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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12화)
Chap 4 자존심의 문제(4)
‘듣도 보도 못한 잡종 주제에 어디서 반항을 하는 거야? 신속히 찌그러지란 말이다!’
찌그러지면 찌그러지는 거지 신속히 찌그러지라는 건 대체 뭐야? 그보다 어째서 소리를 치냐! 머리가 울리잖아!
레즈나가 귀찮다는 듯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뭔가가 번쩍하더니 듀발람과 함께 스타스의 몸이 튕겨 나갔다.
‘이 정도면 됐지? 계약자를 어이없이 잃는 것은 사절이니까 다음부터 위험하면 네가 나를 불러. 계약자의 요청 없이 이쪽으로 건너오는 건 금지 사항이란 말이야.’
조금은 피곤하다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 튀어나와 있던 레즈나의 팔이 공간의 틈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너 이 새끼…… 방금 그거 뭐야!”
레즈나의 힘에 의해 튕겨 나갔던 스타스가 벌떡 일어서며 나를 노려보았다.
바, 방금 뿌드득 하는 잇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 아니, 그건 저도 잘…….”
으악! 할 거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냐, 레즈나! 구해 준 건 고마운데 저렇게 열 받게 만들고 돌아가 버리면 나더러 어쩌라고!
듀발람 또한 조금 전까지 자신의 압도하던 존재감이 사라지자 더욱 흉흉한 기세를 흩뿌리며 스타스를 재촉했다.
“……흥, 어차피 죽여 버리면 상관없겠지.”
스타스는 이번에는 제대로 죽여주겠다는 듯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다시 다가왔다.
큭. 이제 소환진을 활성화시키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기에는 나와 스타스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웠다. 게다가 두려움으로 힘이 빠진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야아!”
그때 예나스가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는 듯 우렁찬 기합 소리를 터트리며 스타스의 등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쳇, 기다리고 있으면 죽여 줄 테니 너무 보채지 말라고!”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함께 그가 몸을 돌리며 듀발람을 횡으로 휘둘렀다.
부웅!
그와 동시에 옆에서 몰래 다가온 알카네가 그의 드러난 등을 노려 기습했다. 아무리 악명이 높은 그라도 기사단장 급의 기습은 얕볼 수 없었는지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그렇지만 기습으로 일순간 우세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말 그대로 잠시뿐, 시간이 갈수록 알카네가 점점 밀리는 것이 보였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게 예나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예나스가 내 멱살을 움켜잡으며 일으켜 세웠다.
“젠장,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데려왔더니 잔뜩 쫄아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고 말이야! 방해되니까 비켜, 이 바보야!”
그녀는 손에 힘을 주어 나를 밀쳐 내고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알카네에게 가세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뭐야, 이거? 애초에 누구는 이런 일에 끼어들고 싶어서 온 건줄 알아?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끌고 온 건 당신이잖아! 아무리 애초에 도움이 될 만한 행동은 안 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조금 열 받는데?
나름대로 위험하니 물러서라는 것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속에서는 울컥하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멀리서 나를 지켜보던 렌이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스타스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젠장, 너도 내가 방해만 된다고 느끼는 거냐?
“쳇, 기사단이라는 녀석들이 다구리나 놓고 말이야. 재미가 없잖아.”
스타스는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만방자한 그의 말에 주변을 둘러싼 세 사람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주변의 살기가 짙어지건 말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 정도 죽여 놓으면 더 재미있어지려나?
“이 새끼가!”
자신들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듯한 말에 분노한 예나스의 검이 스타스의 심장 위를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알카네와 렌의 검이 머리와 다리를 노렸다.
어느 하나라도 급소를 노리지 않는 공격이 없었다. 스타스를 생포하는 것이 무리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는 사람으로서는 피하기조차 어려워 보이는 공격임에도 스타스는 전혀 피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기분이 나쁘다는 듯 눈을 찡그릴 뿐.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버럭 소리친 그는 듀발람을 아래에서 위로 반원을 그리듯 쳐올렸다.
