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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11화)
Chap 4 자존심의 문제(3)


마일론은 씨익 웃었다. 하지만 두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다음부터 위험한 적을 붙잡게 되거든 오늘처럼 친절히 대해 주지 말게.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게 좋을 거야. 뭐, 자네들에게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는 걸까? 마일론의 말에 알카네가 눈을 잔뜩 찌푸리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주변을 통제하고 있던 경비대에서 피 보라가 치솟고 있었다. 천천히 쓰러지는 경비대원들의 뒤로 피를 뒤집어쓴 사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나타났다. 그의 모습에 마일론은 한숨을 내쉬듯 작게 말했다.
“내가 동료가 없다고 한 적은 없다네. 뭐, 자네들처럼 친절한 친구는 아니지만 말일세.”
갑자기 나타난 보라색 머리의 사내는 건들거리는 태도로 마일론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꽤 한심한 상황인데 그래? 도와줄까?”
실실 웃으며 소리친 사내의 말에 마일론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꽤 늦었군.”
“흥, 약속한 날짜에 맞춰서 나온 당신이 바보인 거지. 이삼 일 정도는 늦어도 괜찮잖아?”
“핏빛 귀신, 스타스 케일린…….”
새로이 나타난 사내의 정체를 알아챈 렌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핏빛 귀신이라면 나도 들어 본 적 있다.
특급 수배범들 중에서도 세 번째로 높은 현상금이 책정되어 있는 자다. 적의 피를 뒤집어쓰고 날뛰는 그를 도저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가 없어서 핏빛 귀신이라고 불리게 된 자.
“모두 도망쳐라!”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알카네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것이 즐거운지 스타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경비대원들을 가볍게 웃으며 쳐다보고는 손에 쥔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핏빛을 띤 대검이다.
“거기 그 노땅을 풀어 줬으면 하는데 말야. 뭐, 풀어 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다 죽여 버릴 거지만.”
경비대원들의 피를 뒤집어쓴 그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선혈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치밀어 올랐다. 어째서 사람을 죽이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 아니, 저건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 같잖아!
“예나스 씨, 혹시 저 사람을 상대할 만한 장비도 들고 왔나요?”
장비도 챙기고 가는 거니 결코 놓치지 않을 거라던 예나스의 말에 일말의 희망을 걸며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딴 더러운 상황은 생각도 안 해 봤어.”
하긴 특급 수배범들이 팀을 이뤄 함께 행동하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알카네는 지금의 황당한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는 듯 표정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마일론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예나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음, 조금은 따갑군.”
담담한 목소리로 엄살을 피우는 마일론의 목에 가는 실선이 그어지더니 피 몇 방울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네놈이 마일론을 구하러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바빠서 말이야. 순순히 꺼지지 않는다면 마일론의 목을 잘라 주지. 물론 네놈은 다음에 잡아서 비명굴에 처넣어 줄 테니 안심하고 꺼져.”
확실히 지금은 우리가 유리하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타스는 마일론을 구하러 온 상황, 우리가 마일론을 붙잡고 있는 한은 함부로 공격…….
“말했잖아, 풀어 주지 않아도 다 죽여 버린다고. 아, 그 노땅을 풀어 주라고 해 본 건 그냥 형식적으로 해 본 말이야. 뭐, 죽일 거면 그동안 기다려 줄 테니 후딱 베어 버려.”
하, 할지도?
혹시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닐까 해서 쳐다보니 스타스는 정말로 태연하게 웃으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우리가 오히려 불리한 건가? 마일론을 구하러 온 게 아니었어?
알카네를 비롯한 렌과 예나스, 파르마콘도 황당한 표정으로 마일론과 스타스를 번갈아 보았다. 당사자인 마일론만이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가볍게 찼다.
“깜빡했군. 나에게도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아, 아니, 아저씨. 이건 친절하고 말고의 수준을 뛰어넘어서 말이죠. 혹시 애초에 동료가 아니라 적이라든가 그런 것 아닙니까?!
