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도망 못 쳐 1(3화)
Chap 1 추억과 공포 사이(3)


“그럼 괜찮으면 같이 도시 구경이나 하지 않을래?”
미안하지만 사양이야. 더 이상 함께 있다가는 스트레스 때문에 위장에 구멍이 나 버릴 거야.
“아냐, 괜찮은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봐야지. 바쁜 사람 귀찮게 한 건 아닌가 모르겠다. 난 이만 가 볼게.”
“아, 안 바쁜데…… 괜찮으면 같이 가 줄까?”
제발 좀 바빠 줘! 구멍이 나려고 하는 내 위장을 생각해서라도!
“괜찮아.”
딱 잘라 거절하고 서둘러 일어서자 렌은 아…… 하는 한숨을 흘리더니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그래……?”
렌은 10년 만의 해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한숨 쉬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다 이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자엘 룬에 있으면 자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죽어라 피해 다닐 거란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난 수배범이고 넌 기사잖니.
드디어 가시밭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위해 문을 연 순간.
……난 악마들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기, 칼날을 혓바닥으로 핥지 않으셔도 충분히 무섭거든요? 아, 뒤에 계신 분, 그렇게 손가락 마디를 꺾어서 소리를 내시면 관절에 좋지 않아요, 하하…….
소리 없이 웃어 보이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던 두 마녀도 마주 웃어 주었다. 그녀들의 입이 이구동성으로 소리 없이 말했다.
‘닫아.’
난 말 잘 듣는 착한 마법사니까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렌을 노려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하하, 그러고 보니 이 근처 지리도 잘 모르네. 괜찮으면 마법 협회까지 같이 가 줄래?”
정말 길을 몰라서 그러는 것뿐이야. 결코 문 뒤에 있는 두 명이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렌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살짝 돌아보니 열린 문틈 사이로 마녀들이 웃고 있었다.
아, 스승님! 지옥이라는 게 이렇게 생겼군요.

“없어요.”
쓰라린 배를 부여잡고 자엘 룬의 마법 협회 지부를 찾아왔더니, 없다고?
“예, 죄송하게 됐네요.”
“그럼 저건 뭡니까?!”
“이것들 말인가요?”
그래! 그것들! 댁의 바로 뒤에 있는 게시판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법사 모집 공고들 말이야!
접수처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는 뒤를 힐끗 돌아보더니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흑마법사라고 하셨잖아요. 잘 봐요. 요즘은 전부 백마법사들을 구한다구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죄다 구석에 작은 글씨로 하나같이 똑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흑마법사 절대 사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무리 사람들이 흑마법사를 꺼린다고 해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을 텐데.
“원랜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린부르크의 악마가 등장한 이후로는 아무도 흑마법사를 구하지 않아요. 다른 흑마법사들만 죽어나는 거죠, 뭐. 다른 나라로 간다면 모를까, 바이안에서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놈의 린부르크의 악마…….
접수원은 손톱을 손질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기존에 일하던 흑마법사들도 요즘은 대부분 해고하는 추세라서, 기대하지 않는 게 편해요.”
젠장! 내 전문 분야인 소환 마법은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드문 편이라 괜찮은 일자리가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괜찮아. 시안은 꼭 잘될 거야! 나도 도와줄게.”
해맑게 웃으며 응원하지 말라고.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어깨의 힘이 쫙 빠진다.
사실 최근 마법 협회에 등록하는 흑마법사들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였다. 마법 협회 내부에서도 린부르크의 일로 흑마법사들을 비난하고 나서는 마당이고. 아카데미들도 흑마법 관련 강의 대신 백마법에 관련한 강의들로 채울 정도니 말 다한 거다.
그리고 이런 흑마법 기피 현상에 부채질을 한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나였다.
그때 아까부터 우물쭈물 거리며 뭔가 말하려던 렌이 결국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래! 오늘은 나랑 같이 놀러가지 않을래?”
“난 지금 그럴 기분…….”
야, 인마.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묻는 말이랑 얼굴 표정이 이율배반적이잖아.
렌은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쫓고 쫓기던 3개월 동안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야.”
