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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14화)
Chap 5 마족의 싸움(2)


설마, 아니겠지. 이름 높은 기사단에서 그런 뒷골목 왈패들이나 쓸 만한 방법을 쓰진 않겠지, 하하.
“몸으로 갚아.”
정말로 해 버렸다! 몸으로 갚으라니! 어, 어쩐지 뭔가 불순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그건 대신 내 준다고 한 거잖아요.”
“대신 내 준다고 했지 공짜라는 말은 안 했잖아.”
…….
“삼천 실링이니까 두 달 정도 기사단에서 일하면 되겠네.”
두, 두 달씩이나? 댁들이랑 엮인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두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아냐, 어차피 렌이 사 주려고 했었지? 렌에게 돈을 빌려서 갚으면 기사단에서 일해서 갚으라는 말을 안 들어도 될 거야.
“렌……!”
“나, 날씨가 좋네?”
어째서 시선을 피하는 거냐! 렌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으윽,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예나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알카네가 끼어들었다.
휴, 다행이다. 단장이 직접 말리면 예나스도 더 이상 좀 전과 같은 억지는 부리지 못하겠지.
“조금 전에 감봉에 처한다고 했으니까 세 달을 일해야지.”
……뭐야? 감봉을 하는 대상에 나도 포함된 거였어?!
“아차, 그걸 깜빡했네. 루시안, 들었지? 세 달만 무급으로 일하면 너도 월급을 받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는 거라고. 기쁘지? 견습으로 일한다고 생각해. 물론 숙식도 무료라고!”
전혀요. 돈을 받고 일한다는 건 좋지만 왜 하필 나를 지옥에 처넣지 못해서 안달이던 댁들의 밑으로 들어가야 하냐고. 좋은 거라고는 숙식 제공뿐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제 의견은 들어 보지도 않는 겁니까?”
흥,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방법이 있다. 아무리 억지로 잡아 두려고 해도 내가 달아나면 그만이잖아. 운이 좋아서 3개월이나 기사단들의 추격에서 도망친 게 아니라고!
“그래? 네 의견은 뭔데. 아참, 그거 알지? 이대로 사라지면 선불로 받은 삼 개월치의 봉급에 대한 것에 대한 배임과 횡령 혐의로 수배령이 떨어질 거라는 거.”
혀, 협박이냐? 린부르크의 악마로 쫓길 때는 얼굴이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간신히 도망칠 수나 있었지만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채로 수배를 받게 된다면 발 뻗고 잘 수조차 없게 될 텐데!
젠장, 그래도 당신의 협박에 내가 굴할 것 같아?!
나는 그녀의 말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소리쳤다.
“반드시 단원이 되고 싶다는 겁니다!”
헉! 또 입이 배신을 했어.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해버리다니!
본능적으로 대답을 해 버린 나의 바보 같은 입을 원망하는 사이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챘다.
“빨리 들어가자. 시안이 쓸 방으로 안내해 줄게.”
아니, 잠깐만! 난 전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렌은 잔뜩 들떠서는 내 손을 단단히 잡고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힘에서 이길 수 없는 나는 질질 끌리듯이 기사단의 건물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여기사 네 명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라기에는 건물과 연무장의 규모가 꽤 컸다. 나름대로 왕실 소속의 기사단이기에 여기 있는 네 사람을 제외한 단원들 대부분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모두 모이면 스무 명이 넘으니까.
“어라, 누가 돌아온 건가?”
질질 끌려가는 불쌍한 내 모습을 보고 웃으며 들어서던 예나스가 불이 켜져 있는 건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환하겠다는 연락은 전혀 없었는데…….”
영문을 모르는 것은 알카네도 마찬가지였는지 의아해했다. 설마 도둑이 들어온 건가?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을 열자 단정한 제복을 걸친 사내가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을 발견한 사내는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경례하며 말했다. 그의 제복 상의 왼쪽 가슴 부위에는 검은 사자가 포효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카리츠. 무슨 일로 나를 기다린 거지? 표정을 보아하니 그리 좋은 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를 알아본 알카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리츠는 씁쓸한 표정으로 품 안에서 서류를 꺼내었다.
“기사 위원회에서 붉은 장미 기사단의 단장인 알카네 시르온 님을 찾으십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기사 위원회라는 말에 렌과 예나스, 파르마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에 비해 당사자인 알카네는 미간을 약간 찡그렸을 뿐,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출두 명령서를 받았다.
