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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권



도망 못 쳐 1(1화)
Chap 1 추억과 공포 사이(1)


“내일 수도로 이사한다는 게 정말이야?!”
황급히 달려온 검은 머리의 소년이 숨을 몰아쉬며 급히 묻자 가는 얼굴선에 물색을 띄는 머리칼을 어깨까지 기른 소년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가 왕립 기사단의 부름을 받으셨대.”
“와! 끝내준다! 좋겠다, 렌! 발렌트 아저씨가 기사가 되면 너도 제대로 된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도 있을 거 아냐!”
검은 머리의 소년이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소리치자 렌이라고 불린 소년의 커다란 눈망울에 커다란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그렇게 되면 시안이랑 다시는 못 보잖아.”
눈물 섞인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울상을 짓자 시안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해맑게 웃었다.
“그럼 나랑 약속하자. 십 년 뒤에 너는 기사가 되어서, 나는 마법사가 되어서 왕성 앞에 있다는 중앙 분수에서 만나는 거야!”
시안이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밝게 웃자 렌이 눈물을 훔쳐 내고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야?”
조심스레 내민 렌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굳게 걸며 시안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반드시 유명한 마법사가 되어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눈을 뜨니 여관방의 창문 사이로 비쳐 보이는 태양이 하늘 높게 떠 있었다. 렌과 헤어질 때의 모습이라니, 얼마 만에 꾸는 꿈인지.
어릴 적, 내가 14살이었을 때 같은 마을에서 함께 자란 렌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렌은 기사를 꿈꾸고 있었고 나는 마법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렌의 아버지인 발렌트 아저씨가 아카데미 동기의 도움으로 왕립 기사단에 들어가게 되었고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1년 뒤 마을에 지독한 역병이 들어 부모님과 친구들이 죄다 죽어 버리는 바람에 살아남은 나는 마법을 배우던 스승님을 따라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렌이 떠난 지 10년째, 오늘이 바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아직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릴 때 한 약속인데다가 벌써 10년이나 흘렀는데.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래도 어릴 적 친구 중 살아남아 있는 것은 녀석뿐이기에 꼭 보고 싶었다.
세수를 하던 중에 고개를 들자 엄청나게 수려하고 화려한 미남이 거울 속에…… 있지는 않았다.
거울에 비치는 거라곤 한동안 정리하지 못해서 덥수룩하게 자란 검은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검은 눈을 지닌, 창백한 얼굴의 왜소한 체구의 청년뿐. 근래에 들어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눈 밑에는 짙은 다크 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침대 맡에 걸쳐 둔 로브를 입고 방에서 내려와 여관을 나서자 사람들로 북적대는 거리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어릴 적의 약속대로 마법사가 되어서 바이안의 수도, 자엘 룬에 도착한 것이다.
감회에 젖어 들어 웃음을 짓고 있으려니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근처 건물의 벽에 붙어 있는 현상 수배 전단이었다.

[린부르크의 악마(신원 불명) - 500,000실링]

검은색의 로브를 깊게 눌러써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불친절한 몽타주 아래로 그의 죄상이 적혀 있었다.

[죄목 ― 마족 소환, 금지된 마법 습득 3건, 금지된 마법의 사용 27건, 327채에 달하는 민가 파괴, 린부르크 경비대 폭행, 폭풍의 기사단 폭행 등등.]

……나는 어릴 적의 약속대로 유명한 마법사가 되어 자엘 룬에 왔다.
그 유명함이라는 것이 수배자 리스트에서 가장 위험한 10명의 특급 수배범에 들 정도로 악명 높은 흑마법사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지.
“끄응.”
역시 로브의 후드는 벗는 게 낫겠다. 다행히 내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으니 조금만 조심하면 내 정체가 탄로 나는 일은 없을 거야.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특급 수배범이라니, 나는 억울할 뿐이다.
조수로 쓸 님프를 소환하다가 깜빡 실수해서 마족을 소환하게 되어 버린 것뿐인데! 그 망할 마족을 돌려보내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게다가 금지된 마법 습득과 사용이라니?
젠장, 스승님은 어째서 그렇게 위험한 마법이 적힌 책을 서재에 놓아두신 거지? 난 애초에 그게 금지된 마법인지도 몰랐다고!
또한 마족을 소환한 것도 실수 한 번뿐이고,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 것도 나를 잡으려 쫓아오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사용한 것들이었다.
겨우 24살의 흑마법사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는가. 기사단들과 마법 협회의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금지된 마법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나의 죄목이 늘어난 것이다…….
흑마법사가 기괴하고 음습한 마법으로 사람들에게서 천대받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도 처음부터 흑마법사가 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으리라.
“우우, 이래서야 렌을 만나게 되어도 내 정체를 당당히 밝힐 수도 없잖아.”
렌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한껏 들떠 있던 기분이 바닥까지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 어차피 린부르크의 악마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추적자들도 따돌렸고 하니 이제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평범하게 살면 될 것이다. 가끔 렌 녀석이랑 술이나 한잔하면서 살다 보면 언젠가는 린부르크의 악마에 대한 것도 세상에서 잊히겠지.
렌과 만나기로 했던 중앙 분수는 그리 크진 않았지만 웅장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분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광장에는 노점상들과 행인들로 가득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언제 만날지를 정하지 않았다. 지금이 점심때쯤이니 오늘이 지나려면 아직 한참이 남아 있지만, 10년이나 지났으니 알아볼 수 있으려나? 사람도 이렇게 많은데.
근처의 노점상에게서 점심으로 때울 샌드위치 하나를 산 나는 분수의 앞에 다가가 섰다. 분수의 중앙에는 오래전에 세상을 구했다는 검은 갑옷의 기사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며 동상을 바라보는데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언제 오는 걸까?”
힐끗 돌아보니 어깨까지 내려오는 푸른 머리칼의 여인이 옆에 서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렌 녀석의 머리색도 푸른 물색이었지. 그 야리야리한 녀석이 정말 기사가 되긴 했을까? 아니, 지금까지 살아 있기나 한 걸까? 살아 있다면 그날의 약속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엣취!”
갑자기 옆에 있던 여자가 재채기를 하며 입을 막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응? 뭐지?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옆얼굴인 것 같은 기분이…….
헉!
저 마녀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나를 뒤쫓던 자들 중에 가장 위협적이었던 것이 바이안 왕국의 현상 수배범 추적 전문 기사단인 붉은 장미 기사단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저 여자는 붉은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인 레이나 바르카스!
분명히 한 달 전에 국경선을 넘어가는 척하는 속임수로 따돌린 줄 알았는데?!
비명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 하자 나는 다급히 입을 막은 후 뒤돌아섰다.
여기사들로 구성된 붉은 장미 기사단과 저 마녀는 내가 3개월여의 도망자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끈질기게 추적해서 한숨도 제대로 못 자게 괴롭힌 장본인이었다.
뒤쫓기면서 지겹도록 본 갑옷 차림이 아닌 평범한 원피스 차림이었으나 저 목소리만큼은 잊을 수가 없었다.

