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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2화)
Chap 1 추억과 공포 사이(2)


지금까지는 죽어라 도망만 다니느라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 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어릴 적 렌의 모습이 확실히 남아 있었다.
“지, 진짜로 렌이냐? 하지만 다, 당신은 여자잖아!”
내가 아는 렌은 분명 남자였다. 아니면 내가 누군가에게 정신 조작을 당하기라도 해서 어릴 적의 기억이 뒤틀린 건가? 혹시 흑마법의 부작용?!
“아버지가 나를 기사로 키우고 싶으셔서 어릴 때부터 남자처럼 키우신 거야. 아카데미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여자로 돌아왔지만.”
그렇게 말하며 렌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딸내미를 기사로 만들고자 사내아이로 키워 왔다니. 이건 너무 질이 나쁘잖아! 옛날이야 여자가 기사가 되는 것이 금기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아카데미의 기사학과에서도 여자를 받아 주는데 말야. 발렌트 아저씨는 나름대로 렌을 뮤라 발키스 경(먼 옛날 여기사가 거의 없던 시대에 남장을 하고 기사가 된 여성)처럼 키우고 싶었던 걸까.
“레, 렌이 여자…….”
“이럴 게 아니라 나랑 같이 가자.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충격과 공포에 빠져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며 렌은 활달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절할 뻔했다.

오, 신이시여.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로 계셔서 제 앞에 나타난다면 라이트닝으로 지진 다음에 윈드 커터로 잘게 썰어 버리고 싶네요.
나는 지금 렌을 제외한 두 쌍의 불편한 시선을 받으며 채 앉아 있다.
……익숙한 얼굴들이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렌과 함께 멋지게 검을 휘둘러 대고 나를 향해 ‘야 이 개새끼야 잡히면 죽을 줄 알아!’ 등등을 열정적으로 외쳐 대던 사람들이었으니.
렌, 왜 하필이면 붉은 장미 기사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날 끌고 온 거냐.
죽일 거면 좀 곱게 죽여 주면 안 되겠냐?
“헤에, 이 쪼끄만 친구가 우리 부단장께서 말하시던 십 년 전 약속의 주인공인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찬찬히 훑어보던 여자 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젠장, 저보다 머리 한 개 정도 더 크시네요.
이 여자가 한 달 전의 마지막 추격전에서 험악한 인상으로 외친 말이 ‘야 이 고자 같은 놈아 네놈이 남자라면 도망치지 말고 제대로 붙어 보자!’였던가.
“놀리지 말아요. 키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쪼그맣다는 말에 내가 기분이 상할 것을 우려한 렌이 내 눈치를 살피며 그녀를 나무랐다.
그러나 고맙기는 하지만, 내가 죽을상을 짓고 있는 건 그 말 때문이 아니야. 아무리 정체가 탄로 나지 않았다고 해도 3달이나 나를 죽이겠다며 달려들던 사람들 사이에 있자니 죽을 맛이라고!
“……렌, 이 사람들은 누구야?”
크아악, 왜 데려온 거야! 날 내보내 줘! 으악! 살려 줘! 하는 마음속의 절규를 숨긴 내가 애써 모르는 척 묻자 렌은 기다렸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했던 약속 기억나? 나는 기사가, 너는 유명한 마법사가 되어서 만나기로 한 것 말이야.”
“으, 응.”
오늘 아침에 꾼 꿈이니 확실히 기억한다. 내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짜잔! 나, 기사가 되었어. 그것도 붉은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이야. 여기 계신 분들은 같은 기사단의 단원들이고.”
……그래, 나도 알아.
내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가만히 앉아 있자 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놀랐어?”
“네가 그 유명한 레이나 바르카스였다니. 지금 너무 놀라서 죽을 거 같아.”
너무 놀라서 당장이라도 품 안의 스크롤을 찢어서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을 정도야.
렌은 무성의한 반응에 실망한 듯 입을 배죽 내밀었다.
“넌 어떻게 됐어?”
“그게, 마법사는 됐는데 유명하진 않고…….”
마땅한 대답이 없어 힘없이 말을 흐리자 주변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후, 한마디로 별 볼일 없다는 거네.”
아니, 젠장! 댁들에게 쫓기느라 그동안 아무것도 못 했는데 어쩌라는 거야!
맨 처음 날더러 쪼그맣다고 말했던 키 큰 여자가 맥이 빠진다는 듯 중얼거리자 당황한 렌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마법사는 됐잖아. 지금은 무슨 일을 해?”
“그냥 뭐, 이것저것.”
“뭐야, 별 볼일 없는 것도 모자라 백수야?”
