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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8화)
Chap 3 적과의 동침(2)


담요를 빌릴까 하는 생각에 렌을 쳐다보니 녀석도 나를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마른 고기 하나를 입에 물고 있던 렌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랐는지 움찔거렸다.
“주, 줄까?”
렌은 무척이나 아쉽다는 듯 떨리는 손으로 반쯤 먹고 있던 마른 고기를 권했다.
“……렌, 혹시 남는 담요 있어?”
“담요? 여분의 것은 챙겨 오지 못했는데…… 없어?”
그럼 있을 리가 있겠냐. 끄응, 혹시나 했는데. 다른 사람들을 봐도 여분의 담요가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이대로 자야겠네.”
가볍게 체념하고 중얼거리자 렌이 입 안의 건량을 우물우물 씹으며 걱정스레 말했다.
“하지만 담요도 없이 그냥 자면 감기 걸릴지도 몰라. 숲 속의 밤은 춥단 말이야.”
으, 숲 속의 밤이 치가 떨리게 춥다는 건 나도 잘 알지. 3개월 동안 쫓기면서 침대에서 자 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 말이야.
“괜찮아. 모닥불 근처에서 자면 되겠지, 뭐.”
“그래도 추울 텐데…….”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걸치고 있던 로브를 모닥불가에 깔고 누웠다.

그리고 몇 시간쯤 뒤.
“춥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요를 덮고 모로 누워 있던 렌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으으, 춥냐고? 무지 춥다! 나는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고 누운 여자들에게 내쫓겨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래였다. 누워 있는 것보다 무릎을 감싸 안고 있는 게 조금이나마 더 따뜻하니까.
제, 젠장. 뭐가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냐?! 그러기도 전에 내가 맞아 죽을걸! 아무리 나 외에는 전부 여자뿐이라고는 하지만, 모닥불 근처에도 못 오게 하다니 너무하잖아!
그 덕에 나는 얇은 로브 한 장에만 의지한 채 싸늘한 밤이슬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이러니 잠이 올 리가 있나.
“그럼 안 춥겠냐?”
치를 떨며 대꾸하자 렌은 헤헤 웃어 보였다. 밤사이에 몹시 추워진 탓인지 입을 열 때마다 입김이 보였다.
“여기는 따뜻한데.”
……지금 나 놀리는 거냐?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노려보자 렌은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시안, 같이 자자.”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계속 그러고 있다간 감기 걸려. 어릴 때도 같이 자곤 했잖아.”
녀석은 누운 채로 태연하게 말했다. 어릴 때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지금의 우리는 성인이라고!
“그거야 어릴 적의 이야기지! 그것도 네가 남자인 줄 알았을 때고!”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치자 렌은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인 남녀가 같은 담요를 덮고 잔다니. 너는 순수한 호의로 한 말이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추, 충분히 오해할 만한 소지가 크잖아!
“그래도 춥잖아.”
“쳇, 그랬다가 아침에 내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내가 너한테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다고 의심할지도 모르잖아.”
아까 전에 내가 모닥불에서 쫓겨난 것도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잖아!
“시안은 안 그럴 거잖아. 친구인데 뭐 어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잘 설명해 줄게.”
으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게다가 렌의 말대로 엄청나게 춥기도 하고.
“그, 그럼 부탁 좀 할게.”
제발 아침에 일어났을 때 끔찍한 누명을 쓰지 않도록 좀 해 다오. 아무 걱정 말라는 듯 헤실헤실 웃는 렌의 모습이 어쩐지 믿음이 안 가기는 하지만,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처지에 뭘 따지랴.
렌이 살짝 들어 올린 담요 아래로 재빨리 들어가 눕자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녹이는 듯했다. 으, 이제야 살 것 같네.
내가 렌의 잠자리에 들어오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파르마콘이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모습은 상당히 오해받기 좋은 장면이지? 내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뭐지? 괜찮다는 건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허리를 감싸 오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으, 으악?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낯선 감각에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큰 소리를 냈다간 예나스나 알카네가 깰 거라는 생각에 애써 소리를 낮추었다.
“헤헤, 시안 몸이 너무 차갑잖아. 원래 추울 때는 꼬옥 껴안고 있으면 따뜻해진대.”
