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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7화)
Chap 2 소환 실패?(4)


노, 농담이 아닌가?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멀뚱히 앉아만 있자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너는 마일론과 상대해 본 적도 있으니 괜찮을 거야. 이번 한 번뿐인데 뭐 어때.”
이번 한 번으로 인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못 해 봤어요? 마일론이 바보가 아닌 이상 마법사인 나부터 해치우려 들 것이 뻔한데!
“정 마법사가 필요하면 마법 협회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잖아요.”
에? 내가 또 말실수를 한 건가? 순식간에 예나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 자식들이라면 말도 꺼내지 마.”
씹어 먹을 듯이 말하는 것을 보니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 같았다.
“왜요?”
“젠장, 린부르크의 악마 놈을 놓친 게 우리 기사단의 잘못이라잖아! 자기네가 제대로 지원만 해 줬으면 놓칠 일도 없었을 텐데! 아무튼 그것 때문에 왕창 싸운 참이라 도움을 요청해 봐야 한참이나 꾸물댈 게 분명해!”
또, 또 내가 문제인 거냐?! 치밀어 오르는 자괴감에 이마를 붙잡고 있자니 다리 쪽에서 뭔가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파르페!”
……아직까지 그 파르페를 먹는 꿈을 꾸고 있었던 거냐?
녀석은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눈으로 뭔가를 찾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 없네?”
파르페가 보이지 않는 것이 실망스러운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마, 침이나 닦아라.”
“엣?”
어이가 없어진 내가 입가를 가리키며 말하자 화들짝 놀란 렌이 그제야 손등으로 침을 닦았다.
“츄릅, 헤헤. 내가 깜빡 졸았나 보네.”
멋쩍은지 뒤통수를 긁적이던 렌은 예나스의 곁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어? 파르, 네가 여긴 웬일이야?”
그제야 자신을 발견한 것이 대견하다는 듯 파르라고 불린 여자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마일론의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것을 전해 드리러 왔어요.”
파르의 말에 렌은 언제 잠이 덜 깼었냐는 듯 눈을 번뜩였다. 내 어릴 적 친구 렌이 아닌 기사단의 부단장인 레이나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위 정보는 아니겠지. 정보가 사실이라면 놓치기 전에 추격해서 체포한다.”
으, 정말로 이 녀석은 이중인격이 아닐까?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렌의 말에 끼어든 것은 팔짱을 낀 채로 앉아 있던 예나스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던젤 님이 지금 자리를 비우셨어. 손자의 생일 때문에 자엘 룬을 떠나 계신대. 너도 알다시피 마법 협회와는 사이가 소원해져 버려서 마법사를 지원해 달라고 해도 잔챙이를 보내거나 한껏 늦장을 부릴 게 뻔하고.”
미안. 내가 제일 나쁜 놈이야. 내가 순순히 잡혀 줬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젠장,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그, 그런! 던젤 씨가 안 계시면 위험할 지도 모르는데.”
난감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렌의 모습을 보며 예나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못미덥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괜찮다는 흑마법사가 하나 있긴 한데 말이야.”
그, 그렇게 말하면서 어째서 나를 쳐다보는 건데? 아까는 별 볼일 없는 녀석이라고 하지 않았어?!
예나스의 말에 렌이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시안! 도와줄 거지?”
“도와주지 못한다는 건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
“응?”
저렇게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후…… 알았어.”
젠장, 나의 패배다. 내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힘없이 대꾸하자 렌은 환호성을 지르며 말했다.
“고마워! 다음에 파르페 사 줄게!”
야, 그건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건데? 그보다 먹을 걸로 보상하려 들다니, 내가 너 같은 줄 아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예나스가 입술의 한쪽만을 들어 올린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길, 계획대로인 거냐!
“내가 반드시 지켜 줄게!”
렌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잘됐잖아. 이번에 제대로 해 준다면 입단 테스트도 할 필요 없겠네. 지금 당장 출발할 거니 준비해.”
