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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6화)
Chap 2 소환 실패?(3)


환자복의 반쯤 풀어 헤쳐진 앞섶 사이로 마일론의 마법 화살에 당한 어깨가 드러나 보였다. 내가 상처를 감은 붕대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그제야 흐트러진 자신의 옷차림을 깨닫고는 다급히 옷을 여몄다.
“뭘 보는 거야?”
그녀도 여자랍시고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화를 냈다. 누가 댁의 몸을 구경하고 싶은 줄 알아?
“상처는 어때요?”
“흥, 네 녀석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그럭저럭 괜찮다. ……그러는 네 녀석은?”
“아직 속이 좀 울렁거리기는 하지만 괜찮아요. 그런데 음…… 성함이?”
쫓고 쫓기는 3달 동안 얼굴은 익숙해졌으나 이름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단장과 부단장의 이름 정도는 질릴 만큼 듣다보니 기억하게 된 것이었으나 평단원의 이름까지는 지금까지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예나스 프리드.”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자신의 이름만을 짧게 말하곤 시선을 피했다. 괄괄한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성적인 이름이었다.
“듣기 좋은 이름이네.”
“그, 그런가?”
물론 뻥이지. 흔하디흔한 이름인데 뭘. 아마 길거리에서 예나스! 하고 크게 외치면 대여섯 명 정도는 돌아볼 거다. 듣기 좋으라고 해 준 말에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러다 뭔가를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렌이 몹시 걱정했다. 이틀 동안 줄곧 네 녀석 곁에서 간호하고 있느라 무리하는 것 같아서 아까 전에 좀 쉬어 두라고 내보냈다.”
이틀 동안이라, 그래서 이렇게 배가 고픈 거로군. 내가 중얼거리는 순간 병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깨어났구나!”
환한 표정을 지으며 쪼르르 달려온 렌이 내 목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커헉!”
“던젤 씨에게 들었어! 다른 마법사의 마법에 간섭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어째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한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목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내 목관절의 건강부터 신경 써 주지 않겠냐. 그리고 던젤 씨는 또 누구야?
나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렌의 뒤를 따라 들어온 노인네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저 친구에게 너무 뭐라 하지 마시게나. 부단장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쓴 것이지 않는가.”
“던젤 씨, 시안은 이제 괜찮은 거죠?”
눈물을 찔끔 흘리며 내게서 떨어진 렌이 영감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저 영감님이 던젤인가 하는 사람인가 보군.
“걱정 마시게. 속이 완전히 뒤집어져서 죽을 뻔하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을 거네.”
……영감님, 그건 충분히 걱정받을 만한 정도인 것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이 손을 흔들고 계셨던 것 같기도…….
“흐음.”
으응? 콧숨을 내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던젤 영감님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그곳에 있던 소환진은 자네가 그린 건가?”
가지고 있던 촉매제를 탈탈 털어 마수를 불러내려던 소환진을 말하는 건가? 내가 정신을 잃으며 소환진도 흩어졌을 텐데, 그전에 용케도 본 모양이로군.
“예, 그런데요.”
내 대답에 그는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소환진만 보고도 내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는 건가?
“꽤 나쁘지 않은 실력이더군. 부단장의 의견을 받아들여도 나쁘진 않겠어.”
엥? 무슨 의견? 렌을 쳐다보자 녀석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던젤 씨는 우리 기사단에 한 분뿐인 전속 마법사이시거든. 그런데 이번에 후진 양성을 위해 은퇴를 하신데.”
“응? 기사단의 전속 마법사라니?”
“우리가 범죄자 추적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까 마법사를 상대로 하는 일도 자주 있거든.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마법사가 필요한 일이 많아서.”
그,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악의 없이 웃는 렌의 얼굴이 어쩐지 불길해 보인다. 옆에서 못미덥다는 듯 쳐다보던 예나스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오갈 곳 없는 백수 흑마법사에게 붉은 장미 기사단의 전속 마법사 자리를 맡겨 보겠다는 거다.”
“언니! 내가 말해서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자신이 하려던 말을 뺏긴 게 분한지 렌이 가볍게 흘겨보았다.
그, 그런데, 뭐라고? 기사단의 전속 마법사? 그것도 나를 붙잡으려고 쫓던 기사단의?! 그럼 내 흔적을 나더러 쫓으란 거냐!
