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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13화)
Chap 4 자존심의 문제(5)
안 그래도 흐릿한 시야가 점점 어두워진다. 이제는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때 어둠 속으로 잠겨드는 나의 정신을 붙잡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마일론! 아까 전에 한 말은 잊지 않았겠지?”
렌, 너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둠 속에서 주변의 소리만이 울리듯이 들려온다.
“렌! 지금 이 상황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설마!”
뒤이어 들려온 것은 경악과 분노가 섞인 알카네의 외침.
돌아가는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스타스의 헛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목을 잡아 쥔 손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살기 위해 숨을 급히 들이마시자 히익 하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어둡던 시야가 조금씩 제 빛을 찾아 갔다.
렌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사슬에 꽁꽁 묶여 있는 마일론을 다급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알카네는 단호한 표정으로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음, 무슨 약속 말인가?”
마일론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렌의 말에 되물었다. 그 모습에 스타스는 나를 죽이려던 것도 잊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하, 뭐야. 이제 와서 뭘 하려는 거야? 아니면 순순히 항복할 테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
비아냥거리는 그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렌은 마일론에게 외쳤다.
“풀어 주면 조용히 물러나겠다고 한 약속 말이다!”
아까 전에 자신이 한 말을 들먹이는 렌의 말에 마일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상황이 불리해지니 마음이 바뀐 건가? 내가 왜 그래야만 하지?”
어, 틀린 말은 아니지.
마일론의 당연한 지적에 렌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시안이 죽는다면 당신도 죽을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파르마콘이 자신의 검을 마일론의 목에 겨누었다. 그 모습을 보고 파르마콘이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눈치챈 알카네가 탄식을 흘렸다.
“으음, 그렇군. 아직 죽고 싶지는 않으니 아까 말한 대로 저 친구를 데리고 그냥 돌아가 주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마일론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발끈한 스타스가 버럭 소리쳤다.
“뭐?! 웃기지 마! 내가 왜 댁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
“그야 내가 죽으면 나를 구하지 못한 자네에게 실망할 분이 있기 때문이지.”
실망할 분이라는 게 누군지는 몰라도 그 말에 스타스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스타스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 배후라는 건가?
“쳇.”
작게 혀를 찬 스타스가 내 목을 움켜잡고 있던 손을 뗐다. 허공에 몸이 들려 있던 나는 그대로 딱딱한 바닥에 널브러졌다.
“큭!”
내가 풀려난 것을 확인한 렌은 파르마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카네와 예나스는 애써 잡은 마일론을 풀어 줘야 한다는 사실에 애써 시선을 돌렸다. 알카네는 주먹을 쥔 손에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파르마콘에게 풀어 주지 말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도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파르마콘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힘없이 봉쇄의 사슬을 풀었다. 풀려난 마일론은 가벼운 걸음으로 렌에게 다가왔다.
“범죄자의 말은 믿을 게 안 된다네.”
이런, 젠장! 마지막 희망마저도 사라져 버린 건가?
네 사람의 얼굴에는 절망이 떠올랐고 스타스의 얼굴에는 희열이 떠올랐다. 이젠 어떻게 되어 버려도 상관없어. 레즈나를 부른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빌어먹을 두 놈을 박살 내고 도망쳐 버리겠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일론이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저 친구는 나로서도 관심이 가던 차야. 금지된 마법을 방해하고도 살아남은 건 처음이니까.”
그 말에 스타스는 표정을 찡그리더니 홱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마일론은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설마 또 쫓기게 되는 건가?
“다음에 또 보세.”
마일론과 스타스가 완전히 사라지자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던 예나스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욕설을 토해 내며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젠장! 젠장! 젠장!”
그녀의 자학적인 행동에도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다들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같은 심정일 테지.
그때 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서 있는 알카네에게 다가갔다.
“단장님…… 이번 일에 대해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알카네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엘 룬으로 돌아간다.”
“단장님! 마일론을 풀어 준 것은 저이니, 저 역시…….”
