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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2화
1. 그녀의 마음에 노크를(2)


평소처럼 발로 소파를 밀어서 기형의 팔을 떼어 내려다가 한주는 준우의 시선을 의식하고 바닥에서 떼려던 발을 슬그머니 다시 내렸다. 준우가 빙긋이 웃으며 기형과 한주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바빠 봤자 나보다 바쁘냐?”
“선배는 사장이고 나는 직원인데 그게 같아요?”
“그러니까 사장이 같이 점심 먹자는데 건방지게 직원이 바쁘다고 튕기냐.”
“아, 진짜 손님 앞에서 창피하게 이러지 마시고……두 형제분이 다정하게 드세요.”
기형에게 불려 오기 전에 읽은 이메일 덕에 한주는 점심 생각 따위 없었다. 게다가 저 부담스러운 의뢰인과 밥은커녕 물 한 잔만 같이 마셔도 체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같이 가세요. 제가 점심 살게요.”
준우가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하자 한주는 난처해서 잠시 핑계거리를 찾다가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 먹기 싫은 약이라도 먹으러 가는 얼굴로 준우와 기형의 뒤를 터덜터덜 따라가던 한주는 기형이 들어서려는 식당을 보고 얼굴이 밝아졌다.
“형은 점심 때 이런 걸 먹어요?”
준우가 자리에 앉으며 재미있다는 듯이 기형에게 물었다.
“에이, 난 점심부터 이런 거 안 먹어. 쟤가 좋아하거든.”
기형이 앞에 앉은 한주를 턱짓으로 가리키자 한주가 기형에게 눈썹을 치켜 올려 보였다. 준우가 입 모양으로 와, 하며 한주를 쳐다봤다.
“변호사님, 대창구이 좋아하세요?”
“그냥……뭐…….”
“야, 강한주. 너 왜 이렇게 내숭이야. 그냥 뭐, 는 뭐냐. 환장하면서.”
한주는 테이블 아래로 발을 뻗어 발끝에 힘을 모아 기형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아.”
준우가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를 숙여 다리를 만졌다. 한주는 아차 싶어 입을 딱 벌렸다.
“괜찮으세요? 제가 다리를 뻗는다는 게…….”
기형은 영문을 몰라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꽤 아픈 듯 한참 다리를 문지르던 준우가 슬쩍 눈을 들어 한주를 쳐다봤다. 아주 잠깐 마주친 눈빛에 거짓말, 하는 듯 웃음기가 잔뜩 실려 있었다. 한주는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티슈로 애꿎은 숟가락만 광이 나도록 문질러 댔다.
“오랜만이네, 여기.”
“형 단골집 아니에요?”
“야, 여기가 얼마나 비싼데 단골이냐. 진짜 어쩌다 한 번 오는 가게지.”
기형이 질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가만히 있던 한주가 작은 소리로 한마디 거들었다.
“거야 선배가 쪼잔해서 그렇죠. 오너가 그렇게 손이 작아서 어떡할래요.”
“강한주, 여긴 우리 같은 가난한 변호사들이 맘 놓고 점심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아니야. 1인분에 4만 원씩 하는 대창구이를 낮에도 2인분씩 먹는 너를 데리고 여길 어떻게 자주 오냐.”
평소에 자주 주고받는 농담인데 한주는 괜히 얼굴이 빨개지며 자기도 모르게 준우 쪽을 봤다.
“내가……내가 언제 2인분씩 먹었다고 그……래요?”
한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 중 하나로 꼽는 것이 이 집의 대창구이였다. 빨갛게 양념한 야들야들한 대창을 숯불에 구워 잘라 입에 넣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다만 일인분에 4만 원이나 하는 것이 삼겹살 일인분과는 양이 달라서 먹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회식이라도 있어 이곳에 오게 되면 다들 대창구이로 입맛을 돋우고는 그나마 저렴한 곱창구이로 배를 채우곤 했다. 기형과 한주가 열심히 일하고 있고 다행히 일감도 많은 편이긴 하지만 그들의 작은 변호사 사무실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3인분 드셔도 돼요. 제가 사 드릴게요.”
준우가 농담을 건네며 끼어들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어쩌다가 그런 회사에 걸려 들어간 거야? 무슨 사기꾼들도 아니고 어린 애들 데리고 그 회사는 무슨 짓을 한 거야?”
기형이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민다는 말투로 준우에게 물었다. 준우가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씁쓸했다.
“이 바닥이 원래 그래요. 나만 당한 것도 아니고…….”
“그런 거지 같은 계약서에 사인하게 만들어서 사람을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고 얼마나 뻔뻔하면 너한테 손해배상을 운운하면서 소송까지 할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모도 그렇지, 모르면 어디다 물어보기라도 해야지 어떻게 겁도 없이 그런 계약서에 사인을 하셨대?”
기형은 그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원대로 가수가 되어 살고 있는 줄만 알았던 철부지 사촌 동생이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겪었다는 걸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미안하고 가슴 아팠다. 하지만 정작 준우는 초월이라도 한 듯 덤덤한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울 엄마 입장에서야 사람 되겠나 싶은 천덕꾸러기 아들놈 가수 만들어 준다니까 계약 내용이고 뭐고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거예요. 안 그래도 그때 고맙다고 허리 굽혀 가면서 인사한 게 너무 억울하다고 지금도 말씀하시는데요, 뭐.”
한주는 시선을 내리깔고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는 대창을 열심히 뒤집으며 둘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귀가 있으니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곱디곱게 자란 미소년 같은 외모로 참 많은 일을 겪었나 보다. 덤덤히 말하고는 있지만 세상사에 마음을 비운 것 같은 말투가 가슴 아프게 들렸다.
“강한주, 말 좀 하면서 먹어라. 내가 너를 너무 굶겼나 보다.”
불쑥 기형이 한주를 향해 말했다. 한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다가 빙그레 웃고 있는 준우와 눈이 마주치자 기겁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기분 탓인가. 준우가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강 변호사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랑 또래이신 것 같은데.”
준우의 말에 기형이 큰 소리로 웃어 댔다. 한주는 괜히 기형을 향해 눈을 흘겼다.
“강한주, 여기 밥값은 네가 내야겠다. 너보다 많지. 한참 많지.”
“뭐가 한참이에요, 3살 가지고.”
준우가 과장되게 놀라는 시늉을 했다.
“와, 그럼 스물아홉? 절대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그럼 누나라고 불러도 되죠, 변호사 누나?”
한주가 막 입에 넣었던 물에 사례가 걸려 켁켁거렸다. 기형이 준우의 뒤통수를 냅다 때렸다.
“어디다 대고 누나야, 누나가? 이놈이 그쪽 물을 먹더니 징그러운 짓을 하네.”
아직도 켁켁거리는 한주에게 준우가 새 물 잔을 건넸다. 물 잔을 받으면서 한주는 준우와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물 잔을 건네받는 짧은 순간 살짝 스친 시선 끝에 있던 준우의 눈에는 웃음기와 함께 아까 인터넷으로 찾아본 프로필 사진에서 봤던 그 깊은 눈빛이 살짝 엿보였다.
이미 식욕은 저만치 달아났지만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고 꼭꼭 씹는 한주의 머릿속에 그 눈빛이 커다랗게 박혀 떠다녔다. 이러다 체하겠다. 한주는 숫자까지 세면서 음식을 씹고 또 씹었다. 고기 한 점을 먹는 동안 물 한 잔을 거의 다 마시면서도 젓가락을 놓지 않는 한주를 준우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