“빨리 가자!”
내가 두려움에 승낙하자마자 렌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런 아이 같은 행동을 보면 어릴 적과 전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어릴 적의 렌과 지금의 렌은 다르다.
……기사단의 부단장. 렌 녀석은 기사가 되겠다던 약속을 지킨 건 물론이고 부단장이라는 위치에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대체 뭐 하는 거지? 아무것도 해 놓은 것도 없이, 흉악한 수배범이 되어서 렌에게 쫓기기나 하고.
“……한심하잖아.”
“응? 뭐라고 했어?”
잔뜩 들떠서 앞장서던 렌이 뒤돌아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저 녀석은 지금 내가 얼마나 복잡 미묘한 심정인지 모를 테지. 그냥 영원히 몰라 다오. 가장 친했던 어릴 적 친구가 ‘네가 그 개자식이었다니!’라는 말을 외치며 칼을 휘두르는 건 절대로 사양이다. 음, 그나마 검을 가지고 온 것 같지는 않으니 다행이지만.
“아니, 그냥. 너 키가 많이 컸구나 싶어서.”
그러고 보니 어릴 땐 내가 주먹 세 개 정도는 더 컸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나와 눈높이가 똑같다. 렌이 보통 여자들에 비해 키가 크단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작을 뿐이지, 제길.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문뜩 지금 걷는 방향이 어딘지 모른단 생각에 돌아보며 묻자 렌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헤헤, 시안. 혹시 파르페 좋아해?”
‘아니. 단 거는 무진장 싫어.’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 근처에 파르페를 엄청 맛있게 하는 가게를 알고 있는데…… 아,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까?”
저 표정 때문이다. 옛날부터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으면 어쩔 수 없이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말았었다.
“……나쁘진 않겠지.”
그러고 보니 렌은 어릴 때부터 단 걸 무척이나 좋아했었던 것 같다.
“얏호!”
파르페가 그렇게도 좋은지 환호를 터트리는 모습이 어릴 때와 전혀 다른 것이 없었다.

점심때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렌이 안내한 노천 카페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부분이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인 듯했다.
자신도 이런 분위기는 그다지 익숙하지 앉은 듯 렌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 이러고 앉아 있으니까 꼭 우리도 데이트하러 나온 것 같지 않아?”
옆자리의 연인이 펼치는 파렴치한 애정 행각을 힐끗거리던 렌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얼굴을 붉혀 가면서 부끄러워 할 거면 그런 말은 애초에 왜 하는 건데?
“푸핫. 징그럽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웃으며 핀잔을 주자 잠시 움찔하던 렌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헤, 재미없어?”
물론이지.
그렇게 실없이 떠드는 사이에 렌이 주문한 파르페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보기만 해도 살살 녹을 것 같은 하얀 아이스크림 위로 걸쭉한 시럽이 듬뿍 뿌려져 있었다.
으, 한 입만 떠먹었을 뿐인데 혀가 마비되는 것 같다. 고개를 살짝 들어 보니 렌은 계속해서 스푼을 움직이고 있었다.
“좀 천천히 먹어.”
칠칠맞게 입가에 시럽 묻히지 좀 마. 아직도 애냐? 내가 투덜거리며 입가를 닦아 주자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러다 이내 헤실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 파르페 말이야, 너랑 만나게 되면 꼭 같이 먹으러 오고 싶었어.”
네네, 그러시겠지. 난 단 건 무지 싫어한다고.
입 안 가득 끈적끈적하게 퍼진 시럽 때문에 더 이상 먹기는 힘들 듯싶었다. 그래서 스푼을 내려놓고 따라 나온 빵 한 조각을 집어 들려는 순간, 어디선가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작지 않은 마나의 파동이 쉴 새 없이 출렁이며 신경을 건드렸다. 어지간한 마법사로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격렬한 파랑이었다.