렌에게 모든 분노가 향할까 걱정한 것인지 파르마콘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그러자 알카네는 고개를 숙인 채로 힘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면서 이야기하자. 지금은 쉬고 싶어.”
그 말에 파르마콘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힘없이 널브러져 있던 나를 부축하려는 듯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다 뭔가를 눈치챘는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저기…… 뼈가 부러진 것 같은데요.”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대로 내 오른팔을 내려다보니, 팔뚝이 보랏빛으로 퉁퉁 부어 가고 있었다.
“그런 같…… 어라?”
순간 머리가 어질하더니 땅바닥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바닥과 몸이 부딪치는 둔탁한 충격을 느끼기 전에 다행히도 내 몸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앗! 루시안 씨의 몸이 불덩이에요!”
깜짝 놀란 파르마콘의 외침이 귓가에 흐릿하게 들린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몸에 힘이 안 들어가…….
Chap 5 마족의 싸움(1)
덜커덩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어쩐지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이 베개는 왜 이리 불편한 거야?
잠결에 베개를 바로잡으려고 왼손을 가져가 만지작거렸다. 응? 어쩐지 베개치고는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있고 따뜻한 것 같다. 뭔가 이상한 기분에 눈을 살며시 떠보니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힌 렌이 내려다보고 있다.
“이, 일어났어?”
어째서 눈앞에 렌의 얼굴이 보이는 거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베고 있던 베개에 손을 가져가자 렌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가 더욱 진해졌다.
“그만 좀 만지작거리지 그래.”
예나스의 불편한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맞은편에는 알카네와 예나스, 파르마콘이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는 다리를 다소곳하게 모은 렌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설마, 나 지금까지 베개라고 생각한 건 렌의 허벅지였던 거야?
“아, 아니,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잠결에…… 윽!”
해명을 하려 팔을 내젓는데 오른팔이 욱신거렸다. 스타스가 거세게 내던졌을 때 다친 오른쪽 팔뚝에는 부목이 단단히 매어져 있었다.
신음 소리에 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금만 간 거야. 한동안 조심만 하면 될 거래. 그런데…….”
그런데? 어쩐지 렌의 표정이 조금은 화난 것 같아 보이는데. 내 착각인가?
“어째서 바보처럼 무리한 거야? 쓰러지기나 하고! 바보!”
엥? 갑자기 이게 뭔 뜬금없는 소리래?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자 예나스가 투덜거리며 끼어들었다.
“이 마차도 네 녀석 때문에 빌린 거다. 겨우 몸살 정도로 볼썽사납게 기절이나 하고 말이야. 네 녀석의 열이 내려가길 기다리느라 거기서 하룻밤이나 더 지냈다고.”
아, 그러고 보니 나 기절했었지. 아침부터 차가운 물에 빠진데다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다가 스타스 때문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했으니까. 긴장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피로가 축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하룻밤을 거기서 지낸 것 가지고 화를 내다니. 하긴, 그런 일도 있었으니 아일렌에 더 머무르는 게 껄끄러웠을 테지.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가 무리해서 쓰러진 것도 다 댁들이 억지로 끌고 와서 그런 거잖아!
“다 왔네.”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알카네가 툭 내뱉듯이 말하자 다른 세 사람의 표정이 가볍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마일론을 멋대로 풀어 준 것에 대한 처벌은 가는 길에 이야기 하겠다고 했었지. 잔뜩 긴장한 렌과 파르마콘의 얼굴을 봐선 아직 알카네가 결정을 내리진 않은 것 같은데.
작게 한숨을 내쉰 알카네가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바라보자 파르마콘과 렌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쯤은 나도 아니까. 렌이 하지 않았다면 결국은 내가 그런 명령을 내렸을 거야.”
음? 그냥 넘어가려는 건가?
그녀의 말에 렌과 파르마콘의 표정이 눈이 띌 정도로 환해졌다. 두 사람의 모습에 알카네는 작은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하라는 의미로 삼 개월간 감봉에 처하겠어.”
