로 내린 커피인지 맛이 썩 좋았다.
“아, 좋다.”
아침부터 부산을 떤 피로를 한 모금의 커피로 싹 날려 버린 한주가 팔을 위로 들어 기지개를 길게 켜고 모니터 앞으로 다가서려다 낯선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위에는 같은 사무실 동료이자 선배인 박기형 변호사의 필체로 간단한 문장이 적힌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검토 요망.
얄팍하고 가벼운 봉투를 들어 앞뒤로 돌려 봤지만 봉투 겉면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봉투 안에서 기록을 꺼냈다. 맨 앞표지에 적힌 사건명은 손해배상. 원고는 스타기획, 피고의 이름은 이준우. 피고의 이름 위에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놓은 것은 기형과 한주 사이에 통하는 표시법이다. 그렇다면 한주가 맡아야 할 쪽은 피고라는 얘기겠다.
빠르게 눈으로 내용을 훑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피고 이준우의 소속사였던 원고 스타기획이 피고 측의 귀책사유로 인한 계약파기의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을 신청한 사건이었다. 내용상 피고 이준우가 연예인인 것은 알겠으나 귀에 선 이름이었다. 하기는 한주가 아는 연예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얇은 기록에는 소장을 제외하면 별 정보가 없었다.
대충 살펴보고 다시 기록을 봉투 안에 넣어 옆으로 밀어 놓았다. 작성 중인 문서를 불러 올리고 사건 기록을 꺼내 펴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작성한 문장 뒤에 덧붙일 말을 생각하느라 키보드 위에 양손을 올리고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옆으로 밀쳐 놓은 기록이 나 좀 봐 달라고 하는 것처럼 자꾸만 눈을 잡아끌었다. 들춰 봤자 읽을 내용도 없는 기록인데. 한주는 결국 다시 기록 봉투를 잡아 당겨 내용물을 꺼냈다. 연예인이면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포털 사이트에 이준우, 라는 이름을 검색하자 가수, 준(JUN)의 프로필이 가장 위에 떴다. 본명 이준우, 나이 26살. 고등학생 시절에 3인조 그룹으로 데뷔했지만 20대 초반 이른 군 생활을 마친 후 솔로로 전향한 8년차 가수.
검색 결과에 뜬 프로필의 사진을 클릭해서 크게 띄워 봤다. 입을 꾹 다물고 강렬한 눈빛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남자는 이름만큼이나 낯선 얼굴이었다.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깍지를 낀 손 위에 턱을 얹고는 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참 잘생긴 얼굴이다. TV나 잡지 따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얼굴이지만 진지하고 깊은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연예인 의뢰인이라. 과연 직접 볼 일이 있을까 싶지만 실물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한참 그렇게 사진을 보다가 한주는 인터넷 창을 닫고 기록을 챙겨 다시 봉투에 넣었다.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밀린 일이 산더미다.
― 딩동.
모니터 한쪽 구석에서 편지봉투 모양 아이콘이 반짝거리면서 이메일이 온 것을 알렸다. 간신히 일에 집중해 들어가던 한주는 일단 무시했지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중력이 흩어지는지 결국 반짝거리는 아이콘을 클릭해 메일함을 열었다.
굵은 글자로 표시된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한주의 눈동자가 심하게 커졌다. 잘못 봤나. 등을 뒤로 젖히고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다시 눈을 똑바로 뜨고 확인했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제목은 없다. 읽지 않고 삭제할 작정으로 메일 리스트 옆에 체크를 하고 삭제 버튼 위에 마우스를 가지고 갔지만 차마 누르지 못했다.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오지 말아야 할 곳에서 온 이메일이다. 잠시 파도에 휘말린 조각배처럼 미친 듯이 출렁이던 마음이 잠잠해지면서 한주는 텅 비어 있는 이메일 제목 부분을 클릭했다.
한주야……. 한주야……. 한주야.
이메일은 이 한 줄이 다였다. 맥이 탁 풀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려가지 않는 스크롤을 계속해서 밀어 봤지만 그게 다였다.