블라인드가 꼼꼼하게 가려져 있지만 강한 햇빛이 이미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침대에 엎드린 채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한주의 몸이 꿈이라도 꿨는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무겁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느리게 위로 올라갔다. 지나치게 환한 방 안이 뭔가 불길했다.
한주는 팔을 뻗어 침대 옆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8시 40분.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 그 숫자를 몇 초간 들여다보다가 벌떡 일어나 총알같이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지각이다. 칫솔에 치약을 눌러 짬과 동시에 입에 넣고 빗으로 대충 머리를 빗었다. 순식간에 양치질을 마치고 물만 몇 번 얼굴에 끼얹고는 스킨을 바르고 팩트를 꾹꾹 얼굴에 눌렀다. 이럴 때면 화장하지 않고는 출근할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이 한스러웠다. 보통 30분은 걸리는 출근 준비를 10분 만에 마치고 정신없이 나가려는데 이번엔 열쇠 뭉치가 보이지 않았다.
“아, 정말 미치겠네.”
한주는 거실 한복판에 서서 머리라도 쥐어뜯을 기세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어쩔 수 없이 스페어 키를 꺼내들고 집을 나섰다.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자 비로소 한숨이 나왔다. 생전 늦잠을 자는 법이 없는데.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시간에 맞춰 준비하고 집을 나서는 일 같은 것은 학생 시절부터 혼자 알아서 척척 잘하던 일이었다. 그래도 2년 전, 혼자 살기 시작하기 전에는 드물게 이런 일이 생기면 옆에서 깨워 주고 시간을 알려 줄 사람들이 있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그래 줄 사람이 이젠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왔는데, 오늘 2년 만에 처음으로 알람을 잠결에 끄고 늦잠을 자 버린 것이다.
회사를 향해 차를 몰며 한주는 갑작스런 외로움에 휩싸였다. 이렇게 늦잠을 자고 깨워 줄 사람이 없고, 나 내일 아침에 일찍 나가야 하니 늦지 않게 깨워 달라 부탁할 사람도 없구나. 혼자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와 하루 종일 비어 있던 집의 한기를 느끼는 것이 싫어서 회사에서 늘 늦게까지 일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
“어디 하숙집에라도 들어갈까.”
혼자 중얼거리다가 어이없는 생각에 한주는 웃어 버렸다.

