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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3화
1. 그녀의 마음에 노크를(3)


이후 대여섯 통의 업무상 통화를 마치고 말하느라 마른 목을 축이려 물 잔을 집어들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준우가 걸어 들어왔다. 한주는 물 잔을 손에 든 채 준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무 디자인이 없는 흰색 면 티셔츠에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청바지, 야구 모자를 눌러쓴 차림인데도 사람의 눈을 잡아끈다. 처음 봤던 날 그랬던 것처럼 싱글거리는 웃음을 한가득 담고 준우가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변호사님.”
“아, 네. 오랜만이네요.”
한주는 들고 있던 물 잔의 무게가 새삼 느껴져서 책상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앞으로 끄덕여 마주 인사했다.
“회사에 다른 사람들이 없나 보네요.”
“다들 퇴근했으니까요.”
“변호사님은 왜 퇴근 안 하시고 이 시간에 혼자 계세요?”
“인천에서 재판이 있어서요. 끝나고 오니까 일이 밀려서 늦었네요.”
준우는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한주의 책상 앞에 놓인 소파에 걸터앉았다. 말없이 사무실 안을 찬찬히 둘러보는 준우를 보며 한주는 조바심이 났다. 바쁜 사람이 여기까지 왔으면 얼른 할 말이나 하지 뭘 저렇게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다. 결국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용건이?”
한주의 질문이 이해가 안 가는 듯 준우가 의아한 눈으로 한주를 보다가 아, 하며 또 싱긋 웃는다.
“드릴 말씀도 있고, 또 마침 근처에서 일이 끝나서요. 저녁 같이 하자고 왔어요.”
지난번에 준우와 그 좋아하는 대창구이를 먹고 체해서 단단히 탈이 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신이 나가지 않은 다음에야 이 남자와 또 밥을 먹을 일은 없다. 그것도 단둘이서.
“죄송하지만 지금 일이 밀려서 저녁 먹을 시간은 없거든요. 그냥 말씀하시고 식사는 가셔서 다른 분과 하시죠.”
“혹시 여기서 짜장면 시켜 먹어도 되나요?”
도대체 내가 하는 말은 뭐로 듣는 건가. 발끈했지만 한주는 한숨을 쉬고 전화기를 들었다. 원칙적으로 이 건물은 배달 음식의 반입이 허가되지 않았다. 한주는 경비실에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짜장면 두 그릇을 배달원으로부터 건네받았다.
탕비실에서 짜장면 그릇과 물 잔을 쟁반에 받쳐 사무실 안으로 가지고 들어서던 한주는 준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주변을 둘러보며 테이블에 쟁반을 놓으려 다가섰다가 깜짝 놀랐다.
준우는 쓰러지듯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긴 다리가 3인용 소파에 다 차고도 남아 바닥으로 늘어져 있다. 모자는 땅에 떨어져 있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 싱글거리며 말장난을 치는 모습보다 오히려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한주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난감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준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두면 불 텐데…….”
한주는 손끝으로 슬쩍 준우를 건드렸다.
“이준우 씨.”
꼼짝도 않는다. 손끝에 좀 더 힘을 주어 밀었다.
“이준우 씨. 음식 왔어요.”
제법 세게 흔들어도 꿈쩍도 않는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나서 잠든 준우의 얼굴 가까이 귀를 대고 숨소리를 들어 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 같아 이번에는 손가락을 코 밑에 댔다.
“안 죽었어요.”
죽은 듯 엎어진 채로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한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깼으면 일어나시죠.”
한주가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어쨌는지 준우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머리만 어디 닿으면 잠드는 직업병이 있어서요. 딱 5분밖에 못 자서 문제지. 아, 맛있겠다.”
능청스럽게 나무젓가락을 갈라 드는 준우를 쳐다보고 섰던 한주가 고개를 살짝 흔들며 앞자리에 앉았다.
“자요.”
준우가 능숙하게 비빈 짜장면을 한주에게 내밀었다. 한주는 선뜻 받지 못하고 멀뚱거리며 준우의 얼굴을 봤다.
