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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1권
세상으로
흑천 1권(1화)
서문
그가 빛이라면 난 어둠이었고,
그가 하늘이라면 난 그를 받치는 땅이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형제 이전에 나의 반쪽이었다.
내 심장은 하나가 아니라 그래서 둘이었다.
- 흑천 -
중원 무림에 흑천살막(黑天殺幕)이 기생하기 시작한 것을 정확하게 아는 이는 전무했다.
무림이라는 곳이 생성되기 전부터인지 아니면 그 직후부터인지 말이다.
아마도 당금의 무림에서 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유일한 단체이기도 할 것이다.
존재해 왔던 시간과 비례하여 그들의 힘은 세상을 집어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권력과 재력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축적해 왔다.
그러한 흑천살막의 주인이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아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종사하는 사람들만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통해했다.
하지만 그에게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과 가깝던 이들은 기뻐했다.
모든 어둠을 지배했고, 세상 그 누구의 목숨이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빼앗을 수 있는 강함을 가지고 있던 그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그의 심장을 밖으로 뽑아 갔던 자는 천검무제(天劍武帝) 율천세(律天世)였고, 그에게 죽임을 당한 자는 사람들이 흑천(黑天)이라 부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알고 있던 자들조차 모르던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흑천에게 친혈육이 하나 남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세상을 뒤바꿔 놓을 것 또한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第一章 사우(1)
호남성(湖南省)에서 사우(史雨)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흔히 그의 이름을 말하기 전 사람들은 미친개 사우라고 부르곤 했다.
아마 그가 처음 도시에 나타났을 때가 오 년 전이었을 것이다.
사우가 처음 도시에 발을 내딛자마자 한 짓은 혼자 처살기 위해 한 채의 집을 사들인 일이었다.
그런데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은 그 집의 크기가 도시에서 가장 크다는 것이었다.
그래, 어디서 돈 많은 집 아들놈이 굴러들어 와 돈지랄을 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아니, 전부였다.
사우가 자신의 이름을 도시에 각인시킨 것이 그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가 가관이다.
술, 도박, 여자를 밝히고 폭력을 도맡아 오던 도시의 주먹패들이 모두 사우라는 이름 아래 몰려들었다.
그 수만 무려 일백이 넘었다.
그들은 사우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방탕한 생활을 목격, 또는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함께하면서 생활했다.
그렇게 사 년이 지나자 끊이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돈은 가뭄의 땅처럼 메마르는 것은 물론 그동안 즐겨 왔던 향락이 끝이 나 버렸다.
당연한 일이다.
처음 그가 구입했던 집까지 팔아 치워 겨우 자신이 생활할 수 있는 돈만이 남은 그는 쪽팔림도 모르고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직도 그 도시에서 머물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욕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젊은 놈의 새끼가 돈 귀한 줄 모르더니…… 쯔쯔쯧.”
“그러게 말이야. 에이 퉤!”
장사가 안 되는 날에는 쌍욕을 내뱉으며 ‘에이, 사우 같은 날!’이라는 말까지 하는 장사치들까지 있었다.
자신의 눈에 거슬리면 죄다 엎어 버리는 사우는 이제 미친개 사우로, 주먹패들의 우두머리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사우는 이미 도시에서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한 것은 확실했다.
“하아암!”
길게 늘어지는 하품에 입이 찢어질 듯했다.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은 자세가 영락없는 주먹패의 우두머리다웠다.
“형님, 황입니다.”
“들어와.”
귀를 파던 사우는 무료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얼굴로 적황(狄荒)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적황은 이십 대 후반으로 인상이 아주 오지게 더러웠다.
거칠게 기른 수염에 넙데데한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망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유 없이 답답함을 느끼게 할 외모였다.
반대로 사우의 얼굴은 곱상했다.
절대로 주먹패들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 그대로 잘사는 집안의 전형적인 자식의 얼굴이었다.
“왜.”
사우는 적황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자신을 찾은 용건을 물었다.
“저어…….”
뭔가 할 말이 있는데 망설이는 모습을 보자 짜증이 밀려왔다.
사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황아.”
“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뭐지.”
지금과 같은 상황을 적황은 자주 겪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분명 자신이 안으로 들어와 한 행동 중에 있을 것이다.
“두 번 말하게 하는 것과 계집애처럼 쑥스러워하며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 때입니다.”
“잘 아네.”
사우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미소까지 걸려 있다.
“박아.”
“네, 넵!”
적황의 행동은 칼같이 빨랐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그래, 아까 하려던 말이 뭐냐.”
일각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제야 사우는 조금 전 적황이 찾아와 보고하려던 일을 물었다.
‘더럽게 빨리 묻네!’
적황은 속으로 욕하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내가 일어나라고 그랬나?”
적황이 머리를 박는 동안 심심했는지 제목도 없는 책을 읽던 사우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시 박겠습니다.”
“이왕 일어났으니 그럴 필요는 없어.”
‘이런 썅!’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쳐도 유분수지라는 속마음이 그대로 얼굴로 드러났다. 다행히 사우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백 대인께서 형님을 좀 보자고 하십니다.”
“백무연(白務淵)을 말하는 거냐.”
“예.”
사우는 피식 웃으며 읽던 책을 덮었다.
“왜 나를 보자고 하는 걸까.”
“그게 아무래도……!”
“이번에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무기 거래를 빼앗으려는 자들에게 힘을 보여 주려는 거겠지.”
