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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1권(2화)
第一章 사우(2)
“정말 받아들일 생각이십니까?”
“내가 언제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거 본 적 있었나?”
“죄송합니다.”
꼴에 분위기를 잡고 있는 사우의 등 뒤에 자리해 있던 적황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마냥 잔뜩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되는 의뢰를 받아들인 사우가 정말로 별명대로 미친개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기회지 않냐. 이참에 목돈 만들어서 이곳을 떠 버리려고 했는데 잘됐지 뭐.”
역시나 개념을 밥 말아 잡수신 양반다운 말이었다.
이것은 돈의 액수를 떠나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이었다. 일이 잘못 틀어질 경우 최소 평생을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하는 일이었다.
“겁나냐.”
“솔직히 부담스러운 의뢰이기는 합니다.”
“쫄 거 없어. 담그는 건 네가 할 테니까.”
“……!”
적황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된 것은 사우의 말이 엄청난 충격으로 꽂혀 들어왔기 때문이다.
“농담이다.”
‘이런 미친 새끼!’
적황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쌍욕을 간신히 안으로 삼켰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가슴팍을 찢어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사우로 인해 적황은 간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형님…… 용상회는 상인 집단입니다. 자신들의 돈을 지켜 주기 위해 거느린 무인들의 능력이 어디까지일지는 짐작조차 하기가 힘이 듭니다.”
적황은 한 대 맞을 각오로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사우는 반응이 없었다.
“우리…….”
그런 사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금만 먹고 쨀까?”
쿨럭!
도대체 저 인간의 입에서 무슨 섬뜩한 이야기가 나올지 몰라 마음의 준비하면서 마른침을 삼키던 적황은 피가 역류하여 흐르는 것 같았다.
“황아.”
“네.”
“애들 불러 모아라.”
“……?”
“다시 말하게 했다가는 너 한 대 맞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에 존재하던 인물은 사우 혼자였다.
도대체 왜 저 인간이 애들을 불러 모으라고 했을까.
일단은 서른 명 정도를 대기시켜 놓았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형님, 다 모았습니다.”
“…….”
“형님?”
저녁노을이 멋지게 창가를 때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감상하기라도 하듯 사우는 의자를 창가 쪽으로 돌려놓고 앉아 있었다.
당연히 적황에게는 뒤통수만 보일 뿐이었다.
“설마 주무십니까?”
설마 하는 심정으로 적황은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응? 아!”
그제야 사우가 정신을 차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일어나서 팔을 들어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어이구 두야.’
도대체가 긴장감이라는 게 없는 인간이었다.
애들을 불러 모으라고 했으면 뭔가 대책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위엄과 긴장감은 필수인데 저 인간은 그런 게 없다.
“가자!”
“어딜…… 말씀이십니까.”
“어디긴 어디야, 용상회 주인이 있는 곳이지.”
“헉! 하지만……!”
“잔말 말고 따라와. 토 달면 귀싸대기 올라간다.”
“……!”
용상회가 직접 관리하는 월궁루(月宮樓) 별채에서는 오늘 오전부터 간부들의 회의가 지속되고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회의를 멈추게 한 것은 미친개 사우였다.
용상회 회주를 가장 측근에서 보필하는 여상(呂峠)은 월궁루 출입구를 시작해 이곳 별채까지 무작정 머릿수로 밀고 들어온 이들로 인해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도대체가 제정신이 박힌 녀석들이라고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오늘은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이라 용상회에 소속되어 있는 무인들 대부분은 월궁루에 오지 못하고 그저 상단의 장원을 지키고 있었다.
덕분에 여상과 그의 밑에 있는 자 열 몇 명만이 별채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이, 너!”
“……!”
여상의 눈썹이 역 팔자로 구겨졌다.
평소 얼굴에 표정 변화가 없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누구보다 분노를 터트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반말을 지껄이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눈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는 너 말이다.”
대략 서른 명 정도 되는 주먹패들을 데리고 무공을 익힌 상단의 호위무사들 앞에 선 것치고는 당당했다.
아니, 당당을 넘어 시건방졌다.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하는 주먹패들이라도 무공을 익힌 호위무사들의 상대가 되질 않는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들의 무공이 삼류라 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우만 모르는 것 같았다.
적황은 당장이라도 이 미친놈을 줘 패서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신의 힘이 너무 미약했다.
“어르신들께서 회의를 하시니 어서 처리하거라.”
여상은 혹여 자신의 주인이 회의에 피해를 보기라도 할까 봐 얼른 저 미친놈들을 끌어낼 심산이었다.
명령을 전달받은 호위무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어 주먹패들 곁으로 호기롭게 다가갔다.
“네놈들 대가리 좀 만나러 왔다. 용상회 회주 말이다.”
