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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15화)
Chap 5 마족의 싸움(3)


“지금 뭐 합니까?”
“응? 청소하잖아.”
어이가 없어진 내가 묻는 말에 그녀는 침대 위의 먼지를 털며 태연히 말했다. 먼지떨이는 어디서 나온 거야?
“방금 전에 마나를 끌어모은 건요?”
마족의 마법이라거나 뭐 그런 거 쓰려고 한 것 아냐?
“아, 그거? 그냥 조용히 청소하면 뭔가 없어 보이잖아.”
고, 고작 그딴 이유로 마나를 그렇게 소란스럽게 움직인 거야? 그보다 어쩐지 청소하는 폼이 익숙해 보이는데 진짜 마족 맞아?
“와! 다 했다!”
순식간에 먼지를 털고 바닥을 쓸고 걸레질까지 끝마친 레즈나는 뭔가 뿌듯하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황당해서 쳐다보던 내 시선과 더 청소할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침묵. 레즈나는 손에 쥐고 있던 걸레를 바닥에 내던지며 버럭 소리쳤다.
“이, 이딴 걸 하는 게 즐거울 거라는 생각 따윈 하지 마!”
……나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채 씩씩대던 레즈나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위험해지면 반드시 나를 불러! 나를 이곳으로 불러낸 계약자를 어이없이 잃는 것은 사양이니까! 그리고 청소 좀 하고 살아!”
내가 원래 이 방의 주인이었던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소리치는 거야?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면 알 거 아냐?!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이 열어 놓은 차원의 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마족들은 원래 다 저런 건가?”
청소 도구를 들고 다니는 마족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다. 너무나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어?”
알카네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 차원의 틈이 갈라졌던 곳을 서둘러 확인하니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예, 들어오세요.”
조금 긴장한 표정의 알카네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무, 무슨 일이세요?”
분명히 자러 간다고 한 사람이 나를 왜 찾아왔담? 조금 전에 레즈나를 불러낸 것 때문에 제 발 저려서인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자려고 하는데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더군. 뭔가 심하게 요동치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설마 차원의 틈이 열렸던 것을 알아챈 건가? 마법사라고는 나 혼자뿐인지라 별 걱정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 마법으로 청소 좀 해서 그럴 거예요. 제가 흑마법사다 보니 마나의 성질이 조금 어둡거든요.”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알카네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한 걱정을 했네. 난 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잖아. 다음부터는 청소 정도는 그냥 하도록 해.”
“예.”
하품을 하며 돌아서는 걸보니 피곤하긴 피곤한 모양이었다.
음, 그녀가 피곤하지 않았더라면 뭔가 알아챘을지도 모르지. 차원의 틈이 열릴 때 생기는 마력의 움직임을 눈치채다니. 알카네의 수준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도 높다는 말인가. 다음부터는 레즈나를 함부로 불러내지도 못하겠군.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꽤 깔끔해진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 어떡하지? 기사단에서 세 달이나 버텨야 하는……데.

짹짹. 짹짹.
아침의 효과음으로 참새 소리는 뭔가 식상하지 않을까. 개가 짖는 소리라든가 그런 걸로 시작하면 참신할 거 같은데.
“야! 일어나.”
음, 개소리는 역시 별로인 것 같다. 그냥 참새 소리가 제일 좋은 것 같아.
“안 일어나? 당장 일어나라고!”
“아! 난 참새 소리가 좋다니까!”
자꾸만 귀를 괴롭게 하는 외침에 벌떡 일어나니 예나스가 무슨 소릴 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바보 같은 소리 말고 빨리 일어나서 준비해.”
……이 뭔 개소리야! 라고 외치지 않은 게 다행이군. 그랬다간 당장에 분노한 예나스의 주먹이 머리 위로 쏟아졌을 테니까.
“으으, 준비를 하라뇨? 아침부터 대체 무슨 일인데요?”
졸려, 피곤해 죽겠어. 예나스 때문에 어떻게 일어나긴 했지만 당장이라도 다시 감길 듯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아치이임? 넌 지금 이게 아침으로 보여?”
그녀가 역정을 부리며 창문을 반쯤 가리고 있던 커튼을 치워버리자 환한 빛이 방 안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윽, 눈부셔.
갑작스러운 빛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가자 불쑥 들어온 예나스의 손이 나를 끌어냈다.
“벌써 정오야! 너도 빨리 준비하고 나와.”