“알았다. 늦지 않게 가도록 하지.”
“그럼 전 이만.”
용건을 끝마친 카리츠가 서둘러 돌아가려고 하자 깜짝 놀라 굳어 있던 렌이 발끈해서 소리치며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은 해 줘야지!”
그 전에 손 좀 놔주지 않겠냐. 당황했단 건 알겠지만 손에 너무 힘을 준 탓인지 아프다고.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가련한 내 몸은 바다 속의 해초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카리츠는 레이나의 목소리에 움찔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마일론과 같은 특급 수배범을 단독으로 추격하여 결국은 놓쳐 버린 일에 대해 물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이나 선배.”
“뭐? 그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는지 렌이 무어라 소리치려고 하자 알카네가 조용히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해. 괜히 소란 피워 봐야 소용없어. 카리츠도 명령을 받고 왔을 뿐이니까.”
카리츠도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이런 일을 전하러 온 것이 그리 마음 편하지 않은 듯했다. 하긴, 렌 녀석의 반응을 보면 그럴 만하지.
“미안해. 다들 지쳐 있거든. 네가 말한 그 일 때문에 날카로워져 있기도 하고.”
“아뇨, 제가 더 미안하죠. 그럼 저는 내일 정오에 검의 전당에서 뵙겠습니다.”
알카네의 사과에 카리츠는 담담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더 있다간 괜히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했기 때문인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쳇, 잔뜩 고생하고 온 사람에게 푹 쉬라고 하진 못할망정 죄인 추궁하듯 오라 가라 하다니.”
카리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예나스가 투덜거렸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용케도 그 말을 놓치지 않은 알카네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스타스가 나타난 것 때문이겠지. 특급 수배범들이 함께 행동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니까. 그래도 오자마자 찾는 걸 보니 위원회의 영감들이 놀라긴 많이 놀란 모양이야.”
“그건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던지라 예나스는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잡았다가 놓아준 것 때문에 처벌이라도 내리면 어쩌죠?”
가만히 서 있던 파르마콘이 불안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다. 조금은 겁먹은 듯한 그녀의 얼굴에 알카네는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건 말이지…….”
뭔가 있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잔뜩 긴장한 파르마콘이 귀를 기울였다. 잔뜩 굳어 있는 파르마콘의 곁에 다가선 알카네의 입가에 순간적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어흥∼!”
“꺄아아아!”
낮은 목소리로 말하던 알카네가 갑자기 큰소리로 외치자 화들짝 놀란 파르마콘은 비명을 터트리며 가까이에 있던 예나스의 뒤에 숨었다.
“단장도 참, 애 좀 그만 놀려요.”
자신에게 찰싹 붙어 고개만 빼꼼히 내민 채 부들부들 떠는 파르마콘을 돌아본 예나스가 지겹다는 듯 말하자 알카네는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재미있는걸.”
“그거야 그렇지만…….”
그딴 거에 동의하지 말라고! 믿었던 예나스마저 알카네의 말에 동조하자 파르마콘이 사색이 되어선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너무해요!”
파르마콘이 당장이라도 울어 버릴 것만 같은 표정을 짓자 그제야 알카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미안.”
그녀의 사과에 조금은 진정 되었는지 파르마콘은 울먹거림을 멈추었다.
“어차피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들에게 꿇릴 이유는 하나도 없어. 뭐라고 한다면 다 날려 버리면 그만이잖아.”
네, 그리고 저랑 사이좋게 도망 다니시면 되겠네요. ……제정신이야?!
“그건 그렇죠.”
뭐야? 다들 어째서 납득하는 건데? 설마 납득 못 하는 내가 이상한 거야?
알카네는 가볍게 하품을 하더니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난 이만 방에 들어가서 잘게. 어차피 위원회에서 찾는 건 나 혼자니까 너희들은 푹 쉬어 둬.”
끄응, 그나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현직 수배자인 내가 기사단원이라니, 머리가 엄청나게 복잡하다 못해 어지러울 정도야.
으, 적어도 3개월을 이 사람들과 같이 지내야 한다는 건가? 물론 렌이라면 나에게 수배를 내리진 않겠지만 예나스 저 여자라면 분명히 할 거라고!