“응?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렌이 스푼을 입에 문 채로 웅얼거리는 듯한 발음으로 물으며 올려다보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반쯤 일어섰던 나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아무렇게나 얼버무렸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어차피 자엘 룬에는 여러 기사단의 본영과 경비대가 주둔하고 있으니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
습관처럼 예민하게 펼쳐 놓은 감각 사이에 걸려 들어오는 파동을 애써 무시하며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내가 알아차렸을 정도니 마법 협회에서도 이미 파악하고 기사단과 수도 경비대에 알렸겠지.
“저기…….”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파르페를 다 먹어 치운 렌이 머뭇거리며 뭔가 말하려고 했다. 나는 너무 달아서 반도 채 못 먹겠는데 더 먹고 싶은 거냐?
“왜?”
무시하려고 애를 써도 자꾸만 느껴지는 마나의 파랑에 짜증이 일은 탓이었는지, 대답이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나왔다. 그 덕분인지 렌은 당황한 듯 허둥대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했어.”
응? 뭐라고 하는 거야? 너무 작은 목소리로 중얼대듯 한 말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멀뚱히 바라보자 렌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 어릴 때부터……!”
지이이잉―!
― 서쪽 대로에 특급 수배범 ‘자크 마일론’이 나타났습니다! 주변의 단원들은 당장 현장으로 출동해 주십시오!
렌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금속 구슬이 울리며 다급한 외침을 토해 냈다. 평범한 장식품인 줄 알았더니 통신용 아티팩트였던 모양이다.
그 말에 렌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자크 마일론이라고? 여관을 나오며 보았던 수배범 리스트에서 린부르크의 악마보다도 위에 적혀 있던 이름이었다.
스승의 마법서를 가지기 위해 스승과 동기들을 살해하고 달아난, 일명 배덕의 마법사. 수배범이 되기 전부터 강력한 마법사로서 이름을 날리던 터라 뒤를 쫓던 기사와 마법사, 현상금 사냥꾼들도 여럿 죽였다고 한 것 같다. 내가 느꼈던 파동이 바로 그자의 것이라니. 그런데 그 정도의 거물이 어째서 자엘 룬에 갑자기 나타난 거야?
“미안,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렌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긴, 렌. 난 괜찮은걸, 하하하.
내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렌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더니 뒤돌아서서 달려갔다.
으하하하! 자유다 자유! 이제 이 길로 이 도시를 떠나 다른 곳에서 제대로 된 마법사로서의 삶을 시작하면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페를 나서는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큭!”
건물들 너머에서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길을 걷던 행인들이 폭음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엎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나의 파동이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서쪽 대로라는 곳이 바로 건너편이었나?
흥, 알 게 뭐야. 빨리 여기를 뜨는 게 나나 렌에게도 좋은 일이야.
안녕이다, 내 유일한 친구여.
쾅쾅쾅!
“꺄아악!”
……젠장! 그러고 보니 그 바보 같은 녀석은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잖아!
경비대와 기사단이 당장 출동해서 처리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렌 그 녀석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충격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두 번째 폭발음에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폭발이 일어난 곳에서부터 멀어지려고 달아나는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한참을 사람들 사이를 낑낑거리며 헤치고 나가자 조금은 움직이기 편해졌다. 전투를 하고 있는 장소가 가까워졌다는 거겠지.
저 멀리 흑갈색의 로브를 걸친 중년 사내가 파이어 볼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경비대의 병사들로 보이는 사내들은 여기저기에 엉망으로 널브러져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까 전에 만났던 두 여자와 렌만이 마일론을 상대하고 있었다. 렌은 쓰러진 병사 중의 하나가 들고 있었을 장검을 쥐고 있었다.
그때 마일론의 스태프 끝에서 날아간 화염구가 렌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갔다. 바닥에 부딪친 불덩이가 폭발하며 사방에 돌조각과 먼지가 비산하는 것이 보였다.
4클래스의 파이어 볼이 저 정도의 위력이라니, 오버 히트 마나인가? 하지만 적정량 이상의 마나를 집어넣으면 파괴력은 늘어나지만 배열이 불안정해져서 꽤 위험할 텐데?
기사단과 마법 협회는 뭘 하는 거야? 저런 위험한 녀석이 도시 한복판에서 날뛰는데 왜 아직까지 안 오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