채채챙!
그리고 합공을 했던 세 사람이 뒤로 밀려났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자리에 멈춰 선 예나스가 얼얼한 손에 애써 힘을 주며 투덜거렸다. 단순히 밀리기만 한 게 아니라 손목이 얼얼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녀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스타스는 낄낄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붙잡겠다고? 단단히 준비를 한 기사단들조차 해내지 못한 것을 겨우 너희 셋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가 지닌 자신감의 근원은 수많은 추격자들을 물리치며 얻은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 분명 그는 수많은 기사단이 공동으로 추격해도 붙잡지 못한 위험인물이었다.
“못 하라는 법도 없지.”
알카네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스타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으나 어느새 분위기는 스타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싸움에는 기세라는 것이 있다.
분위기에서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실력이 비슷하더라도 지고 만다. 더욱 끔찍하게도 상대는 이쪽보다 훨씬 강한데다가 마검의 힘조차 제대로 끌어 올리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분명히 필패. 그리고 스타스가 말한 대로 죽임을 당하겠지.
젠장, 뭣 때문에 저렇게 필사적인 거야? 차라리 도망친다거나 해 버리면 되는 거잖아!
“저 노땅에 대해서는 준비를 잘해 온 것 같지만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잖아? 뭘 믿고 그렇게 나서는 거지?”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아무리 봐도 단 한 사람인 스타스보다도 렌을 포함한 세 사람이 더욱 불리해 보였다. 상관들의 위험을 느낀 것인지 마일론을 붙잡고 있던 파르마콘이 당장이라도 끼어들 듯 움찔거렸으나 알카네가 내린 명령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쪽의 일에 있어서는 문외한인 나마저도 확실하게 느낄 정도인데 어째서 저 여자들은 물러서지 않는 거냐고! 이런 상황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비난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단 말이야!
예나스를 비롯한 기사들은 스타스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물음에 입을 굳게 다문 채 검을 겨눌 뿐이었다. 그 모습에 스타스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쳇,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모양이군. 전혀 사랑스럽지가 않잖아. 재미없어졌어.”
김이 빠졌다는 듯 무감각하게 중얼거리며 스타스는 듀발람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이제 그만 끝내자.”
“모두 뒤로 물러나!”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알카네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으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스타스가 머리 위로 치켜든 듀발람을 사선으로 크게 휘두르며 몸을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듀발람에서 흘러나오던 어두운 기운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크윽!”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그녀들이 피를 뱉어 내며 튕겨나갔다.
방금 그건 대체 뭐지? 듀발람도, 흘러나온 기운에도 닿지 않았는데?
“파동을 읽어서 공간을 뛰어넘는다. 멋지지?”
그러고 보니 스타스를 상대하던 자들이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쓰러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웃기지 마.”
듀발람의 기운에 의해 튕겨나갔던 알카네가 몸을 일으키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당당한 말에 비해 그녀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으나 듀발람의 마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간 탓에 쉽게 일어설 수가 없었다.
“호오, 일어나려고? 이 녀석의 마기에 당하면 한동안은 숨 쉬는 것조차도 힘들 텐데.”
털썩.
그와 동시에 바닥에 쓰러진 예나스가 숨이 막히는지 컥컥거리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 의지가 가상하니 아까 전에 말한 약속은 지켜 주도록 하지. 끝까지 기다리고 있어.”
윙크를 해 보인 스타스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가장 가까운 곳에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검을 겨누었다.
“젠장.”
자신을 내려다보는 스타스의 시선에 호흡을 가다듬던 예나스가 입술을 악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만둬!”
알카네가 발악하듯 소리치며 스타스를 막으려 했으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는 그의 행동을 막기 역부족이었다.
“싫어.”
알카네의 외침에 가볍게 대꾸한 스타스가 예나스의 심장 부근을 찔렀다.
그리고 곧, 분노에 찬 듀발람의 울부짖음이 퍼져 나갔다.
― 크허어어엉!