렌은 태연하게 웃으며 더욱더 몸을 밀착시켰다. 물론 추울 때는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는 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지금 그럴 것까지는 없잖아!
“야! 나도 남자라고! 이,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너무 무방비하다고! 렌을 떼어 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 내 몸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더해졌다.
컥! 수, 숨이 막힌다. 갑작스러운 압박에 몸이 놀란 것인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힘겹게 뒤를 돌아보자 렌이 뾰로통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할 거야?”
“아, 안 할게요.”
내가 저항을 포기하자 렌은 그제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며 헤헤 웃었다.
“아유, 착하다.”
윽, 힘이 약한 내가 참을 수밖에 없지.
그래도 추위에 벌벌 떨다가 따뜻한 곳에 몸을 누이자 졸음이 몰려왔다. 흐릿해지는 생각 사이로 희미하게 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안이라면 그래도 상관없는데…….”
으? 응? 방금 뭔가 엄청나게 무서운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게다가 뭔가 내가 잊고 있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갑자기 불안해진다. 이대로 자면 안 돼. 안…… 돼…… 돼…….

끄응, 뭔가 몹시 불편하다. 뭔가 알 수 없는 불쾌한 기분에 천천히 잠에서 깨어 눈을 떠 보니…… 어라?
“설명해 봐라.”
“켁!”
머리 바로 위에 쪼그려 앉은 예나스가 싸늘한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바로 눈앞에 얼굴이 보이고, 게다가 새벽녘이라 피부색이 푸르스름하게 비쳐 보였다. 이건…… 솔직히 무섭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설명해 보라니, 대체 뭘? 내가 아무런 대답도 않고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리자 그녀는 눈을 살짝 찡그리더니 내 옆을 향해 눈짓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 거람?
고개를 돌려 보니 렌이 바로 옆에 누워 있었다. 물론 함께 잠들었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어, 어째서 옷깃이 풀어 헤쳐져 있는 건데? 게다가 나한테 찰싹 들러붙어 있는 채로!? 반쯤 풀어 헤쳐진 옷 사이로 렌의 속살이 언뜻 보였다.
당황함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니 예나스가 대충 짐작하겠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일어나라. 다른 단원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로군.”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간 맞을 것만 같아서 나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 이거 잠이 확 깨는군. 나라는 생체 난로가 일어나자 담요 안으로 찬바람이 들어가서인지 렌은 몸을 움츠렸다.
“우웅, 추워어.”
아니, 추우면 어째서 옷을 풀어 헤치면서 자는 건데? 그, 그러고 보니 분명히 렌의 잠버릇이…….
잠들기 전에 느꼈던 불안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나와 렌은 형제가 없기 때문에 이따금 서로의 집에서 같이 자곤 했었다. 분명 그때는 어렸던데다가 녀석이 남자인 줄로 알고 있었으니까. 뭐, 렌과 내가 같이 자곤 했던 것도 아홉 살까지였다. 발렌트 아저씨가 ‘이제는 애가 아니니 혼자서 잘 줄도 알아야지!’라고 하셨기 때문인데, 아마도 렌의 몸이 점점 자라는데다가 렌의 잠버릇 때문에 불안해지신 거겠지.
아무튼, 렌의 잠버릇은 그때 알게 된 것이었다.
렌은 잠잘 때마다 몹시도 뒤척거린다. 그러면서 옷이 갑갑한지 자기도 모르게 옷을 반쯤 풀어 헤친다.
그, 그걸 잊고 있었다니.
당황해서 주변을 살피니 렌의 옷깃을 여며 주던 예나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자, 지금부터 말을 해 보실까. 제대로 된 변명이 나오지 않는다면 네 녀석이 렌에게 이상한 마음을 먹고서 어떻게 하려고 했던 것으로 간주하겠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데!
공포에 떨고 있는 나를 보며 예나스는 손가락 마디를 꺾어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러려고 한 거였다면 렌을 위해서라도 네 녀석을 이 자리에서 단단히 교육시켜 주지, 후후.”
아,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시거든요? 렌이 깨어나서 해명을 해 주면 좋겠지만 녀석은 담요를 꼭 붙잡은 채 세상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다.
“아, 저기, 그게, 그러니까…….”
잔뜩 당황한 내가 손짓발짓 다 해 가며 황급히 해명을 하려고 하자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예나스가 갑자기 피식 하고 웃었다.