“으, 무슨 일인데 그래요?”
“검의 전당으로 가야지.”
검의 전당이라면 분명 알카네가 기사위원회의 부름을 받은 장소인 것 같은데…… 거긴 또 왜?
“거긴 왜요? 알카네 씨가 혼자 갈 테니 다들 푹 쉬라고 했잖아요.”
“그거야 단장이 우릴 생각해서 한 말이고! 가녀린 단장 혼자서 보내 놓고 걱정도 되지 않아? 마중을 나가 줘야지!”
가, 가녀리다니. 대체 누가? 분명히 누군가가 어제 ‘뭐라고 하면 다 날려 버리겠다.’라고 한 것 같은데?
게다가 마중을 나가는 것뿐이라면 꼭 내가 가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하는 나의 표정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신입 주제에 건방지게 대들래?”
으윽, 왜 하필 이 여자가 온 거냐고. 렌이라면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평화로운 내 수면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을 텐데.
“제가 만약 가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싫은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을 것이 분명한 내 표정을 보고서 대충 짐작했는지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큰일이 나겠지……?”
제, 젠장!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잖아! 가기 싫다고 하면 당장 패 버리겠다고 말하는 시선이야!
“가, 가겠습니다.”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내려오도록 해.”
예나스가 방을 나서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으윽, 어째서 저 여자에게는 쪽도 못 쓰는 거지? 으으,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는 거야.
“쳇, 저런 성격 파탄인 여자와 결혼하게 될 남자가 누군지 몰라도 엄청나게 불쌍하군. 아니, 시집은 갈 수 있으려나.”
투덜거리며 예나스의 미래에 대한 예상을 늘어놓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아참, 깜빡했는데 씻을 땐 이 방에 딸린 욕실을 사용하도록 해. 혹시나 멋모르고 공용 목욕탕에 들어왔다간 죽을지도 모르니까. 우리 애들은 좀 과격하거든.”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곤 문을 닫았다.
모, 못 들은 게 확실하지? 들었다면 주먹부터 날아왔을 거야.
그러고 보니 여긴 여자 기사단의 숙사였지. 깜빡 실수해서 공용 목욕탕에 잘못 들어갔다간…… 으으, 예나스의 말대로 분명 살해당할 거야. 조심해야지. 이 기사단의 여자들이 과격하다는 건 내가 몸으로 잘 알고 있으니까, 흑흑.
어기적대다간 또 한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니까 서둘러야겠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예나스가 말한 욕실에 들어갔다.
어차피 건물 전체에서 남자 한 명만을 위한 욕실인지라 내부는 자그마했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욕조가 하나, 세면기와 구석의 변기가 보였다. 다행히도 던젤 씨가 욕실은 깨끗하게 쓴 것 같군. 안 그랬으면 빚을 내서라도 저주에 필요한 물건들을 샀을 거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니 그제야 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대충 물기를 닦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방을 나서려는 차에 옆방의 문이 열렸다.
렌의 방이 바로 옆방이었던가. 렌은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반쯤 덜 깬 표정이었다.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어 대는 것을 보니 잠에 취해서 내가 문 앞에 서 있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비틀거리며 걷더니 결국 콩! 하는 소리를 내며 벽에 머리를 가볍게 부딪쳤다.
“아고고…… 응? 시, 시안?”
갑작스러운 통증에 머리를 감싸며 쪼그려 앉아 신음을 흘리던 녀석은 그제야 나를 발견했는지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바보 같은 모양새가 부끄러웠는지 렌은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벌떡 일어나더니 시선을 피했다.
“조, 좋은 아침이지? 난 이만 세수하러 가 볼게!”
“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혹시 돈 좀 빌려 줄 수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3개월이나 여기에 있다간 위에 구멍이 날 것 같단 말이지.
확 튀어 버려? 횡령이나 배임죄의 처벌이 세기는 하지만 마족 소환이나 금지된 마법에 대한 대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그러다가 자칫 내 정체가 들통 날 지도 모르는 일이니…… 게다가 예나스를 비롯한 여자들이 열 받아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크으! 3,000실링을 대체 어디서 구하냐고!
어? 그런데 잠깐만, 렌이 이제 일어났다는 건 내가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단 거잖아? 크윽, 예나스 그 마녀가 호들갑을 떨기에 내가 늦은 건지 알았더니. 설마 이것도 나를 괴롭히는 하나의 수작인가?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을 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이미 나갈 준비를 마친 예나스와 파르마콘이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침 내려오는 내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던 예나스의 표정이 엉망으로 찡그려졌다.