한주는 멍한 눈빛으로 자기 이름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이런 장난 같은 이메일을 보낼 사람이 아니다. 이 좁은 바닥에서 서로 마주치지 않기 위해 2년째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고 있는데. 저런 뜬금없는 이메일로 한주를 뒤흔들 사람이 아님을 너무 잘 알기에 더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술이라도 마신 걸까. 이메일을 보낸 걸 기억도 못 하는 게 아닐까. 술주정이라면 전화도 있을 텐데 어떻게 이메일을 보냈을까. 이런 의문을 떠올리자마자 해답도 같이 떠올랐다. 아무리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어도 차마 전화는 걸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탁. 괜히 죄 없는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 좁은 사무실 안을 뱅뱅 돌았다. 아직 멀었구나. 2년이 지났고 이제는 잊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한 줄뿐인 이메일에 이렇게 흔들리다니. 다시 자리에 앉아 집어 던졌던 서류철을 잡아당겨 펼쳤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한주는 포기하고 의자에 몸을 눕힌 채 눈을 감았다.
― 똑똑.
노크 소리에 눈을 뜨니 선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고 있다.
“박 변호사님이 방으로 좀 오시라는데요.”
“네.”
한주는 손바닥으로 눈을 쓱쓱 문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렀어요? ……어, 손님이 계셨네.”
평소처럼 기형의 사무실의 문을 덜컥 열고 들어서던 한주는 소파에 앉은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기형이 와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한주는 조심스럽게 한쪽 소파에 몸을 걸치며 낯선 얼굴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다란 다리를 소파 아래로 뻗고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던 남자가 얼른 자세를 바로잡으며 한주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주 고개를 숙이며 스쳐 지나가던 한주의 시선이 되돌아가 남자에게 멎었다.
예사로 보이지 않는 외모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 여리여리하게 마른 몸에 곱상하게 생긴 얼굴까지. 뭔가 평범하지 않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한주는 남자의 얼굴에 지나치게 오래 머물렀던 시선을 얼른 돌리며 기형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 불렀어요? 손님도 계신데.”
“소개하려고 불렀지. 준우야, 인사해. 네 사건 담당할 강한주 변호사야.”
준우라고 불린 남자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우며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주는 얼떨결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의아한 얼굴로 기형을 보았다.
“사건이요?”
“아까 내가 네 방 책상 위에 기록 올려놨는데 못 봤어? 원고 스타기획, 피고 이준우.”
한주는 다시 놀란 눈을 앞자리의 남자에게 돌렸다. 그러고 보니 기형이 좀 전에 저 남자를 준우야, 라고 불렀다.
“그럼 이분이 당사자 이준우 씨라는 거예요?”
“강 변호사, 얘 모르는구나. 밖에 여직원들은 알던데. 준우야, 상처 받지 마라. 이 친구가 아는 연예인이 나보다 적을 거야.”
기형의 말에 남자가 씩 웃었다. 이 사람이구나. 한주는 애써 시선을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곁눈으로 남자를 힐끔거렸다. 아까 한주가 인터넷으로 봤던 사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마른 몸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큰 키에, 작은 머리와 긴 팔다리 그리고 노랑에 가까운 밝은 색으로 염색한 머리와 성인 남자의 것이라기엔 너무 깨끗한 피부까지, 어찌나 튀는지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외모다. 하지만 모르고 만났다면 아마 아까 그 사진 속의 인물과 눈앞의 남자가 동일인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을 것 같다.
어쨌거나 헐렁한 청바지에 흰색 면 티셔츠를 입고 헤어 스타일링 제품은 하나도 바르지 않은 듯 하늘거리는 앞머리가 이마를 살짝 덮은 저 남자는 변호사 사무실이라는 무채색의 배경에 비해서 너무 튀었다.
“선배는 왜 의뢰인한테 얘, 얘 거려요?”
한주가 눈치를 살피며 나직하게 기형에게 묻자 기형과 준우가 동시에 웃었다.
“사촌 형이에요.”
준우가 입을 열었다. 곱상한 외모와는 다르게 목소리는 묵직한 중저음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준우입니다.”
준우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참 싹싹하구나. 한주는 속으로 생각하며 또 한 번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선배한테 기록 전달받고 좀 보기는 했습니다. 일단 필요한 자료들은 그 안에 대충 들어 있는 것 같고요, 혹시 보충할 것이 있거나 하면 어디로 연락을 드릴까요?”
“저한테 전화 주세요. 혹시 전화 연결이 안 되면 음성 남겨 주세요. 제가 전화 드릴게요.”