호오, 그 말은 내가 이번에 도움이 안 될 만한 행동을 하면 입단 제의가 없던 걸로 될 수도 있다는 걸로 들리는데? 후후후,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을 후회하게 해 주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나에게 예나스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물었다.
“그보다 너, 말은 탈 줄은 아냐?”
……에?



Chap 3 적과의 동침(1)


말이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동물이다. 마차를 끌게 해서 많은 짐을 나를 수도 있고 먼 거리를 급하게 갈 때 타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천부적인 소질을 지닌 것이 아닌 이상 말을 타려면 어느 정도의 훈련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때껏 스승님의 탑에서 마법만 배워 온 내가 말을 타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지.
“윽!”
꼬리뼈를 통해 생생히 느껴지는 말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말에 올라탄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음에도 말을 타는 것에 적응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 미안해! 좀 더 천천히 가면 조금이나마 편할 테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이해해 줘!”
고삐를 붙잡고 있던 렌이 내 신음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으으,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앞이나 제대로 봐 주겠어?
렌의 말은 두 명이나 태웠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주변의 다른 말들의 속도에 맞추어 힘껏 달리고 있었다. 하긴, 전신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가 타도 끄떡없는 군마니 나같이 비실비실한 마법사 하나 더 태운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
아무리 렌이 조심스레 말을 몬다고 하더라도 달리는 속도가 속도이다 보니 흔들림이 상당했다. 말이 달릴 때마다 내 몸은 허공으로 살짝 떠올랐다가 떨어졌고, 그때마다 꼬리뼈에 통증이 느껴졌다.
우욱, 게다가 속까지 울렁거리는 것 같아.
생전 처음 타 보는 것이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에 붙잡고 있던 렌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응? 그런데 고삐를 쥔 렌의 손이 가볍게 떨리는 것 같다.
“왜 그래? 어디 아파!?”
혹시나 제대로 들리지 않을까 싶어 몸을 바짝 기대고는 귓가에 대고 말하자 렌은 앞만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응? 이제 보니 얼굴이 새빨간데다가 귀까지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어디 많이 아픈 건가? 으, 만일 이러다가 달리는 도중에 렌이 정신을 잃기라도 한다면…….
“야, 세워!”
내 말에 깜짝 놀란 렌이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기자 우리가 타고 있던 백마는 가볍게 투레질을 하며 멈춰 섰다. 갑작스럽게 멈춰 선 터라 몸이 앞으로 쏠리는 바람에 렌의 작은 등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으윽.”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자 렌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고 있었다.
“무, 무슨 일 있어?”
나는 그 말에 대답해 주는 대신 녀석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예상대로 손바닥으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무슨 일이야?”
렌이 멈추자 주변에서 달리던 다른 사람들도 멈춰 선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단장인 알카네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렌이 열이 좀 있는 것 같아서요.”
알카네는 렌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기묘한 얼굴이 되었다.
“푸흡! 그럴 만도 하지.”
뭐야 저 태도는. 부하가 아프다는데 웃음이 나오는 거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듯한 알카네의 태도에 눈이 찌푸려졌다.
“아, 아냐! 그냥 말을 오래 타서 몸에 열이 오른 것뿐이야.”
어, 그럼 내가 착각한 건가? 타 보고 나서야 느낀 거지만 말을 타는 것이 겉으로는 편해 보여도 말을 몰아 달리는 것만으로도 꽤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손까지 떠는 것이 조금은 괴로워 보였는데.
알카네가 웃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나? 그럼 나만 바보 된 거잖아.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니 웃음을 짓고 있던 알카네가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날도 저물어 가니 저쪽의 공터에서 야영하도록 하자.”
고개를 들어 하늘의 올려다보니 조금씩 어둠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으, 낮에 출발했으니까 대체 몇 시간이나 말을 타고 달린 거야?
지금 있는 곳은 자엘 룬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름조차 모르는 숲 속이었다.