“응? 뭐야. 너 그 꼴로 갈 생각이냐?”
내 모양새가 뭐 어때서? 내가 뚱해져서 쳐다보자 한숨을 푹 내쉰 예나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잊었나 본데, 넌 오늘부터 붉은 장미 기사단의 마법사라고. 조금은 남들 이목을 생각해 주지 않겠어?”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평상복 차림이 아니라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백색 제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로브도 없이 평상복만을 걸치고 있으니…… 어디 가서 마법사라고 해도 믿어 주지 않을 만한 모양새로군.
그런데 그렇게 말해 봐야…… 나한테 갈아입을 만한 옷이 있을 리가 없잖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댁들에게 쫓겨 다니던 신세였는데. 몇 안 되는 옷가지들도 지금 입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걸. 로브는 저번에 렌을 만났던 날에 쓰레기통에 버렸고.
내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예나스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어차피 너도 우리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으니 제복 한 벌쯤은 필요하겠지. 오늘 나가는 김에 렌과 함께 가서 맞추도록 해.”
저기, 지금 댁들이 입고 계신 제복은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말이죠…… 가, 가격이 상당할 것 같습니다만? 설마 제복 값까지 빚에 더해서 한 달 더 일하라거나 그러는 거 아냐?
선뜻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녀는 내 생각을 짐작했는지 피식 웃었다.
“돈은 걱정하지 마. 단원에게 지급되는 첫 번째 제복은 무료니까. 물론 다음부터는 자비로 사야 하지만.”
그렇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그, 그런데 점점 빠져나오지 못할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잘게 떠는 사이에 앉아 있던 예나스와 파르마콘이 시선이 내 뒤로 움직였다.
“늦었잖아.”
예나스의 악의 없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제복을 갖춰 입은 렌이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미, 미안!”
급하게 씻고 나오느라 제대로 말리지도 못했는지 녀석의 머리칼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다. 그 모습에 예나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서두르는 건 좋지만 그래도 머리는 제대로 말리고 나오지 그랬어? 그러다 누구처럼 몸살 걸리겠어.”
조금 전에 늦었다고 타박한 게 누구였더라? 그보다 누구처럼이라는 거 나를 두고 한 말이지? 예나스를 살짝 흘겨보는 것과 동시에 렌이 가볍게 재채기를 했다.
“에취.”
끄응, 렌도 나름대로 기사니 겨우 이걸로 몸살이 나지는 않겠지. 그래도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조금은 추울 거라 생각 되는데.
“이리 와 봐.”
내가 한숨을 쉬며 부르자 녀석은 강아지처럼 눈을 똥그랗게 뜨며 쪼르르 다가왔다.
“응? 왜 그래?”
먹을 걸 주려고 부른 거는 아니니까 그렇게 들뜰 필요는 없단다. 녀석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제대로 물기를 닦아 내지 못한 탓에 젖어 있는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찰싹 감겨 왔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듯 손을 가볍게 움직이자 이내 열기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물든 렌의 머리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오, 어떻게 한 거야?”
뭘 하는지 곁에서 지켜보던 예나스가 감탄을 터트렸다. 훗, 이런 것쯤이야 누워서 빵 먹기지.
“화염계의 마법을 응용한 겁니다.”
물론 내가 제대로 된 위력으로 마법을 사용한다면 머리가 홀랑 타서 대머리가 된다거나 하는 가벼운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도 하지만. 흠, 대머리인 렌이라…….
“너 갑자기 왜 그래?”
수, 순간 떠올려 버렸어. 무지막지하게 충격적인데 이거? 렌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로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부들부들 떠는 내 모습에 예나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이유를 말해 줬다간 난리가 나겠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크크큭.”
내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도 모르는 렌은 순식간에 마른 자신의 머리카락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매만졌다.
“이 녀석 묘한 데서 쓸모가 있단 말이야.”
묘한 데서 쓸모가 있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야? 예나스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데 멍하니 굳어 있던 렌이 화들짝 놀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아,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출발하자. 이러다간 늦겠어.”
착각일까? 어쩐지 나를 잡아 이끄는 렌의 표정이 밝아 보이는데.
에이, 몰라. 간밤에 좋은 꿈이라도 꿨나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