“제 건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새침하게 말하고는 아직 포장도 안 벗긴 짜장면 쪽으로 한주가 손을 뻗자 준우가 얼른 그 그릇을 옆으로 밀었다.
“저, 짜장면 잘 비벼요. 이거 드세요.”
정말 적응 안 된다. 아무리 기형의 동생이라지만 이렇게 간단히 한주가 쳐 놓은 관계의 선을 넘나드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고객들과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지만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한주가 쳐 놓은 선은 꽤 범위가 좁고 높아서 쉽게 들어오기 힘든 부분이었다. 한주는 결국 준우가 내민 그릇을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또 웃는다. 정말 잘 웃는 남자다. 만화처럼 입가가 길게 올라가는 시원한 웃음은 상당히 보기 좋았다. 준우는 나머지 한 그릇도 금세 비벼 후르륵 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는지 젓가락질을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그릇은 금방 비었다. 곱빼기를 시켜줄걸 그랬나, 뭘 하나 더 시킬걸 그랬나 한주는 속으로 후회했다. 준우와는 반대로 입맛이 통 없는 한주는 먹는 둥 마는 둥 젓가락질을 하다가 물만 연신 마셔 댔다. 한주가 억지로 반이나마 먹은 그릇을 내려놓자 준우가 아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거기서, 그러니까 스타기획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한주가 놀란 눈을 들었다.
“뭐라고 해요?”
“합의를 보자거든요.”
“얼마에?”
“소송에서 요구했던 금액의 3분의 1이요.”
기록을 처음 검토했을 때도 짐작했지만 막상 재판에 들어가니 스타기획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법적으로 하자투성이인 계약서를 걸어 이쪽에서 소송을 걸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무시하세요. 한 푼도 안 줄 수 있습니다.”
“그냥 주고 끝내고 싶은데요.”
한주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준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달라는 대로 주고 좋게 끝내고 싶어요.”
뭔가 한주는 알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한주는 변호사이자 소송 대리인일 뿐이었다. 의뢰인인 당사자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는 거지 뭐.
“그러세요, 그럼.”
“그럼 돈 주고 받았다는 영수증만 받으면 끝나는 건가요?”
“합의서 작성해서 양쪽 사인하고 공증받으시고요, 돈 건넨 후에 상대방에서 소 취하서 제출하면 됩니다.”
준우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 번은 만나야겠군요.”
“직접 안 만나고도 변호사들끼리 조율할 수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제가 그쪽에 이야기할게요.”
“……아뇨.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아요. 확실하게 끝을 내려면.”
준우는 계속 들고 있던 짜장면 그릇을 마치 지금 생각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 짜장면 맛있네요. 가끔 놀러 오면 사주시나요?”
어린 녀석이 여자에게 이런 농담을 자꾸 던져 대는 게 자기를 가볍게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한주는 무심하게 들으려고 노력하며 어린놈이, 하고 속으로 뇌까렸다.
“기형 선배한테 사 달라고 하세요.”
“흠. 보통은 제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그 정도야 언제든지 사 줄게요, 뭐 이러는데. 꽤 강적이시군요.”
하마터면 쿡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한주는 꾹 참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누나.”
이놈이 또.
“이름으로 부르시죠. 다시 말씀드리자면 강한주, 입니다.”
준우가 빙글빙글 웃는다.
“싫은데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말장난을 그만할 만도 한데 나를 우습게 여기는 건지, 저 사람이 본래 가벼운 건지 판단이 안 선다.
“그냥 누나, 동생 하면 안 될까요?”
“일로 만난 사이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사적으로도 알고 지내면 되잖아요.”
“이준우 씨.”
한주가 정색을 하고 똑바로 쳐다보며 이름을 부르자 준우가 어깨를 움츠리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전 이런 말장난 좋아하지 않아요. 의뢰인과 누나 동생 한다는 건 제 상식에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구요.”
준우는 가만히 한주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씩 웃었다.
“네.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약속은 제가 상대방 변호사와 잡을까요, 아님 직접 하시겠어요?”
“제가 날짜 정하고 연락드릴게요.”