듀발람이 꿰뚫은 것은 예나스의 몸이 아니라 검은색의 두터운 식물의 줄기. 그 자리에 있던 예나스는 줄기의 끝에 감겨 다른 곳으로 밀려났다.
쳇, 저 여자는 솔직히 도와주기 싫었는데. 하지만 예나스마저 당하고 나면 스타스를 쓰러트릴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니까…….
근데 저 여자는 도움을 받아 놓고도 왜 원통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는 거야? 무시하던 나에게 도움을 받은 게 그렇게 기분이 나쁜가?
“이 자식…… 명을 재촉하는구나.”
자신을 방해한 것이 나의 개입이라는 것을 안 스타스가 분노로 몸을 잘게 떨었다.
그가 듀발람을 치켜들자 검은 마기가 검신을 따라 치솟았다. 또다시 ‘파동’을 사용하려는 듯했다.
어차피 도망가기도 이미 그른 상황. 비록 10위이긴 하지만 나도 특급 수배범에 오른 몸이니 쉽게 당하지는 않겠어!
스타스가 듀발람을 내려치기도 전에 그의 발밑이 쩍! 하고 갈라지며 예나스를 구했던 식물의 줄기가 수도 없이 치솟았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인 것도 잠시, 어느새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식물의 줄기로 가득 뒤덮였다.
“끝이 아니야!”
만약 여기서 스타스가 빠져나오기라도 한다면 난 분명히 살해당할 거다. 적어도 기사단이 몸을 추스를 때까지만이라도 놈의 발을 묶어 놔야 했다.
쩍 갈라져 있던 땅이 푹 꺼지며 아래에서 무언가가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올라와 자신의 줄기와 스타스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육식 식물 케이그아.
꽃봉오리 안쪽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빼곡히 박혀 있으며 자신의 줄기로 먹잇감을 휘감아서 잡아먹는 위험한 몬스터다.
케이그아는 꽃봉오리(라고 하기에는 뭔가 위화감이 들지만)를 움직여 입 안에 들어온 것을 씹으려 들었다.
그 순간, 꽃봉오리가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위험을 느낀 케이그아는 입 안에 든 것을 내뱉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그아의 꽃은 체액을 흩뿌리며 폭발했다. 스타스가 입 안에서 파동을 마구 쏟아 낸 듯싶었다. 아무리 위험한 몬스터라고 해도 마검의 주인에게는 한낱 식물일 뿐이었나?
‘끼에에에엑―!’
케이그아 최후의 비명이 머릿속을 내 가득 채웠다. 머릿속을 울리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날카로운 고성이었다.
크윽. 소환수의 죽음은 마법사에게는 엄청난 타격을 준다. 죽는 순간의 사념과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 머릿속으로 가득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이긴 하지만 고통마저도.
머리가 폭발할 듯한 충격에 눈앞이 흐릿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으려는 나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흐릿한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스타스가 뺨에 묻은 케이그아의 체액을 혀로 핥으며 내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주방장. 맛이 없잖아.”
먹으라고 준 것도 아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세 번이나 이 자식에게 붙잡히니 이젠 별로 무섭지도 않다. 하지만 죽기는 싫은데…….
레즈나를 불러야 하나? 하지만 그러면 렌을 비롯한 모두에게 내 정체가 들켜 버린다.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목을 조이는 힘도 조금씩 강해져 갔다.
듀발람과 같은 대검을 한 손으로 휘둘러대는 힘이라면 나의 힘없는 목뼈쯤이야 단번에 꺾어 버릴 수도 있을 거다. 개자식, 최대한 괴롭게 죽이겠다는 거냐?
“레, 레즈…….”
목이 졸려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름을 완벽하게 불러야 레즈나를 이쪽으로 불러올 수 있는데. 이러다 정말 죽어 버릴 거야. 레즈나는 이미 한 번 계약자의 요청 없이 살짝이나마 건너 왔기 때문에 많은 힘을 소모한 터라 조금 전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나를 도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