― 이제는 정말로 끝이다! 죽어라!

저 말을 수십 번 넘게 들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냐. 잊으면 그거야말로 바보인 거지. 저 마녀의 오러가 목덜미를 벨 듯 스치고 지나가던 것만 떠올리면 아직도 오금이 저려 왔다.
그런데 따돌린 줄 알았는데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설마 내가 여기 온 것을 눈치채고 잠복 중인 건가? 제길, 서둘러 도망을…… 잠깐, 그랬다간 렌과 다시 만날 수 없잖아?
렌 녀석은 이제 내게 남아 있는 단 하나뿐인 친구 녀석인데!
어째야 하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쥐어 잡고 있는데 악마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히익.”
툭.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떨어트려 버렸다.
조심스레 뒤를 힐끗 보니 마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땅에 떨어트린 샌드위치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얼굴을 모르니 침착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의연하게 있으면…… 뭐 해! 목소리는 뱀을 목전에 둔 개구리처럼 바르르 떨리는데.
그런데 잠복 중이라면 어째서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서 탁 드러난 곳에 있는 거지? 갑옷보다 달리기가 편해서? ……아니, 그렇진 않겠지.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그녀가 한 혼잣말을 생각해 보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남자 친구라도 기다리는 건가?
내가 본 그녀의 모습이라고는 갑옷을 입고 검을 휘두르며 죽일듯한 표정으로 쫓아 올 때가 다였는데 원피스를 입고서 다소곳이 서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쳇, 죽자 살자 날 쫓아다녀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게 괴롭혀 놓고서는 자기는 팔자 좋게 데이트라니.
“남자 친구를 기다리시나 봐요.”
왠지 모를 배신감에 자연스레 빈정거리는 듯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결코 좋은 감정으로 한 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에서는 ‘죽어라 이 더러운 악마!’라고 외치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 생각 외로 조금은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한 것 같으면 뭐 하냐! 나를 죽이겠다고 오러를 휘둘러 대던 마녀인데!
쯧쯧, 저 마녀를 기다리게 하는 남자 친구가 누군지는 몰라도 무척 불쌍하다. 조금이라도 성질을 건드렸다간 생사의 경계선을 헤맬 게 뻔한데.
그런데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그녀의 눈이 내 얼굴에 박혀 버렸다.
……뭐야. 서, 설마 날 알아보기라도 한 건가? 항상 후드를 뒤집어써서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서 늘 품속에 지니고 다니는 블링크 스크롤에 손을 가져가며 눈치를 살피는데,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시안?”
“……어?”
이 여자가 어떻게 내 애칭을 알고 있는 거지? 당황한 내가 입을 다문 채 굳어 있자 그녀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맞구나! 나야, 렌!”
어…… 제가 잘못 들었지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아는 렌은 사내놈이거든요?
내가 불신하는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잔뜩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호, 혹시 루시안이 아닌가요?”
‘아닌데요, 낄낄. 사람 잘못 보셨수다, 이 마녀야.’라며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내 이름은 루시안이 확실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당황하고 있자 그녀는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와락!
놀라워할 새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은 그녀는 이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걱정했단 말이야. 마을에 역병이 들어서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듣고서 네가 죽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게다가 네가 십 년 전의 약속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그런 걱정 때문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그런데 넌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아니, 잠깐. 10년 전의 약속이라니. 정말 이 마녀가 내가 아는 그 렌이란 말이야? 하지만 걘 남잔데?!
그런 충격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나를 꼭 끌어안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촉에 식은땀을 흘렸다. 말랑말랑한 덩어리 두 개가 내 가슴에 그대로 밀착되어 있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진정한 대마법사가 되기 위해 25살 때까지 동정을 지키기 위해 여자를 멀리해 온…… 이 아니라 스승님의 탑에 틀어박혀 마법을 배우고 연구를 하느라 여자를 접할 기회가 거의 전무했던 나로서는 익숙지 않은 감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버버…….”
병신처럼 뭐라고 말조차 못하고 서 있자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렌이 나를 끌어안았던 손을 풀며 뒤로 물러났다.
“헤헤, 미안.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덜떨어진 푼수처럼 웃으며 뒤통수에 손을 가져가며 몸을 모로 꼬는 저 모습에서 어릴 적 렌이 겹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