준우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그럼.”
한주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기형이 어, 하며 한주의 팔을 잡았다.
“왜요?”
“바쁘냐?”
“그럼 안 바빠요?”
“밥이나 먹자, 셋이.”
“바쁘다니……까요.”
1권 1화
1. 그녀의 마음에 노크를(1)
조용한 법정 안에 사각사각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누구 하나 침만 크게 삼켜도 일제히 시선이 몰릴 것 같은 정적이다.
그런 숨 막힘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판사석 중앙에 앉은 재판장은 여유롭게 서류를 읽고 양쪽 옆에 앉은 배석판사들에게 귓속말로 의견을 구했다. 원고 측 변호사가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가방을 뒤져 티슈를 꺼내 이마에 배인 땀을 닦았다. 맞은편에 앉은 피고 측 변호인 강한주 변호사는 흘깃 그 모습을 넘겨보고 보일 듯 말 듯 0.1초 정도의 미소를 머금었다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이게 수치 차이가 많이 나는군요.”
검토를 마친 재판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고 원고 측 변호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판장님. 이미 측량 보고서는 저희가 소장과 함께 제출한 것이 인정이 된 상태입니다. 이제 와서 그걸 변경한다는 건 재판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건데…….”
판사의 서늘한 시선이 흥분한 원고 측 변호사에게 가 닿았다가 피고 측 변호사인 한주에게로 옮겨 왔다. 한주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재판이 잘못된 측량 때문에 시작된 건데 원고 측에서 제출한 측량 보고서 수치에 문제가 있다면 재판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강 변호사!”
흥분을 참지 못한 원고 측 변호사의 외침에 판사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원고 측 변호인. 진정하세요.”
판사의 단호한 말투에 원고 측 변호사가 움찔하며 멍하니 판사를 바라봤다. 한주는 종이 몇 장을 들고 와 법정 서기와 상대편 변호사에게 건네주었다. 법정 서기가 판사에게 넘긴 서류를 본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다시피 저희 쪽에서 제출한 측량 보고서를 작성한 기관은 정부에서 공인을 받은 곳입니다. 원고 측에서 저희가 제출한 보고서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적어도 공신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관에서 새로 작성한 보고서를 제출해 주셔야 합니다. 아니시면 원고 측에서 제출하신 측량 보고서를 작성한 기관을 인증할 수 있는 적법한 문서를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를 확인한 원고 측 변호사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감돌았다.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원고 측의 측량 보고서가 작성된 당시에는 해당 사무소에 측량사 자격증을 가진 직원이 없었습니다. 측량 보조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 있었고요. 원고 측에서 피고 구청의 측량사 자격증을 소지한 직원의 보고서를 믿을 수 없다고 하셔서 공인된 기관에서 다시 받은 이번 보고서는 지난번 피고 구청의 직원이 작성한 보고서와 수치가 일치합니다. 재판부에서 제 3의 기관에 다시 측량을 의뢰하셔도 공인된 기관이라면 저희는 인정하겠습니다.”
재판을 마치고 법정을 나선 한주는 시계를 확인하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출석한 재판은 한주가 고문으로 있는 구청이 피고인 행정 사건이었다. 구청 고문은 박한 고문비에 비해 상당히 성가신 일이었지만 꽤 재미가 있기도 했다. 별의별 사건을 다 가지고 오는 담당 직원 덕에 변호사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행정 소송은 서류 싸움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인 지루한 재판이지만 오늘처럼 소소한 재미가 있기도 하고.
“재판부에서 측량 보고서 검토하고 기일 다시 잡기로 했으니까 기일 통지서 오면 알려 주세요. 원고 측에서 증인 신청했는데 증인 신청서 좀 받아 주시고요.”
한주의 담당 직원인 선혜의 책상 위에 방금 다녀온 재판의 기록을 올려놓고 간단히 지시를 한 후 방으로 들어오자 한주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센스 있는 선혜가 가져다 놓은 커피가 아직도 따끈하게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커피 잔을 끌어다 한 모금 마셨다. 한주를 위해 새로 내린 커피인지 맛이 썩 좋았다.
“아, 좋다.”
아침부터 부산을 떤 피로를 한 모금의 커피로 싹 날려 버린 한주가 팔을 위로 들어 기지개를 길게 켜고 모니터 앞으로 다가서려다 낯선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위에는 같은 사무실 동료이자 선배인 박기형 변호사의 필체로 간단한 문장이 적힌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검토 요망.