“선혜 씨, 나 깜박하고 수첩 안 들고 나왔는데. 오늘 재판 일정이랑 기록 좀 챙겨 줘요.”
“네. 어쩐 일로 늦으셨어요.”
한주는 민망한 듯 비식 웃었다.
“늦잠 잤어요.”
놀랍다는 듯 선혜가 눈을 크게 떴다.
“강 변호사님이 늦잠을요? 와.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래 주면 땡큐.”
사무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업무 시작 시간은 8시 30분이지만 8시를 넘겨 출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기록적인 날이다. 선혜가 곧바로 따라 들어와 커피 잔을 책상 위에 올리고 기록 뭉치를 그 옆에 놓았다.
“11시에 본원, 1시 30분에 동부지원, 4시에 인천, 세 건인데요.”
“소장은 접수했어요?”
“아침에 가서 제출하고 왔어요.”
“가진 산업 기일 변경 상대방 동의받았어요?”
“보냈는데 아직 안 왔어요. 오후에 재촉해 볼게요.”
간단한 일정 보고를 하고 나가는 선혜를 한주가 다시 불러 세웠다.
“혹시 내가 아침에 출근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되면 선혜 씨가 우리 집에 한 번 들러 줄래요?”
무슨 소리인가 선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한주는 허튼소리를 했다 싶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너무 한가한가. 잡생각이나 하고.”
늦은 출근을 보상하려고 서둘러 오전 재판 기록을 챙기고 오늘 진행될 부분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일정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시간은 6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지친 발을 간신히 잡아끌어 사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퇴근한 선혜가 남겨 놓은 메모가 보였다.

4시 20분. 이준우 씨. 전화 요망.

처음 만난 다음날, 소속사 직원이 몇 가지 서류를 준비해 가져다준 후 3주 동안 얼굴은커녕 전화 한 통화도 할 수가 없었다. 이틀 전 재판을 마치고 경과를 보고하려 전화를 걸었지만 매니저라 밝힌 사람이 대신 받아 전해 주겠다고 말하고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 전화기를 들고 메모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네.
한 음절의 짧은 대꾸였지만 준우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한주 변호사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전화 주셨다고…….”
―매니저 형이 잊고 있었다고 오늘에서야 며칠 전에 변호사님 전화 왔었다고 말해 주네요. 연락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 네. 다른 건 아니고. 재판 진행 사항을 알려 드리려고 전화 드렸었습니다. 전화 받으셨던 매니저분께도 간단히 말씀은 드렸지만 혹시 다른 변동 사항이나 저한테 전해 주실 내용이 있으십니까?”
―…….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준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람?
―아, 죄송해요. 근데 원래 그렇게 딱딱하게 말씀하세요?
“네?”
―말투가…… 뭐랄까, 무지 사무적이세요.
“……일이니까요.”
―흠……. 지난번에 직접 얘기할 때는 안 그렇던데.
“……아, 네.”
―할 말 없으시면 아, 네, 하시네요.
“…….”
다시 또 전화기 너머에서 준우가 한바탕 웃어 댔다. 뭐야, 이 녀석. 어린놈이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하네. 한주는 확 기분이 상해서 전화를 냅다 끊어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저기, 변호사님. 지금 회사세요? 저 근처인데 잠시 찾아봬도 될까요?
“지금이요?”
―뭐 여쭤 볼 것도 있고요.
“……그러세요.”
전화로 이야기해도 될 텐데 왜 굳이 여기까지 온다는 걸까. 한주는 통화가 끊긴 전화기를 한참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