말에서 내리기 위해 낑낑대고 있자니 앞에 앉아 있던 렌이 훌쩍 뛰어 내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어, 어쩐지 이거 많이 한심한 것 같은데. 보통은 반대 아냐? 렌의 손을 잡고 간신히 말에서 내리니 알카네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식사는 간단하게 해결하고 일찍 자 둬.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한다. 렌은 잠시 나와 이야기 좀 하자.”
렌과 알카네가 대화를 하는 사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예나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예나스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뭔데?”
자신의 말에서 짐을 내리고 있던 예나스가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린 지금 자크 마일론을 잡으러 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인원만으로도 괜찮은 건가요?”
특급 수배범을 잡으러가는 것치고는 뭔가 단출하다.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알카네와 렌, 눈앞의 예나스와 공터의 중앙에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여기사, 그리고 나.
겨우 다섯 명으로 마일론을 붙잡는 것이 가능할까? 그게 가능하다면 애초에 그자가 잡히고도 남았겠지.
나의 걱정스런 물음에 예나스는 겨우 그게 걱정되었냐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나를 포함한 네 명은 우리 기사단에서 가장 강한 여자들이니까. 애초에 우르르 몰려가는 것보다는 소수 정예로 가는 것이 눈에도 안 띄고 좋아.”
하긴 아무리 둔해도 수십 명이 몰려가면 쉽게 눈치챌 것이다.
“네가 바보 같은 짓만 하지 않으면 별일 없을 테니 걱정 마. 놈을 상대할 비장의 무기도 준비해 왔으니 말이야.”
비장의 무기? 그게 뭐지? 그보단 나 지금 무시당한 건가?
내가 화를 낼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모닥불가에 털썩 앉은 그녀는 자신의 배낭에서 건량을 꺼내어 먹기 시작했다.
“드실래요? 제대로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가지고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요.”
“아, 고맙습니다.”
우물쭈물하며 서 있자니 모닥불을 피운 작은 체구의 여인이 다가와 마른 고기와 빵을 권했다. 이틀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던 데다가 깨어나자마자 이곳까지 끌려오느라 식사도 하지 못한 차였다. 배고픔이 극도로 치밀어 오른 상황에 육포건 뭐건 어떠랴. 배만 채우면 그만이지.
“그런데 저건 뭡니까?”
오는 내내 나의 궁금증을 유발한 것이 있었다. 그녀의 말에 매어져 있는 성인 남자 상체 정도 크기의 갈색 직사각형 상자. 뭐가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오는 내내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나서 자꾸만 신경이 쓰였었다. 혹시 저게 예나스가 말한 비장의 무기인가?
내가 가리킨 상자를 본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일이면 알게 되실 거예요.”
쳇, 그냥 알려 주면 어디 덧나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재미있게 여기는 듯했다.
파르마콘이라고 했었나? 아까 전에 병원에 마일론에 대한 것을 알리기 위해 왔던 기사였다. 참고로 파르라는 것은 렌이 파르페가 생각난다고 지은 애칭이란다. ……파르페 취급이라니. 조금은 불쌍하군. 안쓰럽게 쳐다보자 파르마콘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부단장을 잘 부탁드려요. 활발한 척, 강한 척하시지만 사실은 약한 분이에요.”
응?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알카네와 이야기를 마친 렌이 다가오자 그녀는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자리를 옮겼다.
“응? 파르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호기심에 가득 차선 물어오는 렌에게 나는 파르마콘에게 받은 먹을거리를 살짝 들어 보였다.
“부단장 친구라고 먹을 것도 챙겨 주더라.”
“에헴, 내가 좀 대단하지.”
렌은 옆구리에 손을 얹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내 옆에 앉아 자신의 건량을 꺼내어 먹기 시작했다.
받은 건량을 다 먹고서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세 사람은 담요를 꺼내어 잠자리를 마련하기…… 어?
달랑 스태프 하나만 들고서 따라온 내가 담요를 챙겨 왔을 리가 없잖아?! 설마 아무것도 없이 이대로 밤이슬을 맞으며 자야 한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