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도망 못 쳐 1(9화)
Chap 3 적과의 동침(3)


몸을 부르르 떠는 내 옆을 지나치려던 소녀는 뭔가를 떠올렸는지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이렇게 생긴 녀석 못 봤어?”
손가락으로 눈초리와 입 끝을 잡아당기며 누군가의 흉내를 내는 듯했다. 그렇게 해 봐야 내가 알 리가 없잖아.
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멀뚱하게 서 있자 자신의 행동이 뻘쭘했는지 소녀는 이내 얼굴에서 손을 내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모르나 보네. 멍청한 일행이 갑자기 사라져서 찾던 길이었거든. 아무튼 재미난 걸 보여 줘서 고마웠어.”
재미난 거라는 건 나의 독특한 세수겠지. 으으, 되도록 빨리 잊어 줬으면 하는데.
그나저나 일행이라는 사람이 굉장히 무책임하다. 이런 숲 속에 어린아이 혼자만 두고 사라지다니.
“어라?”
아이의 일행을 함께 찾아줄 요량으로 뒤돌아보았지만 어느새 소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가 버린 건가. 뭐,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지. 그보다 돌아가서 옷을 말리던가 해야겠어. 몸이 으슬으슬 떨려 오는 게 서두르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겠는걸.
머리를 흔들어 물기를 대충이나마 털어 낸 나는 왔던 길을 따라 공터로 돌아갔다.
“뭐냐? 그 꼴은? 분명히 세수하러 간 줄 알았는데.”
마른 빵 조각을 입에 물고 있던 예나스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발이 미끄러졌어요.”
힘없이 대답하자 예나스는 입에 물고 있던 빵 조각을 떨어트릴 정도로 큰 웃음을 터트렸다.
젠장! 웃지만 말고 닦을 거라도 달란 말이야! 하지만 깔깔대며 웃어 대는 모습을 보니 기대하지 않는 게 나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갈아입을 옷도 챙겨 오지 못했다. 일행이 죄다 여자다 보니 옷을 빌릴 수도 없고 말이야. 별수 없지. 일단은 대충 닦고서 아일렌에 도착할 때까진 참는 수밖에.
곤란함에 눈만 찡그리고 있는데 렌이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잠에 취해서 걷는 렌의 모습은 저러다 넘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였다.
“좋은 아침.”
작게 하품을 하며 웅얼거리는 듯한 어조로 인사한 렌은 예나스의 옆에 쪼그려 앉고는 익숙하다는 듯 건네주는 빵을 받아 들었다.
뭐랄까, 반쯤 졸면서도 입 안의 빵을 오물거리는 걸 보니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그, 그런데…… 어째 잠결에 먹는 것치고는 좀 많다?
“엣취!”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더니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으윽, 이러다 정말 감기라도 걸릴 것 같은데? 물에 젖은 채로 아침의 쌀쌀한 바람을 계속 맞았더니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갑작스러운 재채기 소리에 화들짝 놀랐는지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렌이 눈을 번쩍 떴다.
“어라?”
눈앞에 내가 있는 것이 놀라운 듯했다. 설마 먹을 것을 들고 있던 예나스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게냐!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 정말.
“앗?! 대단해! 온몸이 다 젖었잖아? 안 추워?”
내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런 물음이 나와? 너라면 안 춥겠냐! 그런데 대체 뭐가 대단하단 거야? 설마 내가 맨 정신으로 옷 입고 냉수마찰이라도 했겠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렌은 자신의 잠자리로 달려가더니 수건과 담요를 가져왔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고 담요를 몸에 걸치고선 렌과 함께 모닥불가에 앉았다. 모닥불의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자 차갑게 굳었던 몸이 흐물흐물하게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배고프다.”
“조금 전에 빵 먹었잖아.”
“응? 언제? 기억이 없는데.”
렌은 조금 전 잠결에 빵을 먹었던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배고프다며 칭얼거렸다.
쳇,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나 닦고 말하란 말이야. 혀를 차며 녀석의 입가를 닦아 주려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렌에게 가져가던 손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자 알카네가 서 있었다.