아니, 젠장. 저 멀대 같은 여자는 왜 자꾸 끼어들어서 시비를 거는 거야? 렌, 저 여자는 네 부하잖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말도 안 돼. 시안은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잖아.”
어릴 때 천재 소리 듣는 아이는 많지만 진짜 천재는 그렇게 많지 않단다. 게다가 요즘은,
“흑마법사를 구하는 곳이 없어서 말이야.”
아무 생각 없이 대꾸하던 나는 갑자기 싸늘해진 주변의 반응에 숨이 멎는 듯했다. 흑마법사라는 말에 렌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다른 두 사람은 표정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미안해. 다들 흑마법사라면 질색을 하거든. 린부르크의 악마라고 알지?”
내가 그 이름을 어떻게 모르겠냐.
“상부의 명령으로 그자를 쫓았던 게 우리 기사단이거든. 세 달이나 뒤쫓았는데도 결국 체포하지 못해서 다들 흑마법사라면 질색을 해. 그, 그래도 시안은 나쁜 마법사가 아니니까 괜찮아.”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렌은 애써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어휴, 정말 아깝다니까. 한번은 셀르 강에서 포위를 해서 잡을 뻔했는데 말이지.”
날더러 쪼그맣다고 말했던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듯 말했다.
셀르 강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37번째 추격전인가?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지. 누가 휘두른 건지는 몰라도 어둠 속에서 날아든 검이 어깨를 깊숙이 베고 지나갔었으니까. 블링크를 메모라이즈해 두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으으!
그런데 잠깐.
“그 린부르크의 악마는 이름이나 얼굴이 안 알려지지 않았나요? 어떻게 삼 개월이나 뒤쫓을 수 있었던 거죠?”
그래, 젠장. 쫓기는 당사자이면서도 가장 궁금했던 게 이거다. 분명히 따돌렸었는데도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뒤쫓아 왔었지. 대체 무슨 수를 썼던 건지 이야기나 들어 보자.
“아, 그거? 수컷 추적 벌레를 그 자식의 로브에 붙여 놨었거든.”
추적 벌레라면 짝이 되는 수컷이 얼마나 떨어져 있건 간에 그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그거?
“그런데 국경 근처에서 갑자기 암컷 추적 벌레가 죽어 버리더라고. 아마도 놈이 추적 벌레를 눈치챈 거겠지.”
추, 추적 벌레라고? 그러고 보니 린부르크를 벗어나기 직전에 엉망진창이 된 몰골의 기사 하나가 내 로브 자락을 붙잡았었지. 물론 그 직후에 ‘레즈나’에게 업어치기를 당했지만.
그때 그 기사가 한 말이 ‘네놈은 도망 못 쳐!’였었다. 그때는 그저 저주하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것만 아녔음 3개월 동안 고생할 필요도 없었단 거잖아?!
만약 국경 근처를 지날 때 발을 헛디뎌서 강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수도에 들어오자마자 잡혔을 거다. 추적 벌레의 부부 사랑은 짝이 죽으면 자살해 버릴 정도로 지독하니까.
“듀로타 녀석들이 국경을 넘는 것만 허락했다면 붙잡을 수도 있었는데!”
오오, 답답하고 꽉 막힌 관료주의여, 감사합니다. 덕분에 더 고생을 하지 않았군요.
듀로타 왕국에서 국경을 넘는 걸 허가했다면 내가 국경을 넘어간 게 속임수란 걸 알아챘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추적 벌레가 죽었으니 더 쫓아올 수는 없었겠지만.
쫓기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부르르 떠는 나를 두고서 여인네들은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었다. 대부분이 나에 대한 험담과, 나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저는 참 인기가 좋군요.
수많은 여자들에게서 쫓긴 과거에 현재는 그 여자들 틈에 앉아서 나를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듣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응, 너와 주변에 있는 이 무서운 여자들에게서 도망치느라 엄청 화려하고 격동적인 시간들을 보냈어. ……라고 한다면 당장 차곡차곡 쌓인 장작들 위에 앉아서 비명을 지르게 되겠지.
“스승님의 연구실로 따라가서 마법만 배우며 지내다가 일 년 전부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지내고 있어.”
돌아다니던 중에 들른 린부르크에서 사고만 치지 않았더라면 별 문제 없었을 거란 얘기는 차마 꺼내지 않았다.
“떠돌아다녀? 그, 그럼 또 어딘가로 떠날 거야?”
떠날 거냐고? 당연하지! 그럼 내가 여기 남아서 저 무서운 여자들을 또 볼 것 같으냐!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말하려는 순간, 내 목을 조여 오는 무형의 기운에 침조차 삼켜지지 않았다.
