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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10화)
Chap 4 자존심의 문제(2)
“돈 필요하지?”
어, 어쩐지 뭔가 불안한데? 두려움에 떨고 있자 예나스는 앉아서 구경하고 있는 알카네의 곁으로 가더니 귓속말로 뭐라 속삭였다.
뭐라고 말했는지는 몰라도 귓속말을 들은 알카네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우리가 내 주도록 하지.”
기사단의 돈으로 사 주겠단 건가? 하긴, 어차피 내가 촉매제를 사려는 것도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 그러는 게 당연하긴 하지. 그런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내 착각인가?
알카네의 말에 고맙다고 말하며 방을 나가려는데 예나스가 내 뒷덜미를 홱! 붙들었다. 켁!
“이봐, 잠깐만. 이대로 가서 대금은 붉은 장미 기사단에 청구하라고 하면 협회의 마법사들이 ‘드,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 아차. 나 혼자 협회의 지부에 가 봐야 정신 나간 놈이란 소리만 듣고 쫓겨날 게 뻔하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쯧쯧 차던 예나스가 옆에 멀뚱히 서 있던 렌의 등을 떠밀었다.
“부단장이 붉은 장미의 인장을 가지고 있으니까 함께 가면 될 거야. 혹시나 다른 사람 눈에 띌지도 모르니까 뒷문을 통해서 다녀오도록 해. 아참, 영수증 받아 오는 것 잊지 마라.”
거참, 깐깐하기는. 누가 공무원 아니랄까 봐.
“가자, 렌.”
“으, 응? 응!”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던 렌은 내가 부르자 그제야 허둥지둥 뒤를 따라왔다.
“내가 돈 빌려 주려고 했는데.”
여관을 나선 직후 렌이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래도 기사단에서 대신 내 준다니 괜찮잖아.”
그럼, 빌리는 것보다야 공짜가 훨씬 낫지…… 그런데 마법 협회의 지부가 어디에 있지? 위치를 물어보는 것을 깜빡해 버렸다니.
“렌, 마법 협회 지부가 어디 있…….”
나는 뒤를 졸졸 따라오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렌을 보고서 뒤늦게 뭔가를 떠올렸다.
이 녀석 엄청난 길치였지…….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물어볼까? 으음, 그러면 보나마나 예나스 그 여자가 엄청난 기세로 깔깔대며 웃을 것 같은데. 어쩐지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니 일단은 혼자의 힘으로 마법 협회 지부를 찾아보자.
일단 마법 협회의 지부인 만큼 각종 마법 장비나 마법의 흔적이 많겠지? 마나가 가장 집중된 곳을 향해 가면…… 응?
“시안, 여기는 왜 온 거야?”
등 뒤에서 의아해하며 쳐다보는 시선이 엄청나게 부담스럽다. 부, 분명히 마나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방향으로 왔는데 어째서 난데없이 막다른 길이 나온 거지?
“이, 이쪽인가?”
나는 머쓱함을 감추기 위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방향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또 한참 뒤.
“시안, 이러다 늦으면 예나스 언니가 혼낼 거야.”
등 뒤에서 칭얼거리는 렌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지럽게 날아와 박힌다. 여관을 나선 지 거의 30분이 지났는데도 또 막다른 길이라니. 분명히 마나의 흐름이 이쪽이라고 알려 주고 있는데! 내 마법사로서의 재능은 여기까지란 말인가!
“우리 저기 있는 마법사 협회 지부로 가던 길 아니었어? 다른 곳으로 갈 거야?”
뒤돌아보니 렌이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는…… [마법사 협회 아일렌 지부]라는 간판이 커다랗게 내걸린 건물이 보였다.
“그, 그냥 주변을 돌아보고 싶어서.”
신이시여. 전 방금 살아가는 의미 하나를 심하게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나는 렌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카운터에 앉아 있던 젊은 마법사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며 쳐다보았다.
“중급 촉매제 두 주머니를 사려고 합니다.”
예전에 내가 지니고 다니던 것은 순도가 낮은 하급 촉매제. 그것도 돈이 얼마 없는 나로서는 애지중지하던 것이었다. 쓰던 것보다 순도가 높은데다가 하나도 아닌 두 주머니나 되는 분량! 적어도 한 주머니 이상은 남을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내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니니까. 뭐,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해 주겠어!
