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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4화)
Chap 1 추억과 공포 사이(4)


“크악!”
두 여자 중 하나가 빠르게 날아든 마법 화살에 어깨를 맞아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렌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곳곳이 그을리고 낭패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쯤 하고 물러나지 그러나? 피차 피곤해질 뿐이다.”
마일론이 무덤덤한 얼굴로 권했으나 렌은 왼손의 중지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웃기지 마! 누가 도망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반드시 잡아서 철창에 집어넣고 말겠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레이나 바르카스의 모습을 보니 반갑(?)기는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간신히 버티고 있으면서 어째서 만용을 부리는 거지? 실수로 엄청난 짓을 저질러 버린 나와는 달리 저 사람은 진짜란 말이다.
게다가 내가 특급 수배범의 가장 하위인 10위에 불과한 반면에, 배덕의 마법사 자크 마일론은 7위란 말이야!
“그럼 별수 없지. 더 귀찮아지기 전에 정리하고 여길 떠야겠군.”
지금 가지고 있는 촉매제가 얼마나 남아 있지?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넉넉히 챙기고 다니는 건데. 누가 이런 일이 터질 줄 알았겠냐고!
쓸 만한 마법은 메모라이즈도 해 놓지 않은데다가 지니고 다니는 스크롤은 죄다 블링크나 하이드처럼 도망칠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마법들뿐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마법이 몇 가지 있기는 했으나 여기서 그것들을 사용했다간 린부르크의 악마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결국 다급히 주머니를 탈탈 털어 한 움큼 정도의 보라색 가루를 바닥에 뿌리고는 마나를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불러낼 수 있을 만한 녀석이…….
“이봐.”
검을 겨누고 서 있던 렌이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자 마일론이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렌의 물음에 그는 잠시 눈을 끔뻑거리더니 한숨 쉬듯 가볍게 웃었다.
좋아, 시간을 끌라고. 조금만 더 있으면 자크 마일론을 상대할 만한 기사나 마법사가 올 수 있을 거야.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마일론은 이내 무심하게 대답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했더니 그런 한심한 물음인가.”
자신의 진지한 물음이 한순간에 한심한 것으로 전락하자 분노한 렌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한심한 물음이라고?! 대체 무슨 이유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거냐!”
마일론은 전혀 흔들림도 없이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래, 너희는 모르겠지. 지금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렌이 인상을 찡그리며 되묻는 순간 마일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젠장, 시간을 끌고 있던 건 렌이 아니라 저자였나!
“알 필요도 없고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내 말을 기억할 수 있을 사람은 없을 테니.”
맙소사, 자크 마일론도 저걸 익혔을 줄이야! 어째서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던 거지?
그가 들고 있는 스태프의 끝에서 회색의 기류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솟아올랐다. 렌도 그것을 알아본 듯 눈을 커다랗게 뜨며 경악했다.
“금지된 마법?!”
“정확히 맞혔다. 이것까지 사용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걸 본 이상…….”
나는 그 즉시 알 수 있었다.
목격자를, 죄다 죽여 버린 거다.
금지된 마법들은 하나하나가 마법사들에게 있어 가장 큰 대죄로 취급받을 만큼 잔혹하고 위험한 것들뿐이었다. 게다가 마일론의 손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저것은 분명 일정 공간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마신의 숨결!
그것도 그냥 소멸시키는 것도 아니라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를 하나하나 분해시키며 서서히 지워 버리는 것이었다. 범위 안의 생명들은 내부에서부터 부서져 내리며 엄청난 고통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저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려고 하다니! 저런 미친 새끼가! 마신의 숨결이라면 마수를 소환하는 것 정도로는 막을 수도 없잖아!
도망치기보다는 맞서는 것을 택한 듯 렌과 세 기사가 이를 악물며 마일론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도달할 때쯤이면 이미 늦을 터였다. 금지된 마법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일론의 손 안에서 요동치던 마신의 숨결이 폭풍전야처럼 고요하게 변했다. 그것이 마법이 발현되기 직전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은 렌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자, 내 앞에서 사라져라.”