“뭐야, 그 반응은. 기쁘지 않은 거냐? 요즘같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시기에 너 같은 별 볼일 없는 마법사에게 월급 든든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제공해 주겠다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냐? 배가 불렀군.”
그, 그렇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쉬지도 않고 긴 말을 하면 무섭다고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데 던젤 영감님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별 볼일 없는 건 아니지. 저 나이에 그만한 수준의 소환진을 그리고, 마일론이나 되는 자의 마나 배열에 끼어들고도 살았으니 말이야. 그것도 금지된 마법을 말일세. 게다가 마법 협회에 신원을 조회해 보니 재작년에 중급 마법사 시험을 통과했더구먼.”
치, 칭찬은 고맙지만 말입니다, ‘예나스 씨가 말한 대로 제 실력이 별 볼일 없어서 기사단에 폐가 될지도 모르니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영감님이 그렇게 말씀해 버리시면 절더러 어쩌란 겁니까? 그보다 그딴 건 왜 조회해 본 건데!
던젤 영감님은 나를 더욱더 궁지에 몰고는 ‘허허, 나는 이만 약속이 있어 가 봐야겠군.’이라고 말하더니 나가 버렸다.
이곳에 내 편은 정녕 없단 말인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렌을 쳐다보니…….
“시안이 우리 기사단의 마법사가 되면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아!”
……그게 문제라고.
일단은 거절부터 하고 보자.
“저를 높게 봐주신 건 고맙습니다만…….”
조심스레 거절의 뜻을 내비치자 렌은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고 예나스는 눈을 찡그렸다.
“거절하겠다는 거냐?”
이, 잊고 있는가 본데 나는 환자야! 나는 지금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한데 그렇게 살기를 뿜으며 위협해도 되는 거냐?!
잠시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인심 쓴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정 싫다면 강요하진 않겠어.”
그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단, 타당한 이유 다섯 가지를 댄다면 우리도 포기하지.”
……그건 드래곤 마운틴이나 이스트 게이트의 도적들이나 할 법한 대사잖아!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흑마법사 하나를 영입하려는 것치고는 너무하잖아.
“그거야 너 같은 애송이 마법사에게 영입 제의를 거절당했다는 게 알려지면 우리가 좀 쑥스럽잖아.”
아니, 그럼 애초에 제의를 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그게 기분상의 문제라서 말이지. 타당한 이유를 들면 우리도 포기하겠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 예나스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유는 타당해야 돼.”
타당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걸 보면 듣고 마음에 안 드는 이유면 무시하겠단 거 아냐?!
으으, 걸려도 하필이면 악질에게 걸린 건가? 렌! 네가 친구라면 내가 이런 곤혹을 겪고 있다면 도와줘야…….
어느새 렌은 내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조금 전에 어깨를 축 늘어트린 건 실망해서가 아니라 졸려서 그런 거였냐!
“으음, 위험한 상황도 많을 텐데 경험이 부족한 저로서는 조금 두렵네요.”
사실 기사단을 상대한 경험은 눈물 나게 많지만 말이야. 그러나 예나스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경험은 쌓으면 그만이야. 그리고 위급 상황에서는 마법사를 우선적으로 보호해 줄 테니 걱정 마. 생명 수당도 두둑하다고.”
으윽, 뭔가 반박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맞는 말 같아서 반박할 수가 없어!
그래도 계약에 관해서는 레즈나의 일로 뼈아픈 경험을 얻은 나다! 아무리 그쪽에서 나를 영입하려고 해도 내가 안 한다는데 어쩔 거야!
“조,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거절하겠다고 말했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 말해 버리고 말았다.
계속해서 내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힘이 빠지는지 예나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지금 뭐 하는 거람. 렌만 아녔음 너 같은 건…….”
응? 렌이 뭘 어쨌기에?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보다 너도 참 이상한 녀석이야. 붉은 장미 기사단의 전속 마법사라면 하겠다고 나설 녀석들이 줄을 서는데. 일자리도 못 구하는 녀석이 뭘 믿고 거절하려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댁이라면 3개월이나 추적하며 죽이려 한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고 싶겠어? 라기보다는 애초에 그러면 줄을 서는 마법사들 중에 괜찮은 사람을 뽑아서 쓰면 되잖아!