마일론은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고 있는 검날 같은 것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지 태연하게 알카네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나를 풀어 준다면 저 친구를 잘 타일러서 자네들을 곱게 돌려보내 주도록 하지.”
“흥! 노땅! 내가 당신 말 같은 걸 들을 것 같아? 난 지금 저 예쁜이들의 피 맛은 어떨지 엄청나게 궁금하다고!”
마일론의 제안에 스타스는 웃기지 말라는 듯 소리치며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알카네를 비롯한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그 소름끼치는 시선에 알카네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두 명의 특급 수배범은 기사단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게다가 마일론이 제안을 하는 것도 초조하거나 절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전투 준비. 파르마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일론을 놓치지 마라.”
으아악, 진짜로 화난 것 같은데. 정말로 저 핏빛 귀신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거야? 알카네는 싸늘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 말에 파르마콘은 마일론을 옭아맨 봉쇄의 사슬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르릉.
곁에 있는 렌과 알카네가 검을 뽑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린다. 그리고 알카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안, 우리가 상대하는 동안 마법이나 소환수로 놈의 발을 묶어 줘.”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촉매제를 꺼내려 하는데 뒤에서 마일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내 제안을 거절할 셈인가?”
……애초에 자엘 룬의 수도에서 마구 날뛰는 걸로 모자라 마신의 숨결까지 쓰려고 한 사람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알카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타스에게 검을 겨누었다.
“우리가 악과 타협한다면, 죄 없는 자는 그 누가 지킨단 말이냐.”
결연한 알카네의 말에 마일론은 ‘음, 그런가.’ 하고 작게 중얼거렸고 스타스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난 너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그러니 가장 마지막에 최대한 멋지게 죽여 주겠어!”
미쳤어, 확실히 저자는 미쳤어. 절로 눈이 찡그려진다. 스타스는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자신에게 검을 겨눈 세 여자를 즐겁다는 듯 하나하나 쳐다보고 있었다.
“자매들이여, 가자!”
더 이상은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알카네가 검을 높이 치켜든 채로 뛰쳐나갔다.
“시안, 부탁할게.”
곁에 서 있던 렌이 조금은 걱정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이내 알카네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젠장, 어째서 이렇게 된 거야? 그냥 마일론의 말대로 그냥 보내 줘도 되는 것 아냐?
나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저 바보 같은 렌이 있는 이상 그럴 수도 없다. 지금 상황에서는 기사단을 도와서 스타스를 제압하는 수밖에 없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특급 수배범으로서 이 여자들에게 쫓기던 내가 다른 특급 수배범을 잡는 데 협력하고 있다니…….
“야, 바보같이 서 있지 말고 뭐라도 해.”
예나스가 곁을 지나가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쳇, 말하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다고!
나는 조금 전에 마법 협회의 지부에서 사 온 촉매제를 바닥에 뿌렸다. 알카네가 말한 대로 스타스의 발을 묶을 만한 녀석이 있지.
마나를 배열하는 것과 동시에 알카네와 스타스의 검이 부딪쳤다. 스타스가 검을 힘껏 쳐올리자 힘에서 밀린 알카네가 뒤로 한 걸음 밀려났다. 하지만 그 빈틈을 노리지 않고 스타스는 그대로 지나쳐 갔다.
“말했잖아! 넌 가장 마지막에 죽여 주겠어! 부하들이 모두 죽고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말이야!”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광기가 묻어나오는 듯하다. 즐겁다는 듯 소리치며 지나친 스타스를 가로막은 것은 알카네의 뒤를 따라 달려온 렌의 싸늘한 목소리.
“그 전에 죽여 주지.”
스팟!
휘두르는 검이 표정만큼이나 매섭다.
렌이 휘두른 검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언젠가 내 목을 베어 버릴 뻔한 적이 있던 오러였다. 제아무리 특급 수배범으로 악명 높은 스타스라고 하더라도 오러를 앞에 두고는 여유 부리지 못하겠지!