가벼운 미소를 띤 마일론이 손을 내뻗자 렌과 동료는 닥쳐 올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
하지만 마신의 숨결은 그들을 빗겨나 한참이나 떨어져 있던 커다란 건물에 부딪쳤다.
“뭐지?”
빗나가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마일론이 눈을 살짝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도 마법의 발동 순간에 끼어든 불청객을 알아챈 거겠지.
마신의 숨결에 닿은 3층짜리 건물과 그 주변이 천천히 가루가 되듯 사라지고 있었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아까 전에 대피를 했으면 좋겠는데…….
“우웩!”
동시에 내장이 뒤집어질 듯한 고통과 함께 시뻘건 핏덩어리가 터져 나왔다. 막을 수는 없지만 발동되기 전에 방해를 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그렇다고 피해가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보듯이 마일론은 아무런 피해도 없이 멀쩡하게 서 있지만 나는 마나의 폭주로 인해 계속해서 피를 게워 내고 있었으니까.
다른 마법사가 펼치는 마법의 마나 배열에 끼어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거기에 보통 마법도 아니라 금지된 마법인 마신의 숨결이다.
내가 마나 배열을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배열에 끼어드는 순간 온몸의 마나가 폭주해서 죽었을 거다.
“너는 누구지?”
내 존재를 알아챈 마일론이 자신의 마법이 방해받았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과 분노로 물었다.
누구긴, 댁이랑 똑같은 특급 수배범인 린부르크의 악마지.
“별 볼일 없는 흑마…… 우웩, 법사올시다.”
톡 건드려도 죽기 일보직전으로 보이는 내 모습에 자크 마일론은 피식 하고 실소를 흘렸다.
“마나의 흐름에 끼어들고도 살아 있다니, 운이 좋은 청년이로군.”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그저 귀찮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긴, 당장이라도 죽기 직전인 애송이 흑마법사에겐 긴장하지도 않겠지.
“음, 불청객인가. 그대들은 운이 좋군.”
잠시 몸을 움찔거린 마일론은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스크롤을 찢었다.
텔레포트인가? 이 자리를 뜨려고 맘만 먹었다면 언제든 뜰 수 있었단 거잖아……?
털썩.
나는 그가 공간의 틈새로 사라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리고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다들 괜찮아?!”
“단장님!”
당장이라도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칼의 여기사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저 염병할 얼굴도 지금은 반갑군.
“배덕의 마법사는 어디에 있나!”
“도망쳤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마일론의 행방을 묻는 그녀에게 렌이 힘없이 대답했다. 렌의 상관이자 붉은 장미 기사단의 단장인 알카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백발의 영감은…… 에…… 누구세요?
“이건…… 마신의 숨결인가!”
흔적만 보고도 마신의 숨결을 알아보는 것을 보니 마법사로군. 펑퍼짐한 로브를 걸친 그는 길게 자란 탐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흘렸다.
“배덕의 마법사가 금지된 마법까지 익히고 있었던 줄은 몰랐거늘.”
“금지된 마법이라니! 다들 괜찮은 거야?”
알카네가 영감의 말에 깜짝 놀라며 단원들을 살폈다. 그걸 맞았으면 댁의 부하들이 살아 있겠냐?
“다행히 저 녀석이 빗겨 가게 한 덕에 살았습니다.”
마법 화살에 맞아 나뒹굴었던 기사가 고통으로 잔뜩 찡그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영감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어라? 마신의 숨결을 빗겨 가게 했다고 했는가?!”
“아참, 시안은? ……꺅!”
그제야 내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돌리던 렌이 나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터트렸다.
“이, 이제야 나를 우웩, 떠올린 거냐, 우웩!”
마나의 폭주가 예상 외로 심각해서 계속해서 핏덩이가 꾸역꾸역 올라왔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훤했다. 새하얗게 질린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겠지.
엉망진창이 된 내 몰골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노인이 혀를 쯧쯧 차며 다가왔다.
“마나 폭주로군. 죽으려고 환장한 친구인가?”
상태만을 보고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했는지 짐작한 듯했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죽으려고 환장한 행동이긴 했지.
“시안! 괜찮은 거야?”
