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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5화)
Chap 2 소환 실패?(2)
“장난해? 겨우 님프 따위를 불러내려다가 이 몸을 불러낸 거라고?”
겨, 겨우 님프 따위라니! 나 같은 중급 마법사에겐 그것도 천재라 가능한 거라고요!
하지만 그녀는 이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쨌건 네가 날 불러낸 건 사실인 듯하니까 말이야. 이름이 뭐지?”
“루, 루시안 알프하임입니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레즈나는 눈을 반짝였다.
“일단 손 내밀어 봐.”
응? 손은 왜 내밀라는 거지? 의아해하며 왼쪽 손을 내밀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쳇, 그럼 처음부터 오른손을 내밀어 보라고 하든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오른손을 내밀자 그녀는 손목을 잡아챘다.
어, 어라? 이거 뭔가…… 불안한데?
내가 불안해하는 것을 느꼈는지 손목을 움켜잡은 그녀가 씨익 웃었다.
“훗, 이미 늦었어.”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아무런 대비도 못하고 있던 나는 레즈나를 향해 넘어지듯 안겼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당황해서 붙들린 손을 빼려는데 어느새 내 손은 그녀의 왼쪽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깜짝 놀라 손을 떼려고 하자 그녀는 도리어 손을 힘껏 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런데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가?
“나 레즈나는 여기 이 루시안 알프하임과 맹약하노라. 나는 그에게 힘을, 그는 나를 이곳에 나타나게 할 수 있는 권능을 주노라!”
마법사에게는 펫과 소환마가 있다.
펫은 야생의 몬스터와 마수, 정령 등을 굴복시킨 이후 각인 마법을 이용하여 데리고 다니는 것이고 소환마는 소환 마법을 이용하여 이세계의 주민을 불러온 다음 계약을 맺어 필요할 때마다 불러내는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펫은 위험하거나 각인 마법의 효력이 약해지면 관계가 해지될 수도 있지만 소환마는 계약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양측 모두가 동의하기 전에는 계약을 해지할 수가 없다는 거다.
한마디로, 한번 계약하게 되면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서로를 배신할 수 없다는 거지.
“나는 계약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마족과 계약을 하냐? 그랬다간 대륙 전체의 공적이 될 게 뻔한데!
다급히 손을 빼며 소리친 말에 그녀는 싱긋 웃었다.
“그래? 안 하겠다는 거야? 혹시나 해서 말인데, 소환한 마수와 계약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겠지?”
……소환 마법으로 이계의 주민을 소환한 직후 계약을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야성을 지닌 채로 제멋대로 날뛴다. 물론 이성을 지닌 경우라면 그렇지 않지만, 저 마족이 저렇게 말하는 걸로 봐서는 일부러 난리를 피울 것이 분명했다. 그럼 계약을 맺지 않은 상대를 통제하려면 계약을 맺거나 죽여야 하는데…… 내가 마족을 제압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내가 눈을 크게 부릅뜨는 순간 레즈나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다급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니 콰과과과광! 하는 화려한 효과음과 함께 그녀가 주먹으로 후려갈긴 주변 여관의 벽이 우수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덕에 방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던 연인들은 이불을 덮어 쓴 채 어정쩡한 자세로 굳었다.
“뭘 봐, 자식들아! 하던 짓이나 계속 해!”
제, 젠장. 이러다가 엄청나게 일이 커지겠어. 만약 저 여자가 내가 있던 방에서 뛰쳐나온 걸 본 사람이 있기라도 하다면…… 으악! 빨리 막아야 돼!
“마, 마마마…….”
뭐라는 거야? 근처에 있던 빼빼 마른 청년 하나가 레즈나의 등에 달린 박쥐 날개를 가리키며 말을 더듬거렸다.
“마족이다! 사악한 마법사가 마족을 불러냈다! 모두 도망쳐!”
청년의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레즈나의 날개와 여관을 뛰쳐나온 나를 번갈아 보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뭐야, 그럼 내가 사악한 마법사라는 거야?
“잡아라!”
고개를 돌리니 갑자기 일어난 소란을 들은 경비대가 각자 무기를 든 채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외침에 레즈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병사들에게 다가가더니 맨 앞의 병사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곤 전혀 의외의 대사를 내뱉었다.
“젠장! 빌어먹을 마왕 자식!”
“마, 마왕?”