“렌, 지금 출발할 테니 출발 준비를 해.”
“아, 네!”
렌은 근처에 매어 둔 자신의 말을 향해 허겁지겁 뛰어갔다. 그런데 알카네는 무슨 용건이 남았는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무슨 일인가 싶어 올려다보며 묻자 그녀는 조금은 고민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마일론과 상대한 적이 있었지? 이번에도 그의 마법을 막을 수 있겠어?”
켁, 이게 무슨 소리람. 그의 마법을 막아 낸 것도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내가 그 이후에 반쯤 죽었던 걸 잊은 건가?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온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때 만약 조금만 실수했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을 터였다.
“후우,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나.”
새하얗게 질린 내 표정을 보고선 대답을 짐작했는지 알카네는 무거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쩐지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견제 정도는 할 수 있을 겁니다.”
헉, 내가 무슨 말을. 최대한 한심한 꼴을 보여서 입단제의를 없던 일로 해야 하는데!
“그래? 다행이군.”
가볍게 놀란 기색을 띠던 알카네는 옅은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추격을 눈치채기 전에 아일렌에 도착해야 하니 서둘러.”
파르마콘과 예나스는 이미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채 각자의 말에 올라타고 있었다.
아, 아니, 잠깐. 방금 전의 말이 바보 같은 헛소리였다는 걸 말해야 하는데!
“시안! 어서 타.”
어느새 자신의 말을 몰고 온 렌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넌 그 사이에 또 뭘 먹고 있는 거냐. 렌은 잠결에 빵 서너 개를 해치워 놓고도 또 하나의 빵을 입에 물고 있었다.
“시안, 안 탈 거야? 단장님이 늦장 부린다고 혼낼지도 모른단 말이야.”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내가 이상했던지 렌이 채근했다. 으으, 내 꼬리뼈야. 미안하지만 오늘만 견뎌 다오.
내가 손을 잡고 오르자 렌의 백마는 가볍게 투레질했다. 인마, 칙칙한 사내놈을 태우는 게 기분 나쁘겠지만 나도 좋아서 너를 타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시안, 단장님이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내가 알카네와 이야기 하는 것을 본 듯했다.
“마일론의 마법을 막아 달라기에 견제 정도는 해 보겠다고 했지, 뭐.”
제길, 내가 왜 욱해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거지? ‘사실 전 예나스가 말한 대로 별 볼일 없는 녀석이니 그런 건 무리입니다’라고 했어야 하는 건데!
“정말…… 괜찮겠어?”
잠시 뜸을 들이던 렌이 말했다. 뒤돌아보지 않은 탓에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잔뜩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뭐가?”
“저번에 우리를 구하려 마일론의 마법을 막았다가 다쳤었잖아.”
녀석, 아직도 그때의 일을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건가. 나를 걱정하는 렌의 진심이 느껴져서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하핫, 걱정하지 마. 설마 무슨 일이야 생기겠어? 이번엔 기사단이 준비를 단단히 해서 가는 거니 별 탈 없겠지.”
제발 그래 줬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해서 저번엔 정말 운이 좋았던 거다. 금지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나는 마일론의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설령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를 막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마일론의 마법에 끼어들었을 때를 생각하니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아, 이건 조금 전에 물에 빠진 것 때문에 추워서 그런 건가.
“응, 모두들 시안을 열심히 보호해 줄 테니까. 그때와 같은 일은 없을 거야.”
“출발한다!”
자신의 말에 올라탄 알카네가 힘껏 소리치며 말에 박차를 가하자 다른 세 마리의 말도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지켜 줄게.”
응? 뭐라고? 잘 안 들려. 워낙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한 말이라 렌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 아무것도 아냐!”
어째선지 화들짝 놀란 듯한 렌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치더니 박차를 가해 앞서 나가는 알카네의 말을 뒤쫓았다.



Chap 4 자존심의 문제(1)


젠장, 아일렌에 들어오기 전부터 머리가 띵하고 몸이 나른했다. 아무래도 아침에 냇물에 빠진 것 때문에 몸살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거기다가 몇 시간 동안이나 말 위에서 시달렸으니 앓아눕는 것이 당연하지.