오,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 이거 꽤 신기한데. 하지만 이내 알카네의 웃음이 전염되듯 풀이 죽어 있던 렌과 파르마콘도 마주 웃어 보였다.
생각보다 낮은 처벌에 굳어 있던 분위기가 천천히 풀어졌다. 나를 구하기 위해 알카네의 말을 무시하고 마일론을 풀어 주라고 한 렌이 무거운 처벌을 받을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마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끴쉬는시작했다. 그러곤 이내 자엘 룬의 중심가에서 꽤 떨어진 한적한 곳에 세워진 2층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긴 분명히 닷새 전에 분수대에서 재회했을 때 렌이 소개시켜 줄 사람들이 있다며 끌고 왔던 붉은 장미 기사단의 본거지. 어, 어쩐지 뭔가 많이 불안하다……?
“아! 도착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잘게 떠는 사이 렌 녀석은 신이 나서 마차 문을 열더니 폴짝 뛰어내렸다. 돌아온 것이 그렇게도 좋은가?
“렌, 난 이만 가 볼게.”
“응? 버, 벌써 가려고?”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린 내가 작별 인사를 하려 하자 렌이 아쉬움과 약간의 불안이 깃든 표정으로 되물었다. 녀석도 본능적으로 느끼는 건가? 내가 떠나 버릴 생각이라는 걸.
으으, 역시 더 이상 나와 렌이 엮이는 건 위험해. 내가 특급 수배범이고 렌이 기사라는 문제도 있지만, 계속 있다간 녀석의 일에 휩쓸려서 내가 죽을지도 몰라!
“그럼 모두들 다음에 봐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무언가가 뒷덜미를 강하게 잡아챘다.
컥!
며칠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호흡 곤란을 느끼며 힘겹게 뒤를 돌아보니 예나스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무, 무슨 일…….”
“어딜 가려고?”
예, 곧장 이 도시를 뜰 생각입니다. 하고 말할 수는 없잖아!
“아! 너무 피곤해서 이만 가서 쉬려고요.”
순식간에 이런 변명을 생각 해내다니. 난 역시 천재인가? 어라, 그런데 어쩐지…… 예나스의 표정이 이상한데.
“어디서 쉴 건데?”
“그야 여관에서…….”
“돈 잃어버렸다며.”
아차!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던 예나스가 툭 내뱉은 말에 지금의 내 사정을 깨달았다. 얼마 들어 있지도 않은 돈주머니를 잃어버렸으니 여관은커녕 노숙을 해야 할 처지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왠지 모를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렌이 먹잇감을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단장, 남는 방 있죠?”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묻는 렌의 말에 알카네는 잠시 멀뚱히 서 있다가 씨익 웃었다.
“음, 아마 한 개 정도 있을걸.”
“잘됐다. 한동안 거기서 지내면 되겠네요.”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파르마콘이 타들어 가는 내 속도 모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젠장, 나더러 사자 소굴로 제 발로 들어가라고?
“아, 아니, 역시 그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사양하겠습니다.”
애써 용기를 내어 말하자 렌은 금세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내 말에 알카네와 예나스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뭐지, 이 알 수 없는 불안함은?
“폐를 끼치다니, 기사단에 들어온 이상 한가족이나 다름없는데. 그렇죠, 단장?”
“응, 물론이지.”
자, 잠깐만.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난 기사단에 입단하겠다는 말 같은 건 한 적도 없다고!
“아니, 나는 기사단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그딴 말 한 적 없어! 라고 외치려는데 예나스가 종이쪼가리 하나를 불쑥 꺼냈다.
어라, 저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저걸 어디서 봤더라?
“중급 촉매제 두 주머니에 삼천 실링이라. 뭐야, 이거 왜 이리 비싸? 우리 기사단의 두 달치 봉급이랑 맞먹잖아?”
그래! 저건 촉매제를 사고 받았던 영수증! ……음.
“그런데 갑자기 영수증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