자신의 몸 쪽으로 병사를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허공으로 던져 버렸다. 메치기에 당한 병사는 그 마왕이라는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마족이 마왕을 욕해도 되는 거야? 아, 이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경비대원들 사이를 바람처럼 움직이며 공중으로 띄워 올리던 레즈나는 더 이상 서 있는 병사가 아무도 없자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캬아! 이 자식들아! 벌써 끝이냐! 웃기지 말라고! 일어서!”
바닥에 쓰러져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병사들을 무시하고는 주변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부숴 나가는 레즈나의 얼굴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라기보단 이렇게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을 게 아니잖아!
“멈춰요!”
“쳇, 뭐야. 벌써?”
어, 어째서 아쉬워하는 겁니까!
혹시 계약 거부에 대한 폭주는 핑계일 뿐이고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 때문에 이러는 것 아냐?
으으, 그래도 건물 안의 사람들이 대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부수는 건 다행인가?
“당신이 이성이 없는 하급 마수도 아닌데 어째서 이러는 겁니까?! 좋게 이야기로 해결하자고요!”
레즈나는 자신이 원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한 번 쳐 보이고는 혀를 내밀었다.
“흥! 얼마 만에 나온 중간계인데 그대로 돌아가라고? 수백 년이나 이쪽으로 건너온 마족이 없었단 말이야. 다시 이쪽으로 건너올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데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냐?”
어째서 실수로 불러낸 마족이 하필이면 저런 여자인 거야?! 저건 분명 계약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겠다는 거지? 웃기지 말라고 해. 차라리 이 자리에서 도망치는 게 낫지! 아무리 잘난 마족이라고 해도 계약자가 없다면 이쪽 세계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고!
때마침 저 멀리서 기사단으로 보이는 자들이 말을 몰아 달려오고 있었다.
“멈춰라! 이 더러운 마족이여! 폭풍의 기사단 단장인 이 몸의 명예를 걸고 너의 죄를 응징…….”
“시끄러워 병신아.”
조금 앞에서 말을 멈춰 세운 젊은 청년이 말 위에서 한껏 비장한 표정과 목소리로 소리치자 레즈나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더니 양발을 모아 그대로 얼굴을 차 버렸다.
아, 아프겠다.
가장 앞에 있던 단장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 뒤에 있던 기사들이 서둘러 말에서 내리며 그에게 달려갔다.
“단장!”
기사들이 단장을 챙기며 레즈나를 노려보는 가운데 기사단의 표식이 새겨진 로브를 걸친 중년의 사내가 소리쳤다.
“주변에 저 마족의 계약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자를 먼저 해치워야 합니다!”
분노에 가득 차 있던 기사들이 그 말에 눈을 부릅뜨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계약자라…… 저 여자는 아직 계약자가 없는데? 응? 어째서 기사들이 나를 노려보는 거지?
“저 음침한 흑마법사가 마족의 계약자인 게 분명해!”
“그래! 저놈이다!”
에…… 나? 그, 그러고 보니 레즈나의 주변은 온통 초토화된 상태인데 나만 멀쩡하게 서 있잖아? 이러면 절대로 오해받기 좋은 상황이라기보단 내가 소환하긴 한 거니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가?!
뭐라고 변명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자 그들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놈이 마법을 쓰려고 한다! 못 하게 막아!”
이, 이럴 때는 도망치는 것만이 살 길이다. 그대로 뒤돌아서서 달리자 등 뒤로 기사들의 살기 섞인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서라!”
“개자식! 잡히면 뼈와 살을 분리해 주마!”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죽이려고 드는 거야!
“뭐, 뭐 해요! 좀 도와 달라고요!”
내가 다급하게 소리치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방금 전까지 병사들을 신나게 날려 대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레즈나는 내 머리 위에서 날며 태연하게 구경만 하고 있었다. 기사단의 마법사가 나름대로 그녀를 견제하기 위해서인 듯 마법을 쏘아 보냈지만 레즈나의 몸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흩어졌다.
“내가 알 게 뭐야. ‘가계약자’가 정식으로 계약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데.”
“가계약자는 또 뭐예요!”
“뭐긴 뭐야, 내가 계약을 신청했지만 네가 아직 정식으로 거부하지 않았으니 가계약이지.”
그따위 계약 내가 받아들일 성싶으냐! 제길, 그 가계약인가 뭔가 때문에 그녀가 강제 송환 당하지 않고 있었던 거로군.
“그럼 지금 거부…….”