“중급이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법 협회의 젊은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운터 뒤의 진열대를 뒤적이더니 묵직한 가죽 주머니 두 개를 꺼내 왔다.
“대금은 붉은 장미 기사단으로 청구해 주세요.”
렌이 검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내밀며 말하자 마법 협회의 마법사는 수도에 있어야 할 붉은 장미 기사단이라는 말에 조금은 미심쩍은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곧 카운터에서 꺼낸 손바닥 크기의 메달을 반지에 가져다 대었다.
호오, 기사단의 인장에 저런 용도가 있었구나. 반지를 위조한다고 하더라도 인장에 걸린 마법이 발동되지 않으면 금방 들통 나겠는데?
“인식을 완료했습니다. 청구서는 한 달 안에 갈 겁니다.”
렌의 반지가 가짜가 아님을 확인한 협회의 마법사가 촉매제를 건네주었다. 후후, 허리춤의 가방에서 느껴지는 촉매제의 무게감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더 필요한 거라도 있어?”
협회의 마법사에게서 영수증을 받아든 렌이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물었다.
“아냐, 이거면 충분해. 빨리 돌아가자.”
바보처럼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두고서 헤매느라 한참 늦었으니 예나스에게 또 한소리 듣겠지. 그런데 어째서 그 여자는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람?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애초에 이런 곳까지 데려오지 않으면 그만이잖아?
그, 그러고 보니 언젠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까칠하게 구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예나스가 혹시…… 음, 어쩐지 상상만으로도 무서우니 그만두자.
조금은 무서운 상상과 늦은 것에 대한 질책을 예상하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여관을 얼마 앞두지 않았을 때 누군가가 가볍게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긴장이 가득한 얼굴의 알카네가 서 있었다.
혹시 늦은 것 때문에 찾으러 온 건가?
“안 그래도 서둘러서 돌아가던…….”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 렌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의 뒤로 가볍게 눈짓했다. 조심스레 알카네의 뒤를 힐끗 살피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자가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번과 달리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그가 마일론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요?”
렌도 그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자연스럽게 뒤돌아서며 묻자 알카네가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찾아봐.”
주변을 자세히 살피니 거리에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 마일론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특히 파르마콘은 오늘이면 알게 될 거라던 상자를 등에 메고 있었다.
“아일렌의 경비대가 주변 정리를 마치는 순간 작전을 개시한다.”
알카네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렌은 허리춤에 매어 둔 검의 손잡이를 조심스레 매만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난 제대로 쉬지도 못했단 말이야. 여관에 돌아가서 좀 쉬다 나오면 안 되나?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은 네가 나설 일도 없을 테니까. 나와 렌의 곁에 붙어 다니도록 해.”
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 긴장한 탓이라고 여긴 것인지 알카네가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마일론은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대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겉으로는 전혀 위협적인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가 후드를 벗지 않는 이상 길거리에 넘쳐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특급 수배범 중 한 명이라고 생각조차 못할 듯했다.
여기서 마일론의 정체가 드러나면 어떻게 될까.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도망치는 사람들로 인해 엉망이 되겠지. 그 틈에 마일론은 사라질지도 모르고. 도망치는 마일론을 붙잡기 위해 무리해서 공격했다간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어째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길거리에서 마일론을 잡으려는 거지? 혹시나 모를 소란이 걱정되어 알카네를 힐끗 쳐다보니 그녀는 작게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 그녀는 눈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넘쳐나는 사람들 중 몇몇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게 거리의 사람들을 조금씩 뒤로 빼내는 것이 보였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대기 중이던 아일렌의 경비대겠지. 알카네가 말한 주변 정리라는 게 이런 거였나?
그렇게 점점 거리에 사람이 줄어들더니 이내 한산해졌다. 거리에 남은 것은 몇몇 민간인들을 제외한 기사단원들과 마일론뿐이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마일론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알카네에게서 날카로운 고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이다!”
아직 거리에는 민간인들이 남아 있어서 전투를 벌인다면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알카네는 마일론과 뒤에서 걷고 있던 파르마콘의 사이가 깨끗하게 뚫린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했다.