“시안, 많이 아파? 약이라도 사 올까?”
그래도 걱정해 주는 건 렌밖에 없군. 가벼운 두통에 표정을 찡그리자 렌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음,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뭐야? 아픈 거야? 조금은 도움이 될까 싶어서 데려왔더니 이래서야 오히려 방해만 되잖아.”
옆에 서 있던 예나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젠장! 누가 댁들을 따라오겠다고 했냐고! 애초에 끌고 온 건 당신이잖아!
“그냥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에요. 그보다 이제 어쩔 거죠?”
붉은 장미는 꽤 이름이 알려진 기사단이니 영주성에서 편하게 머무를 수도 있었지만 혹시나 마일론이 눈치를 채고 도주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따라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인원도 기껏해야 다섯 명뿐이니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여행자 무리로 보일 터였다.
창가에 서서 바깥을 지켜보고 있던 알카네가 근처의 의자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기다린다. 아직 그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작전을 개시한다.”
섣불리 달려들지는 않겠다는 건가? 하긴, 평범한 범죄자가 아닌 특급 수배범이니 행동 하나에도 조심하는 게 당연하겠지.
“예나스, 현장 지원은?”
“근방의 기사단들은 모두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우리 힘만으로 상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나스의 대답에 알카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일론이 바보가 아닌 이상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영지에 있을 리가 없지.
“별수 없군, 놈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일렌의 경비대와 자경단에게 주변의 통제를 맡긴다. 마일론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여관에 묵고 있으니 들키지 않도록 모두들 행동에 조심하는 것 잊지 말고.”
그 무시무시한 자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말에 조금 전까지 태연히 앉아 있던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자, 그럼 그동안 조금이나마 쉬어 둬. 마일론 정도의 마법사를 상대하는 일은 만만치 않을 테니까.”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정신이 어두운 암흑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자러 가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촉매제를 구하는 것.
사흘 전에 허공에 흩어진 것을 마지막으로 수중에는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리 ‘별 도움이 안 될 짓을 해서 입단 제의를 접게 해 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지만 아무것도 않고 멍하니 있을 수는 없지. 저번엔 운이 좋아서 그냥 넘어갔다지만 이번에 잘못되면 나와 렌을 비롯한 사람들이 크게 다칠지도 모르니까.
오는 동안 생각해 봤는데, 내 마법으로 그를 견제하는 것은 역시 무리야. 믿을 수 있는 건 소환 마법뿐인데…… 그런데 큰 문제가 있다.
“저기, 잠시 어디를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각자의 방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려던 그녀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왜?”
푹 쉬지도 못하고 아침부터 계속 말을 달려온 참이라 그런지 예나스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제 주특기는 소환 마법이거든요. 그런데 소환 마법에는 촉매제가 필요한데…….”
어쩐지 위협적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어째선지 존댓말이야?!
“그래서 지금 난데없이 마법 강의를 하려는 건 아닐 테고, 용건이 뭐야?”
……시답잖은 이유로 멈춰 세운 것이라면 가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지난번에 마일론을 만났을 때 촉매제를 다 써 버려서 새로 사야 해요.”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예나스의 모습에 깜짝 놀라 대답하자 의자에 앉아 있던 알카네가 가볍게 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왜 그렇게 어렵게 하는 거야? 근처에 마법 협회의 지부가 있으니 다녀오도록 해. 하지만 혹시나 다른 사람의 눈에 띌지도 모르니 뒷문을 통해서 조심해서 다녀오고.”
“저기, 그게…… 사흘 전에 돈도 잃어버렸…….”
잠시 동안의 미묘한 침묵.
방 안에 있던 여자들이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큭, 애초에 당신들을 도와주러 가다가 잃어버린 거라고!
“시, 시안! 그런 거라면 내가 빌려……!”
“잠깐.”
돈을 빌려 주겠다고 나서려는 렌의 말을 잘라먹은 것은 예나스였다. 언제 짜증을 내고 있었냐는 듯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는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