얄팍하고 가벼운 봉투를 들어 앞뒤로 돌려 봤지만 봉투 겉면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봉투 안에서 기록을 꺼냈다. 맨 앞표지에 적힌 사건명은 손해배상. 원고는 스타기획, 피고의 이름은 이준우. 피고의 이름 위에 형광펜으로 표시를 해놓은 것은 기형과 한주 사이에 통하는 표시법이다. 그렇다면 한주가 맡아야 할 쪽은 피고라는 얘기겠다.
빠르게 눈으로 내용을 훑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피고 이준우의 소속사였던 원고 스타기획이 피고 측의 귀책사유로 인한 계약파기의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을 신청한 사건이었다. 내용상 피고 이준우가 연예인인 것은 알겠으나 귀에 선 이름이었다. 하기는 한주가 아는 연예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얇은 기록에는 소장을 제외하면 별 정보가 없었다.
대충 살펴보고 다시 기록을 봉투 안에 넣어 옆으로 밀어 놓았다. 작성 중인 문서를 불러 올리고 사건 기록을 꺼내 펴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작성한 문장 뒤에 덧붙일 말을 생각하느라 키보드 위에 양손을 올리고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옆으로 밀쳐 놓은 기록이 나 좀 봐 달라고 하는 것처럼 자꾸만 눈을 잡아끌었다. 들춰 봤자 읽을 내용도 없는 기록인데. 한주는 결국 다시 기록 봉투를 잡아 당겨 내용물을 꺼냈다. 연예인이면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포털 사이트에 이준우, 라는 이름을 검색하자 가수, 준(JUN)의 프로필이 가장 위에 떴다. 본명 이준우, 나이 26살. 고등학생 시절에 3인조 그룹으로 데뷔했지만 20대 초반 이른 군 생활을 마친 후 솔로로 전향한 8년차 가수.
검색 결과에 뜬 프로필의 사진을 클릭해서 크게 띄워 봤다. 입을 꾹 다물고 강렬한 눈빛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남자는 이름만큼이나 낯선 얼굴이었다.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깍지를 낀 손 위에 턱을 얹고는 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참 잘생긴 얼굴이다. TV나 잡지 따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얼굴이지만 진지하고 깊은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연예인 의뢰인이라. 과연 직접 볼 일이 있을까 싶지만 실물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한참 그렇게 사진을 보다가 한주는 인터넷 창을 닫고 기록을 챙겨 다시 봉투에 넣었다.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밀린 일이 산더미다.
― 딩동.
모니터 한쪽 구석에서 편지봉투 모양 아이콘이 반짝거리면서 이메일이 온 것을 알렸다. 간신히 일에 집중해 들어가던 한주는 일단 무시했지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중력이 흩어지는지 결국 반짝거리는 아이콘을 클릭해 메일함을 열었다.
굵은 글자로 표시된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한주의 눈동자가 심하게 커졌다. 잘못 봤나. 등을 뒤로 젖히고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다시 눈을 똑바로 뜨고 확인했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제목은 없다. 읽지 않고 삭제할 작정으로 메일 리스트 옆에 체크를 하고 삭제 버튼 위에 마우스를 가지고 갔지만 차마 누르지 못했다.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오지 말아야 할 곳에서 온 이메일이다. 잠시 파도에 휘말린 조각배처럼 미친 듯이 출렁이던 마음이 잠잠해지면서 한주는 텅 비어 있는 이메일 제목 부분을 클릭했다.
한주야……. 한주야……. 한주야.
이메일은 이 한 줄이 다였다. 맥이 탁 풀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려가지 않는 스크롤을 계속해서 밀어 봤지만 그게 다였다.