사우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의 음성이 컸든지 아니면 생각보다 회의가 일찍 끝났는지 월궁루에서 일단의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의 연령대는 중년인이 많았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있는 사내는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점잖게 생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얼굴에는 평온함이 가득했다.
도를 닦는 도사가 아닐까 할 정도로 말이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반조(潘照)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노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동네 주먹패들이 사리분별 하지 못하고 날뛰는 것입니다. 제가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여상의 얼굴은 이미 똥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황급히 몸을 돌려 사우 일행에게로 달려가려 했다.
“모두 무기를 집어넣어라. 그리고 나를 만나자고 한 저 젊은이와 독대를 할 것이니 준비를 하거라.”
“……!”
청천벽력 같은 말이 선두에 있던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여상은 마치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여상의 수하들, 그리고 반조와 그 뒤에 있는 용상회 간부들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떠올랐다.
“뭐 하느냐. 회주의 명을 받들지 않고.”
재빨리 정신을 차린 반조가 여상을 다그쳤다. 자신의 주인이 그리 명령하면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인이 이런 일을 시킬 때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 하지만.”
허나 눈치 없는 여상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어허!”
반조가 진정으로 화를 내려 하자 여상은 그제야 수하들을 물렸다. 그리고 길을 터 주었다.
‘대체 이게 뭔 일이래.’
당황한 것은 사우의 패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적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용상회 주인이라는 자가 미치지 않고서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그것도 주먹패 우두머리를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온 아이와 독대를 한단 말인가.
유일하게 표정의 변화를 가지지 않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용상회주와 사우였다.
“오랜만에 뵙게 되니 반갑군요.”
“그런가.”
사우는 살갑게 맞는 용상회주 양인홍(陽認弘)의 인사에 시큰둥할 뿐이었다.
두 사람 앞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각각 놓여 있었다.
“딸아이가 공자를 많이 뵙고 싶어 합니다.”
사우는 들이켜던 찻잔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요즘은 건강한지 모르겠네.”
“많이 나아져 가고 있습니다. 다 공자 덕분입니다.”
양인홍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성격을 아는 이들이 봤다면 놀랐을 것이다.
“의외였어.”
“하하! 용상회 회주가 저인 것 말씀이신가요.”
“아니, 그것도 있지만 무림과 연관되어 있다는 거 말이야.”
“공자…… 전 상인입니다. 무력과 재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상인인 제가 무림과 상관관계가 없을 리 없잖습니까.”
너무나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양인홍을 보며 사우는 혀를 찼다.
“말은 그럴듯하군.”
“저 또한 놀랐습니다. 제가 무림과 관련되어 있는 걸 어찌 아셨는지요.”
양인홍의 말에 사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나에게 그러지 않았던가? 무력과 재력은 뗄 수 없는 것이라고.”
“아뇨. 상인들은 무림과 어떻게든 연줄을 이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죠. 허나 직접 무림세가의 힘을 등에 업는 곳들은 매우 적습니다. 방금 공자께서는 제가 무림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놀랐다 하셨습니다. 대외적으로 용상회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그런 저희가 무림과 연관되어 있는 걸 예상하는 자들은 전무하다 할 수 있죠.”
“아, 아. 그런 뜻이었나. 뭐 내가 자주 이용하는 정보통이 있어서 좀 알아봤지.”
사우는 찻잔에 입을 대느라 보지 못했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양인홍의 따뜻한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물론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사마련(邪魔聯)이라고 하던데 말이야.”
양인홍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우의 말에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닌 척 노력해 봐도 손끝이 떨리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공자…… 딸아이를 살려 주신 점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공자께서 방금 언급하신 사안은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경고인가?”
“충고입니다, 공자.”
사우는 같잖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맙게 받아들이지. 내가 오늘 이렇게 온 건 그냥 자네와 거래를 하고자 할 뿐이야.”
“용상회의 비밀을 틀어쥐고 말입니까.”
“그렇지.”
“공자께서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께서 왜 이곳에서 주먹패들과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마련이라는 곳은 개인이 우습게 볼만한 단체가 아닙니다.”
“나도 충고 하나 하지. 내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자네를 죽여 달라는 의뢰를 받아서야. 그러니 같잖은 충고는 삼가 줬으면 좋겠는데.”
사우는 찻잔에 담긴 내용물을 모두 비워 버렸다.
“유화상단입니까.”
양인홍의 등짝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여유가 가득했다.
“자, 거래를 할 마음이 생겼나?”
“저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아니. 그저 난 네놈이 나와 거래를 하게끔 하고 싶을 뿐이야.”
양인홍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가 육 개월 전 아픈 딸아이를 낫게 해 주지 않았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서라도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것이다.
“황금 오천 냥.”
“……?”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농담……을 하시는 겁니까?”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물론 황금 오천 냥이 적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사우가 가지고 있는 패와 거래를 하는 것치고는 너무나 하찮은 액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