어느새 다가온 렌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괜찮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괴롭다고.
“시안이라고? 그럼 이 남자가 레이나의 십 년 전…….”
젠장, 개나 소나 10년 전의 약속 타령이로군. 대체 얼마나 떠들고 다닌 거야?
“우웩!”
그리고 난 피를 한 바가지 더 토해 내며 기절했다.



Chap 2 소환 실패?(1)


어디 보자, 재료는 이쯤 되면 완벽하고 이제 소환진만 그리면 되는 건가. 쳇, 스승님도 너무하시지. 24살이 되기 전에 스승의 탑을 떠나는 것이 마법사들의 불문율이기는 하지만 설마 한겨울에 내쫓으실 줄이야.
눈이 잔뜩 뒤덮인 산속을 내려오느라 감기까지…….
“에취!”
으으, 콧물이 주르르 흐르는 게 꽤 감기가 지독한 것 같다. 소환하고 계약만 마치면 님프의 간호를 받으며 누워 있을 수 있겠지, 헤헤.
님프는 그럭저럭 똑똑하고 모습도 꽤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을 한 요정인지라 마법사들 사이에서 조수로 인기가 좋은 편이다. 스승님도 귀엽다는 이유로 둘이나 데리고 계셨고 말이야. 겨, 결코 겉모습이 예뻐서 소환하려는 건 아니다! 그럭저럭 머리가 좋아서 조수로 쓰기 좋을 뿐이라고!
……그런데 나 누구한테 변명하는 거지?
아무튼 스승님의 탑이 위치한 칼레이도 산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린부르크는 규모가 커서 소환 마법에 쓸 재료들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물론 님프 소환은 꽤 어려운 소환 마법이지만, 이 몸은 소환 마법이 전문이라는 말씀, 훗!
나도 이제는 어엿한 한 사람의 마법사이니 한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 쓸 만한 조수 하나쯤은 데리고 있는 게 당연한 것이다.
마나를 불어 넣은 스태프의 끝 부분으로 여관방 바닥에 마법의 언어를 가득 새겨 넣는다. 마나를 이용해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소환이 끝나면 저절로 사라지게 될 테니 욕먹을 일은 없다.
“자, 그럼.”
소환진을 그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바다와 대지, 나무와 돌. 모두에 존재하는…….”
그런데…… 사람들 모두가 한 번씩은 이런 경험이 있을 거다. 재채기가 나올 듯하면서도 나오지 않는데 자꾸 콧속은 간지러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짜증나는 경험이!
“에, 에…… 아, 뭐야. 이런 썅, 취!”
재채기가 나올 듯하면서도 나오지 않자 짜증이 나서 욕설을 내뱉는 순간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리고 있던 소환진은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은은한 빛이 피어오르는 것이…… 엥?! 어째서 발동되는 거야?! 주문이라고는 방금 전에 읊다가 말았을 뿐인데!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와중에도 방대한 양의 마나가 소환진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히 도중에 중단되어야 할 텐데!
안 그래도 감기에 걸려 지쳐 있던 차에 지니고 있던 마나까지 소환진에 빼앗기자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휘청, 하고 뒤로 주저앉는 것과 동시에 소환진의 중심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소환진 위에 서 있는 여인을 비췄다. 새하얀 피부, 허리춤까지 길게 내려오는 흑발. 그리고 등 뒤에 매달린…… 어? 박쥐 날개?
그녀는 자신의 앞에 주저앉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레즈나. 그대가 나의 마스…… 아니지. 네놈이 날 소환한 놈이냐?”
마, 마족?!
경악한 내가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런 말도 못 하자 그녀는 웃었다.
“뭐야, 이 몸을 불러낸 것이 그렇게도 기쁜 거냐?”
“아, 아니…… 전 당신을 불러내려고 한 게 아닌데요.”
그러자 그녀의 눈초리가 가볍게 꿈틀거렸다.
“뭐? 그럼 대체 누굴 불러내려고 했단 거야?”
“니, 님프요.”
으아아악! 죽일 거야! 저건 분명히 죽이겠다는 표시라고! 잔뜩 험악하게 변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