한주는 멍한 눈빛으로 자기 이름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이런 장난 같은 이메일을 보낼 사람이 아니다. 이 좁은 바닥에서 서로 마주치지 않기 위해 2년째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고 있는데. 저런 뜬금없는 이메일로 한주를 뒤흔들 사람이 아님을 너무 잘 알기에 더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술이라도 마신 걸까. 이메일을 보낸 걸 기억도 못 하는 게 아닐까. 술주정이라면 전화도 있을 텐데 어떻게 이메일을 보냈을까. 이런 의문을 떠올리자마자 해답도 같이 떠올랐다. 아무리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어도 차마 전화는 걸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탁. 괜히 죄 없는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 좁은 사무실 안을 뱅뱅 돌았다. 아직 멀었구나. 2년이 지났고 이제는 잊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한 줄뿐인 이메일에 이렇게 흔들리다니. 다시 자리에 앉아 집어 던졌던 서류철을 잡아당겨 펼쳤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한주는 포기하고 의자에 몸을 눕힌 채 눈을 감았다.
― 똑똑.
노크 소리에 눈을 뜨니 선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고 있다.
“박 변호사님이 방으로 좀 오시라는데요.”
“네.”
한주는 손바닥으로 눈을 쓱쓱 문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렀어요? ……어, 손님이 계셨네.”
평소처럼 기형의 사무실의 문을 덜컥 열고 들어서던 한주는 소파에 앉은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기형이 와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한주는 조심스럽게 한쪽 소파에 몸을 걸치며 낯선 얼굴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다란 다리를 소파 아래로 뻗고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던 남자가 얼른 자세를 바로잡으며 한주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주 고개를 숙이며 스쳐 지나가던 한주의 시선이 되돌아가 남자에게 멎었다.
예사로 보이지 않는 외모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 여리여리하게 마른 몸에 곱상하게 생긴 얼굴까지. 뭔가 평범하지 않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한주는 남자의 얼굴에 지나치게 오래 머물렀던 시선을 얼른 돌리며 기형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 불렀어요? 손님도 계신데.”
“소개하려고 불렀지. 준우야, 인사해. 네 사건 담당할 강한주 변호사야.”
준우라고 불린 남자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우며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주는 얼떨결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의아한 얼굴로 기형을 보았다.
“사건이요?”
“아까 내가 네 방 책상 위에 기록 올려놨는데 못 봤어? 원고 스타기획, 피고 이준우.”
한주는 다시 놀란 눈을 앞자리의 남자에게 돌렸다. 그러고 보니 기형이 좀 전에 저 남자를 준우야, 라고 불렀다.
“그럼 이분이 당사자 이준우 씨라는 거예요?”
“강 변호사, 얘 모르는구나. 밖에 여직원들은 알던데. 준우야, 상처 받지 마라. 이 친구가 아는 연예인이 나보다 적을 거야.”
기형의 말에 남자가 씩 웃었다. 이 사람이구나. 한주는 애써 시선을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곁눈으로 남자를 힐끔거렸다. 아까 한주가 인터넷으로 봤던 사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마른 몸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큰 키에, 작은 머리와 긴 팔다리 그리고 노랑에 가까운 밝은 색으로 염색한 머리와 성인 남자의 것이라기엔 너무 깨끗한 피부까지, 어찌나 튀는지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외모다. 하지만 모르고 만났다면 아마 아까 그 사진 속의 인물과 눈앞의 남자가 동일인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을 것 같다.
어쨌거나 헐렁한 청바지에 흰색 면 티셔츠를 입고 헤어 스타일링 제품은 하나도 바르지 않은 듯 하늘거리는 앞머리가 이마를 살짝 덮은 저 남자는 변호사 사무실이라는 무채색의 배경에 비해서 너무 튀었다.
“선배는 왜 의뢰인한테 얘, 얘 거려요?”
한주가 눈치를 살피며 나직하게 기형에게 묻자 기형과 준우가 동시에 웃었다.
“사촌 형이에요.”
준우가 입을 열었다. 곱상한 외모와는 다르게 목소리는 묵직한 중저음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준우입니다.”
준우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참 싹싹하구나. 한주는 속으로 생각하며 또 한 번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선배한테 기록 전달받고 좀 보기는 했습니다. 일단 필요한 자료들은 그 안에 대충 들어 있는 것 같고요, 혹시 보충할 것이 있거나 하면 어디로 연락을 드릴까요?”
“저한테 전화 주세요. 혹시 전화 연결이 안 되면 음성 남겨 주세요. 제가 전화 드릴게요.”
준우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그럼.”
한주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기형이 어, 하며 한주의 팔을 잡았다.
“왜요?”
“바쁘냐?”
“그럼 안 바빠요?”
“밥이나 먹자, 셋이.”
“바쁘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