“오, 제법인데.”
……그래, 오러에 주눅이 들 정도라면 지금까지 체포되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렇게 따지자면 내가 체포되지 않은 게 더 신기할 정도다.
그와 동시에 진한 핏빛을 띤 스타스의 검에서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 내린다.
그가 귀신이라고 불리게 된 또 다른 이유이자 살육에 미친 버서커 정도로 그쳤을 스타스를 특급 수배범이라는 자리에까지 끌어올린 마검. 검에서 피어나온 기운은 천천히 무언가의 형상으로 변해 갔다.
한 자루의 대검에서 태어난 저주받은 마물 듀발람이 스타스의 어깨 너머로 천천히 드러나고 있었다.
유령? 아니, 이미 그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니었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것은 이마를 뚫고 솟아난 두 개의 뿔.
허리 아래로는 흐릿한 연기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그 위로는 몹시 선명했다. 앙상하게 비쩍 마른 몸은 검신과 같은 피부색이었고 텅 비어 있는 눈구멍에서는 끊임없이 검게 썩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간의 증오와 원한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끊임없이 피를 갈구하는 저주받은 검령.
스타스를 포위한 세 사람도 듀발람의 현신에 흠칫했는지 섣불리 공격을 할 생각을 못하는 듯했다.
순간, 팔을 축 늘어트리고 있던 듀발람이 손을 천천히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것은 눈이 없음이 분명한데도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스타스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무심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보랏빛의 눈동자에는 걷잡을 수 없는 광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뭐야, 마법사가 있었나? 듀발람, 저 녀석부터 맛보라는 거냐?”
검이 마주치는 소음 속에서도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제기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나 배열이 끝나는데!
“루시안을 보호해!”
스타스와 듀발람의 시선이 향한 곳이 나라는 것을 눈치챈 알카네가 소리쳤다.
근처에 있던 예나스가 입술을 깨물며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곤 곧장 달려오는 스타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부웅!
베었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 그는 이미 예나스의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사람이 저렇게 높이 날 수 있는 거야? 허공에 뜬 스타스와 나의 거리는 어느새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거리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아, 너 그거 아냐? 마법사의 피는 엄청나게 달콤하거든. 아무래도 몸에 가득한 마나 때문일까?”
아,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봐야 내가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마법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지. 맛있으니까.”
“시안!”
렌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듯 나를 부르는 것이 들렸다.
기사단은 죽인다고 소리치며 나를 쫓아오기는 했지만 적어도 생포하는 것을 우선으로 했었다. 하지만 저자는 죽이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검붉은 핏빛을 띤 마검이 바로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공포 때문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이거? 설마 나 여기서 죽는 거야? 이렇게 허무하게?
‘도와줄까?’
머릿속을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앞을 보니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가녀린 손이 쑤욱!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허공을 종잇장처럼 찢으며 튀어나온 손은 전혀 망설이는 기색 없이 듀발람을 붙잡았다.
“시안!”
멀리서 보기에는 내가 두려움에 정신이 나가서 검을 향해 손을 뻗은 것으로 보였는지 렌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체중까지 실어 내려친 공격이다. 게다가 마검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검날은 보는 것만으로도 살 떨릴 정도로 날카롭기 그지없다.
정상적이라면 팔이 통째로 잘리는 것은 물론이고 내 몸 또한 두 쪽으로 갈라져야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이 팔의 주인은 전혀 평범하지가 않거든.
“……뭐지?”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던 스타스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단단히 붙잡힌 듀발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는데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스타스의 어깨 뒤에 보이는 듀발람의 검령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신을 방해한 것에 대한 분노인가?
아니다, 검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듀발람은 공포에 질린 거다. 자신보다 더 강하고 짙은 마기를 뿜어내는 마족의 존재감에.
듀발람의 검신을 잡아 쥔 손등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 일전에 나의 손등에 새겨졌던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레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