“피곤하네. 난 좀 자야겠어. 너도 무슨 이유에서 까다롭게 구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봐. 나쁘진 않은 제안이니까.”
그녀는 힘없이 말하고는 그대로 누워서 이불을 덮었다. 이참에 거절할 만한 핑계거리를 생각해 봐야…… 응? 어쩐지 다리 쪽이 무거운 것 같은데?
묵직하게 누르는 기분에 고개를 드니 렌이 내 다리를 베개 삼아 편하게 자고 있었다. 렌을 흔들어 깨우려고 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예나스가 눈도 뜨지 않고 말했다.
“렌 깨우면 죽는다. 너 때문에 잠도 못 잤으니 좀 자게 놔둬.”
그, 그럼 나는 어쩌라고. 지금 점점 다리에 감각이 없어져 가는 것 같은데? 나도 환자인데 존중 좀 해 주면 안 됩니까?
그래도 태평하게 입까지 헤벌린 채로 자고 있는 렌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나온다. 가끔씩 입맛을 쩝쩝 다시는 것이 뭔가 맛있는 것을 먹는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었…….
“우웅…… 시안…….”
대체 무슨 꿈이냐! 어째서 잠꼬대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입맛을 쩝쩝 다시는 건데!

***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니 예나스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의 창문에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어깨의 부상도 낫지 않으셨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녀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여자는 이틀 전에 렌과 함께 마일론을 상대했던 또 한 명의 여자였다.
“흥, 이깟 부상 따위는 아무것도 아냐.”
걱정해 주는 상대의 말에 예나스는 코웃음을 치기는 했지만 통증이 느껴지는지 무의식적으로 어깨의 붕대를 만졌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모두들 장비는 챙긴 거야?”
“예. 그런데 던젤 님께서 손자분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자엘 룬을 떠나 계셔요.”
“하필이면 이때에…….”
무척이나 난감하다는 듯 예나스는 입술을 잘게 깨물며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기사단에 무슨 일이 생긴 듯했다. 아무렴 어때,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지. 그런데 어쩐지 다리 쪽이 축축한 것 같은데?
고개를 살짝 들어 보니…… 으악! 홍수다! 렌이 흘린 침이 바지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우왁!”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다리를 치우자 렌은 그대로 푹신한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곤 잠시 움찔거리나 싶더니 계속해서 잠을 청했다.
“때마침 일어났군.”
내 비명에 예나스는 내 쪽을 힐끗 돌아보며 중얼거리더니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렌을 쳐다보았다. 어? 그보다 때마침이라니? 뭘?
“렌은 아직 피곤할 테니 조금 더 자게 놔두지. 그보다 너, 몸은 어때.”
갑자기 날 걱정해 주는 건가? 아침에는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 기분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꽤 몸이 가벼웠다.
“많이 괜찮아졌어요.”
그 말에 예나스는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 뭐, 뭐지? 갑자기 알 수 없는 오한이 드는데.
“이틀 전에 도주한 마일론의 위치를 파악했다. 다시 놓치기 전에 체포할 거야.”
마일론에 대해 말하며 그녀는 마법 화살에 당한 어깨가 쓰린지 눈을 살짝 찌푸리곤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쉽게 당하지 않아. 장비들도 모두 챙기고 가는 거니 결코 놓치지 않을 거다.”
응? 장비라니? 전에 나를 추격할 때는 그다지 눈에 띄는 물건은 없었는데.
“잘됐네요. 반드시 체포할 수 있기를 바라죠.”
그런데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거야?
“그런데 전속 마법사인 던젤 님이 자릴 비우신 터라 곤란한 상황이야. 그러니 네가 같이 가 줘야겠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농담이겠지?
“제, 제가 왜요?”
“어차피 넌 한가하잖아.”
“그거야 맞기는 하지만…… 이 아니라!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요!”
그러자 예나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도리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쓸 만한 마법사를 새로 구하란 말이야? 그동안에 놓치고 말 거라고! 못미덥긴 해도 넌 던젤 님이 인정한 수준의 마법사니까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 아냐!”
제, 젠장! 이 상황에서 신경질을 부린게 누군데 이래?! 속으로는 반발심이 잔뜩 치밀어 올랐지만 예나스의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 뭐라고 대꾸를 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