차르륵!
파르마콘이 던진 손가락 두께의 사슬이 마일론의 몸을 칭칭 옭아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마일론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마법을 시전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다. 그와 동시에 파르마콘이 손에 힘을 주자 검은색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마일론의 몸이 비틀거렸다.
“허튼 생각은 마십시오. 이건 봉쇄의 사슬입니다.”
“음, 과연 그렇군.”
마나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음을 눈치챈 마일론이 표정을 가볍게 찡그리며 몸에서 힘을 뺐다.
봉쇄의 사슬이라니! 그거 분명히 닿는 모든 것들의 마나를 동결시켜 버리는 마법 무구잖아? 나를 추적할 때 저걸 들고 오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다. 그랬다면 나는 꼼짝없이 잡혔을 테니까. 저 마일론도 꼼짝없이 잡히는데 나라고 별수 있겠어?
마일론이 중얼거리는 사이 옆에 있던 렌이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모두 이곳에서 피하시기 바랍니다! 이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
거리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사람들마저 경비대의 인솔을 따라 대피하자 마일론은 완벽하게 포위된 형국이었다.
뭐야, 내가 나설 만한 일은 완전히 없겠는걸? 아, 이렇게 되면 촉매제 두 주머니는 온전히 내가 다 가지는 건가? 푸하핫.
“그런데 내 뒤를 어떻게 쫓은 건가?”
봉쇄의 사슬이 몸을 포박하고, 예나스가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상황임에도 그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알카네는 품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병 속에는 녹색의 광택이 나는 작은 벌레가 더듬이를 거칠게 흔들고 있었다.
“허, 추적 벌레인가. 하지만 어느 틈에?”
그건 나도 궁금하다. 마일론쯤 되는 자라면 추적을 따돌리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을 텐데.
“아직도 내가 한심한 물음을 했다고 생각하나?”
렌이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이를 갈았다.
응? 왜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영문도 몰라 하고 있는데 마일론은 렌의 얼굴을 잊지 않고 있었는지 가볍게 표정을 굳혔다.
“흐음, 쓸데없는 말은 한 건 나였던 건가. 그때의 그 물음으로 내 주의를 흐트러트리고 그사이에 추적 벌레를 붙인 거로군.”
조금 놀랐다는 듯 중얼거리듯이 말하던 마일론은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의 말을 무시했다거나 도중에 알아차렸다면 분명히 그때 자네가 위험해졌을 텐데?”
아니, 애초에 그러지 않았어도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에 렌은 전혀 흔들림 없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에 내가 죽었더라도 내 동료들이 복수를 해 줄 거라는 것을 믿으니까.”
자신이 속한 기사단에 대한 굳은 믿음. 어쩐지 입 안이 씁쓸해지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렌과 붉은 장미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의 레이나 사이에 격차가 벌어져 간다. 어릴 적의 녀석은 몹시 겁이 많고 여린 녀석이었는데…… 10년이라는 세월의 단절이 커다란 벽이 되어 놓여 있음을 자꾸만 실감하게 된다.
그때 마일론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어? 웃어? 지금 이 상황에?
“알려 줘서 고맙군. 앞으로는 추적 벌레에 대해서 조심하도록 하지.”
“앞으로?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당신은 곧장 황천길에 들어갈 테니까.”
너무나도 담담한 그의 태도가 언짢았는지 알카네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적어도 재판 정도는 받게 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비롯한 특급 수배범들은 이미 판결이 내려진 지 오래야. 잡히는 즉시 저승으로 보내는 걸로 말이지.”
뭐, 뭣?! 재판도 못 받는다고? 그, 그럼 나도 잡히자마자 죽여 버린다는 거야?
만일 잡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에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데 마일론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랬었나. 여태껏 모르고 있었군. 좋은 것을 알려 준 답례로 나도 뭔가 가르쳐 주도록 하지.”
……조금 전까지의 미소를 짓고 있던 것은 허세로 취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웃음까지 터트리는 건 뭔가 불안한데?
“뭐?”
뭔가 낌새가 이상한 것을 알아챘는지 알카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