“농담이야. 파르마콘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으니 그렇게까지 겁먹을 필요 없어. 렌의 잠버릇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뭐야? 그럼 지금까지 날 놀린 거란 말이야!
조금 떨어진 곳에 깨어 있던 파르마콘이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웃음을 가라앉힌 예나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앞으론 조심해 줬으면 해. 아무리 어릴 적 친구라지만 지금의 렌은 한 기사단의 부단장이니까. 우리들끼리만 있을 때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선 특히 조심해 줘.”
틀린 말은 아니었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너무나도 많은 것이 바뀐 것 같아 씁쓸했다. 조심하겠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 당신도 그 부단장에게 함부로 렌이라고 부르잖아? 평단원이 부단장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되는 건가?
추운지 자꾸 뒤척이는 렌에게 담요 한 장을 더 덮어 주는 모습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스가 렌을 대하는 태도는 단원이 부단장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언니가 동생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렌 녀석, 좋은 언니를 얻었군. 어릴 때는 자기는 왜 형제가 없냐고 징징거렸는데 말이야.
……나도 그 옆에서 같이 징징거렸었다. 돌아온 것은 새빨갛게 물든 아주머니의 얼굴과 ‘허허, 녀석! 힘써 보마!’하고 등을 팡팡 두드린 아저씨의 손이었지. 으음, 지금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만…… 흠흠.
“네가 쓸 물품은 다음에 구해 줄 테니 이번만 참아. 오늘이면 마일론이 있다는 아일렌에 도착하니까.”
당연히 참는 건 이번 한 번뿐이지. 이번에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기만 하면 기사단의 전속 마법사로 영입하겠다는 생각은 탁! 하고 접게 해 줄 테니!
수도인 자엘 룬의 한복판에서 소란을 피우고 사라진 배덕의 마법사. 자크 마일론은 자엘 룬에서 하루 정도 떨어진 아일렌이라는 작은 영지에 있다고 했다. 어째서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를 추적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깨어난 지라 조금 남아 있는 졸음 때문에 하품이 자꾸만 나왔다.
“잠이 덜 깼으면 저쪽 냇가에 가서 세수라도 하고 와. 곧 출발할 준비를 할 거니까.”
쳇, 조금 정도는 더 눈을 붙이고 있을까 했는데. 저렇게 말하면 그럴 수도 없잖아. 머리를 긁적이며 예나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말대로 조금 걷자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싸늘한 새벽 공기를 그대로 맞으며 걸어왔더니…… 자, 잠이 다 깨 버렸어.
흐르는 물속에 손을 살짝 담가 보니 손이 아릴 정도로 차가웠다. 자다 일어난 탓인지 목도 몹시 마르다. ……그냥 물만 마시고 갈까?
물이나 떠 마시기 위해 허리를 숙이려는 순간, 맞은편의 수풀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서, 설마 맹수? 아니면 몬스터? 긴장해서 허리를 숙이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데 수풀 사이에서 찡그린 표정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엥? 이런 숲 속에, 그것도 새벽에 웬 여자아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긴장이 풀려서인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어, 어라?”
내가 들어도 한심한 비명과 함께 나는 반쯤 숙인 자세 그대로 냇물에 넘어지고 말았다.
풍덩!
으악! 이건 차가워도 너무 차갑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곱게 세수를 할 걸!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고 오르는 차가움에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서자 맞은편에 나타난 소녀가 그제야 나를 발견한 듯 쳐다보았다.
이제 겨우 열넷 정도가 되었을까?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진한 붉은 색의 머리칼이 가장 눈에 띄었다. 체구에 비해 몹시 헐렁한 로브를 걸치고 있는 소녀는 ‘저 바보는 대체 뭐야?’라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안녕.”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 보이자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며 냇물을 건너왔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냇물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박찰박 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길 잃은 거야?”
아니, 상식적으로 나보다는 네가 더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냥 세수를 하러 온 건데…….”
“세수가 좀 독특하네.”
응, 독특하지. 옷 입고 물속에 빠지는 걸로 세수를 하는 건 나밖에 없을걸.
물에 빠진 생쥐와도 같은 내 꼴이 재미있는지 소녀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지금 내가 웃기다 이거냐? 이게 누구 때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