“자세한 합의 내용을 먼저 주시면 서면으로 작성해 놓겠습니다. 연락 주세요.”
“나가라고 막 떠미시네요.”
“일이 많이 밀려서요.”
다시 또 준우가 미소를 지었다. 참 잘 웃는다. 게다가 웃는 얼굴이 예쁘기도 하다. 무슨 말만 해도 저렇게 웃어 주는 건 일종의 직업병일까. 한주는 싱거운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가 볼게요. 약속 날짜가 잡히면 전화 드릴게요.”
“그러세요.”
준우는 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문고리를 붙잡고 다시 휙 한주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한주 씨.”
한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름으로는 불러도 된다고 했죠? 그럼 담에 뵐게요.”
준우가 돌아서서 걸어가며 머리 위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 사라진 한참 후까지도 한주는 준우가 나간 문을 쳐다보며 멍하니 책상에 앉아 있었다.



2.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1)


“진짜 혼자 가도 되겠어? 그 인간이 네 얼굴 보고 무슨 소리를 할 줄 알고. 에이, 안 되겠다, 나도 따라갈란다.”
“형, 나랑 그 사람이랑 둘이 만나는 것도 아니고, 변호사들도 있어. 걱정 안 해도 돼.”
뒤를 따르며 걱정이 늘어지는 매니저 동현의 등을 툭툭 쳐 주고 준우는 차에 올라탔다. 합의를 위해 이전 기획사의 사장을 만나러 가는 자리다. 워낙 종잡을 수 없이 거친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동현은 걱정이 되어서 선뜻 준우만 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끝내 혼자 올라타고 떠나는 준우의 차에서 동현은 눈을 떼지 못하고 서 있었다.

약속 장소인 로펌에 도착해서 1층 로비로 들어선 준우는 몇 발자국 걷다 말고 그 자리에 굳은 채 멈춰 섰다. 사장이다. 가까이 다가온 것도 아니고 저만치, 그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일 뿐인데 발견한 순간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준우는 자기도 모르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참 무섭구나. 아직까지도 이런 반응이라니. 준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안 올라가고 여기서 뭐하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돌아본 준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한주가 의아한 얼굴로 준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반가운지 준우는 겅중 큰 보폭으로 한주에게 다가갔다.
“지금 올라가려고요. 지금 오시는 거예요?”
“네. 혼자 오셨어요?”
“혼자 안 오면요?”
“누구, 회사분이나 매니저분이라도 같이 오셨을 줄 알았어요.”
“변호사님 계시잖아요.”
한 번쯤 마주 웃어 줄만도 한데 한주는 이번에도 쌩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한주를 만난 것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준우는 한주의 옆에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약속 장소인 4층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준우는 앞서 걷지 않고 한주의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가듯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준우 씨 대리인인 강한주 변호사입니다.”
“어서 오세요, 강 변호사님. 이준우 씨도 이리 앉으세요.”
약속 장소인 미팅룸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대방 변호사가 일어나 한주와 악수를 하고 준우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변호사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한주와 준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메일로 보내 드렸던 합의서는 받으셨죠?”
“예.”
“수정하실 내용이 있나요?”
“이 부분은 문장을 조금 수정했으면 좋겠는데요…….”
두 변호사가 머리를 맞대고 합의서를 수정하는 사이 준우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몇 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저 사람을 똑바로 볼 수조차 없다니. 준우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잘 있었냐?”
남자가 먼저 말을 던졌다. 너무나 익숙한 그 목소리가 귀에 와 박히자 준우는 진저리를 쳤다.
“네.”
“은혜도 모르는 새끼.”
합의서의 문장을 고치던 한주가 고개를 돌렸다. 잘못 들었나? 귀가 의심스러웠다.
“너 같은 새끼가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돈 몇 푼에 내가 널 봐줄 거라고 꿈도 꾸지 마라. 너는 내가 끝까지 따라가서…….”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고개를 푹 숙이고 사장이 저주하듯 퍼붓는 말을 듣고 있던 준우가 날카로운 한주의 목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한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