“정확하십니다. 역시 형님은……!”
“괜한 아부는 할 필요 없고.”
사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직접 오라고 했다고 전해. 싸가지 없이 누구를 오라 가라 하고 지랄이야.”
그러더니 귀찮은 듯 적황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나가라고 손짓했다.
구겨진 얼굴로 적황은 방을 나가 버렸다.
그날 저녁 사우와 그 패거리들이 머무는 건물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백의 무복을 입고 있는 젊은이를 선두로 그 뒤로는 대 여섯 명의 건장한 이들이 따랐다.
유화상단(劉華商團)의 주인인 백무심(白無心)의 아들들 중 셋째인 백무연(白務淵)이 선두에 있는 젊은 사내였다.
그는 사우만큼이나 파락호로 유명한 자였다.
물론 사우가 세운 업적을 따라갈 정도로 유화상단이 거대한 상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력만 되고 눈치 볼 사람만 없다면 사우를 능가할 정도로 대책 없는 인물이었다.
“네놈들 대가리에게 전해라. 백무연이가 왔다고 말이다.”
건물 앞에서 얼쩡거리던, 일명 사우파라는 단체에 묶여 있는 무리는 백무연이라는 이름에 긴장하며 짬이 낮은 놈 하나를 건물 안으로 들여보냈다.
“어이, 백무연이! 허세 그만 부리고 들어오지.”
안에 기별을 하러 젊은 사내가 들어가자마자 이층 창가에서 사우가 비아냥거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백무연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백무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사람이 아니라 돼지 새끼들이나 사는 곳이구나.’
그만큼 주변은 더러웠고 냄새도 시궁창 냄새가 지배했다.
“두 놈만 따라오고 나머지는 이곳에 대기하도록.”
백무연은 호위무사 둘만을 대동한 채 이층으로 올라가 사우가 있는 실내로 들어갔다.
“여어! 오랜만이야!”
짐짓 반가운 척을 해 대는 사우를 본 백무연은 역겹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이 왜 그래 응? 나에게 부탁을 하러 온 거 아닌가? 그럼 웃어야지, 친구.”
“내가 언제 네놈 같은 천박한 놈과 친구라더냐.”
“꼴에 부잣집 도련님 행색은 하겠다는 건가?”
“입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백무연의 태도에 사우는 능글맞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렴, 유화상단의 셋째 도련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겠죠.”
사우는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해 보이며 웃었다.
그 미소는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살심을 일으키는 묘한 능력을 가진 종류의 것이었다.
백무연은 사우를 노려보며 자리에 앉았다.
“자, 이제 들어 볼까. 천하의 백무연 님께서 뭣 하러 이리 누추한 곳까지 오셨는지.”
“전에 네놈이 말했었지. 돈이면 못할 일이 없을 거라고.”
“내가 그랬었나?”
“…….”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백무연은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
그들은 사우가 처음 이 도시에 오고 나서부터 잦은 마찰로 앙숙과도 같은 사이였다.
동네에서도 그것은 꽤나 유명한 일이었다.
“들어서 알고 있을 거야. 독점을 하려던 무기 거래를 다른 놈들이 노리고 있다는 것을.”
“용상회(龍商會)라던가?”
“잘 알고 있구나.”
“나야 뭐, 정보통에는 늘 밝은 편이지.”
“조금은…… 진지한 태도를 보여라.”
“뭐, 그러지.”
사우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자,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용상회는 조사한 바에 의하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다. 물론 세상은 아직 용상회라는 곳이 생겼는지 관심도 없겠지만 말이야. 첫 사업 확장을 위해 무기 거래를 독점하려 하는데 그런 피라미에게 빼앗길 본 상단이 아니지.”
“자화자찬은 고객님 집에 가서 하시지.”
사우가 비꼬자 백무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간단하게 말하지. 너희들이 원하는 금액을 말해. 우리가 원하는 건 한 가지다. 용상회 회주를 죽여 줘.”
“…….”
사우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미친놈.”
쾅!
흥분한 백무연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내가 지금 장난이나 하자고 너에게 온 줄 아는 것이냐!”
“금액은 얼마든지 상관없나.”
“얼마든지.”
“선불로 황금 오천 냥을 내놓고 일 처리가 된 이후에 잔금으로 황금 오천 냥을 받도록 하지.”
사우는 유화상단의 재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금액을 요구했다. 어쩌면 가능도 하겠지만 그 정도의 액수를 지불해서까지 용상회의 주인을 죽이려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정도의 금액이라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살수를 고용할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거절의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내일 사람을 보내 선금 오천을 주도록 하겠다.”
“농담하는 건가?”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지금 너에게 온 내가 장난질이나 하러 온 것으로밖에 안 보이나?”
“이상하군.”
“뭐가 말이지.”
“굳이 나에게 의뢰를 맡기려는 거 말이야.”
“하나 있지.”
백무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너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한다는 것 말이야.”
“그 말은 내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그 말인가?”
“제대로 알아들었군, 그래.”
사우는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너라는 녀석, 참 웃기는 구석이 많아.”
“받아들일 것이냐?”
“좋아, 받아들이지.”
“역시 넌 별종다워, 미친개 사우.”
“그런데 말이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
“내가 언젠가는 네놈의 목을 졸라 버릴지 모르거든.”
“기대하지.”
백무연은 싸늘하게 웃으며 방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