“설마! 이제 슬슬 한곳에 정착해야 하지 않겠어? 요즘은 워낙 세상이 흉흉해서 여행을 하는 것도 위험하잖아. ……안 그래?”
“그럼요, 멀리 갈 필요도 없잖아요. 자엘 룬이 얼마나…… 살기 좋은 도시인데.”
렌의 뒤에 서 있는 두 여자는 조금 전과는 달리 험악한 인상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익숙한 표정을 보니 3개월 동안의 긴장감 넘치는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저기, 여러분 때문에 위험할 것 같거든요? 게다가 왜 하필 자엘 룬인가요. 제 정체를 알면 죽이려고 덤빌 기사단들과 마법 협회의 본부가 있는 곳인데.
하지만 허리에 멘 검을 슬쩍슬쩍 건드리는 것이, 거부했다간 지금 당장 도륙을 낼 기세였다. 렌은 왜 기사면서도 저 살기를 느끼지 못하는 거지?!
“떠, 떠나긴. 나도 이제 슬슬 일자리를 찾아봐야지…… 이젠 여비도 얼마 없고…….”
그 말에 울상을 짓고 있던 렌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두 명의 여기사도 그제야 살인 미소(말 그대로 죽일 것 같은)를 지으며 입을 모아 말했다.
“이야, 잘됐네. 십 년 만에 만난 사이인데 금방 헤어지면 슬플 거야.”
그러면서 조용히 나를 노려보는 것이 내가 몰래 사라지면 쫓아올 것만 같은 기세다. 으으, 3개월 동안의 경험을 또 한 번 겪는 것은 절대로 사양이다. 게다가 이전에는 내 얼굴도, 신원도 몰랐기에 간신히 따돌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 내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대체 뭣 때문에 나를 붙잡아 두려 하는 거냐!
내가 절망감에 빠져 있는 사이 두 명의 마녀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렌에게 다가갔다.
“축하해 부단장. 그럼 우린 이만 자리를 피해 줄 테니 열심히 해 보라고.”
“그래, 우리도 응원할 테니까.”
좀 전까지만 해도 잔뜩 험악한 표정으로 무언의 협박을 하시던 분들이 소녀처럼 상큼하게 말하시는 걸 보니 가증스럽기 그지없군요.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렌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뺨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여, 여러분도 참…… 저 힘낼게요.”
대체 뭘 열심히 하란 거고 뭘 힘낸다는 거냐.
아까 전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만 해도 10년 만에 렌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는데 지금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형수처럼 모든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나는 마녀들이 렌만 남겨 두고 나가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주, 죽는 줄 알았다…….”
“괜찮아? 야단스럽게 굴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냐. 평소에도 날 많이 걱정하고 아껴 주는걸.”
과연 네가 조금 전 저 여자들의 모습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올까? 렌 녀석, 눈치가 없는 거라고 해야 할지 순진한 거라고 해야 할지. 어벙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붉은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 레이나로서 나를 뒤쫓을 때는 엄청나게 냉정하고 예리하더니.
그런데 저 여자들은 어째서 내가 자엘 룬에 정착하게 만들려고 한 거지? 태도를 보아하니 렌과 연관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시안, 자엘 룬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역병에서 목숨을 건진 고향 사람들과는 연락이 끊긴 지가 오래전이고 스승님의 탑에서 마법만 배운 나로서는 자엘 룬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탑을 나온 이후에는 린부르크의 일 덕분에 쫓기기만 했으니.
고개를 저어 부정의 뜻을 나타내자 렌이 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그럼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지내지 않을래? 꼬, 꼭 오라는 건 아니고, 마땅히 지낼 곳을 정하지 않았다면…… 아, 부모님도 너를 보고 싶어 하시고 말이야!”
자엘 룬에 흘러들어 온 것이 겨우 사흘 전이고, 정착하겠다고 한 것이 바로 조금 전인데 머물 곳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발렌트 아저씨와 수잔 아주머니도 만나 보고 싶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를 뒤쫓던 렌과 붉은 장미 기사단의 사람들과는 더 이상 얽히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아니, 얽히지 않아야만 한다.
“괜찮아. 한동안은 여관에서 머물면 되니까. 너희 부모님께는 다음에 찾아갈게.”
이제 여관 간 다음 적당히 기회를 봐서 도망치는 거야. 3개월 동안의 술래잡기로 이미 도망치는 것에는 이력이 생겼다고!
“그,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무척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렌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미안하지만 제가 무섭답니다. 아무리 불알친구인 렌이라지만 3개월 동안의 기억이 너무 무섭게 각인되어 있어서요. ……불알친구라고 하는 건 좀 말이 안 되려나. 그러고 보니 녀석과는 함께 오줌을 눈다거나 목욕을 같이 했던 기억이 전혀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