내가 정식으로 거부하겠다고 말하려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기 말이야, 만약 지금 거부하면 너는 어떻게 될까나?”
레즈나는 뒤를 힐끗 돌아보며 웃었다.
서, 설마! 이걸 노린 거였나?! 아까 전에 마구 날뛰는 모습에 잠시 잊고 있었다. 저 여자는 마족이란 걸!
“아까 전 그 모습은 연기였던 겁니까!”
“어? 그거? 아하하, 진심이지. 마왕 그 자식, 지가 왕이면 다야? 생각하니 또 열 받네!”
……이건 노린 거야 아니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야? 어쨌거나 계약을 거부한다면 뒤에 쫓아오는 기사단에게 죽고 계약을 한다면 전 대륙의 공적이 된다는 거잖아!
“잡았다!”
어느새 뒤를 따라잡은 기사가 환희에 찬 외침을 내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악! 그러고 보니 나처럼 허약해 빠진 마법사가 달리기로 기사를 따돌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죽어라!”
검을 휘두르는 바람소리가 등 뒤로 느껴졌다.
하지만 죽어도 마족과 계약을 맺어서 대륙 전체의 공적이 되긴 싫어!
“계약! 받아들일 테니 일단 살려줘요!”
역시 본능은 이성보다 강하다. 이, 이건 결코 내 의지가 아니야. 내 입이 멋대로 움직인 거라고!
“좋았어!”
레즈나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 크게 외치고는 그대로 내 등 뒤의 기사의 목을 다리로 휘감더니 크게 회전하며 내던졌다.
“오예!”
환호를 지르는 레즈나의 모습과 입에서 거품을 물며 쓰러진 기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내 오른손을 가볍게 매만졌다.
“계약 완료.”
손등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손을 들어 보니 기하학적인 문양이 손등에 새겨졌다가 이내 스며들 듯 사라졌다.
“기념으로 오늘 한번 신나게 날뛰어 주겠어!”
그날, 린부르크의 절반 이상의 건물들이 박살 났고 주둔하고 있던 경비대와 기사단은 모두 병원에서 몇 달간을 누워 있어야 했다고 한다.
감기에 걸린 게 그나마 다행인가? 추워서 후드까지 푹 눌러쓰고 있었으니 얼굴은 확실히 가려졌을 거야. 이 길로 도망을 쳐 버리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러나 나는 3개월 동안 정확히 57번 동안 죽을 뻔했다.
***
엄청나게 끔찍한 꿈을 꾸었다. 세상에, 10년 전의 친구인 렌이 사실은 여자인 것으로 모자라 나의 천적인 레이나 바르카스라니. 아무리 꿈이라지만 현실성이 너무 없는걸. 게다가 갑자기 나타난 배덕의 마법사를 방해하기 위해 마나의 폭주까지 감수하다니. 내가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있어? 하하.
젠장, 했구나. 마나 폭주의 후유증 때문에 속이 뒤집힐 듯이 매슥거렸다.
오, 신이시여. 당신이 정말 밉습니다.
게다가 3개월 전에 모든 악의 근원인 레즈나를 처음 만난 날을 꿈에서 다시 봐야 했다니. 끔찍하기 그지없군.
절망적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잠꼬대가 요란하더군.”
“히익!”
누군가가 바로 옆의 침대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나는 내가 들어도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자, 잠꼬대라니. 혹시 레즈나를 불러낼 때의 꿈을 꾸고 있을 때 이상한 잠꼬대를 한 건 아니겠지?
“비명까지 질러 대는 걸 보니 팔팔하군.”
표정을 보아하니 다행히도 문제가 될 만한 잠꼬대는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이 저 여자라니!
내 전생아,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렌과 함께 있던 여자들 중 나에게 유독 신경질적으로 굴던 키 큰 여자가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방 안의 풍경을 보아하니 분명 내가 묵던 여관은 아닌데.
“여긴 어딥니까?”
“왕립 병원이다. 너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한 곳이 아니니 감사히 여기도록 해.”
무슨 말을 해도 저렇게 듣는 사람 기분이 상하도록 말을 해야 하나?
“그 어중이떠중이 덕분에 이렇게 침상에 누워 있을 수나 있으니 다행이라고 여기도록 하죠.”
말싸움이라면 나도 안 진다, 뭐.
그녀도 내가 아니었다면 마신의 숨결에 그대로 당했을 거라는 것을 인정하는지 쳇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