“시안, 가자. 내가 방으로 안내해 줄게!”
안내해 주는 건 좋은데 손 좀 놔주면 안 될까?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성큼성큼 계단으로 올라서는 렌은 아까 전부터 내 손을 굳게 잡고선 놓아주지 않았다. 오늘만은 도망 안 칠 테니까 좀 놔 줘! 손에 피가 안 통해서 감각이 없다고!
2층으로 날듯이 올라온 렌은 복도 끝에 위치한 방문을 힘차게 열며 말했다.
“짜잔! 여긴 던젤 씨가 쓰던 방…… 어, 어라……? 청소를 안 한 지 오래돼서 그런지 좀 지저분하네, 헤헤.”
신이 나서 떠들던 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헤헤 웃으며 돌아보았다. 좁은 방안의 가구라고는 책상과 침대 하나뿐이고, 쓰다 버린 종이가 여기저기 가득 널려 있고 곳곳에는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게 좀 지저분한 거냐?! 그보다 그 영감님, 겉보기로는 깔끔하더니 방은 대체 이게 뭐야!
“내가 금방 청소해 줄게!”
“아냐, 내가 치우고 잘 테니 너도 이만 가서 쉬어.”
당장이라도 널린 쓰레기들과 먼지들을 몰살시키겠다는 듯 두 팔을 걷어붙이려는 렌을 억지로 내보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청소를 해 준다면 나야 좋지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서.
“레즈나, 듣고 있으면 나와 봐요.”
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허공이 이리저리 일그러지더니 반으로 갈라지며 검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후우, 역시 이쪽의 공기는 좋다니까.”
틈 속에서 걸어 나온 레즈나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방 안의 모습에 실망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추하지만 앉아 주겠어.”
그녀는 책상 위의 먼지를 툭툭 털어 내고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래서 이번에 부른 이유는 뭐야? 누구를 패 주면 되는 거야?”
그런 무서운 소리를 너무 태연하게 하지 말아 주실래요? 그보다 당신, 너무 폭력을 좋아한다고!
“이틀 전에 내가 위험했을 때 어떻게 딱 맞춰서 나타날 수 있었던 거죠?”
나의 물음에 레즈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말했다.
“너와 나는 계약으로 묶인 존재. 난 언제나 너를 지켜볼 수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필요할 때 너를 구해 줄 수가 없으니까.”
자, 잠깐! 지켜보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그럼 이때껏 제가 목욕을 한다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라거나 그럴 때도 전부 지켜봤단 말이에요!?”
“뭐, 어때. 어차피 쓰지도 않을 물건 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크흑, 갑자기 눈에 먼지가…… 뭐, 뭔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데 어쩐지 슬퍼지는 것 같잖아! 젠장! 시선을 위로 올려! 왜 그쪽(?)을 쳐다보냐고!
“제, 젠장! 그런 거 함부로 해도 되는 겁니까? 사생활 침해라고요!”
“괜찮아. 난 마족이거든.”
레즈나는 책상 아래로 늘어트린 다리를 그네처럼 흔들며 무슨 문제냐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끄응, 알았으니까 다음부터는 내 허락 없이 지켜보지 말아주세요.”
“알았어.”
으음, 딴청을 피우면서 대답하는 걸 보니 그리 믿음이 가지는 않는데.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보다 말야, 나 뭐 하면 돼? 누굴 패 주면 돼?”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묻는 걸 보니 뭔가 하고 싶은 모양이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할 만한 것이 하나 있긴 하지.
“청소요.”
“좋아! 청소란 녀석을 패주면 되는…… 에?”
이해하는 게 너무 느려. 한참 신이 나서 떠들다가 내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뒤늦게 깨달은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며 되물었다.
“처, 청소? 이 방을?”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처럼 고귀하신 몸에게 고작 부탁하는 것이 청소란 말이야? 어휴, 계약자만 아니라면 흠씬 패 주는 건데.”
계, 계약자라서 행복해요. 한참을 뾰로통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레즈나는 책상에서 훌쩍 내려서더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방 안의 마나가 그녀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마족의 싸움…… 고작 방 안의 쓰레기와 먼지를 상대로 함에 있어서도 이 정도의 기세라니.
“간다!”
레즈나는 눈을 번쩍 뜨더니 낮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마나가 휘몰아치며 쓰레기와 먼지가 한곳에 모이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