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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16화)
Chap 6 목줄을 맨 고양이의 심정(1)


검의 전당은 바이안 왕국과 역사를 함께 한 유구한 역사를…… 잠깐, 유구한 역사는 무슨! 이 나라는 독립한 지 겨우 30년도 채 안 된 신생 국가잖아.
바이안 왕국은 원래 닐센 제국의 공국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30년 전, 닐센 제국과 트라니아 제국의 전쟁이 발발하자 바이안 공작이 그 기회를 노려 독립해 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닐센을 향한 트라니아의 견제 덕분에 바이안 왕국은 평화롭게 독립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독립 후에 바이안 국왕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군사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멍하니 있다가 열 받은 닐센이 트라니아와 밀약이라도 맺고서 쳐들어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기껏 이루어 낸 독립이 허사로 돌아갈 테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왕국이 독립함과 동시에 세워진 것이 바이안 왕국 기사들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검의 전당이다.
그런데 난 대체 누구한테 설명을 하고 있는 거지? 게다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뭘 그리 두리번거리는 거야? 쪽팔리니까 그만 좀 두리번거려.”
검의 전당의 모습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던 내가 못마땅했는지 예나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옆구리를 콕콕 찔러 댔다. 쳇, 상식적으로 내가 두리번거리는 것보다 이렇게 검의 전당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게 더 눈에 띌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거야?
기다리다 지친 우리는 검의 전당 앞에 쪼그려 앉아 알카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오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다니. 옆에 앉아 있던 렌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녀석의 시선은 검의 전당 정문을 향한 채였다.
하아, 역시 아직도 아일렌에서의 일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별일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이야기하려는데 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단장!”
녀석의 외침에 피곤한 표정으로 검의 전당을 걸어 나오던 알카네가 우리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마중을 나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는지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가 여긴 왜……?”
예나스와 파르마콘도 벌떡 일어서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중을 나온 거죠.”
예나스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알카네는 언제 피곤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너희도 참.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음이 진해져 가는 것을 보니 마중을 나온 게 좋은 모양이군.
“그런데 단장, 위원회에서는 뭐래요?”
아까부터 잔뜩 걱정을 하고 있던 렌이 조심스레 묻자 알카네는 머리를 긁적대며 대답했다.
“뭐, 별것 없었어. 마일론이 스타스와 함께 있었던 것에 대해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부른 거라고 하더라고. 내가 독단으로 움직인 것도 다른 기사단에게 알리고 준비를 하는 사이에 놈이 도망치거나 눈치챌까 봐 그랬다고 하니까 어느 정도 수긍하더라.”
그런데 이렇게 간단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끝날 거라면 어째서 직접 오라고 한 거지? 그 정도야 문서로 보고 할 수도 있잖아.
“정말 그것만 확인하려고 부른 거래요?”
예나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말에 알카네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말이 간단하지. 영감님들이 잔소리를 해 대는 바람에 귀가 따가워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 투덜거리는 알카네의 모습에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예나스가 피식 웃었다.
“헤, 단장 혼자만 잔소리를 들은 걸로 끝나서 다행이네요.”
“뭐야?”
알카네가 도끼눈을 뜨며 째려보았지만 예나스는 움찔하는 기색도 없이 익숙하다는 듯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결국 제풀에 지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알카네가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위원회의 영감님들이랑 마법 협회의 사람이 함께 있더라. 대부분의 질문도 그쪽에서 했고 말이야.”
그 말에 예나스는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이를 갈았다.
“으, 설마 마법 협회 놈들. 지난번 일로 앙심을 품고서……!”
그 말에 오히려 알카네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오히려 무사히 돌아와 정보를 전해 준 것이 고맙다던걸? 적의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어.”
“대체 마법 협회는 무슨 꿍꿍이인 걸까요.”
점점 모르겠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묻는 예나스의 말에 알카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 거렸다.
지난번의 일이라면 린부르크의 악마를 놓친 것 때문에 마법 협회와 다툰 일을 말하는 거지? 설마 전임자이던 던젤 씨가 은퇴한 것도 실은 후임 양성이 이유가 아니라 마법 협회에 밉보이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었을까? 새, 생각해 보니 시기상으로도 맞아떨어지잖아!
마법 협회에 찍히게 되면 마법사로서 이름을 떨칠 길이 막혀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획기적인 이론을 들고 나온다고 해도 마법 협회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압도적인 권력이 만들어 낸 병폐라고나 할까.
아무리 내가 명성을 떨치고 싶은 생각이 없다지만 조금은 꺼림칙하긴 하단 말이야.
“피곤하실 텐데 이만 돌아가죠. 다른 단원들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자리를 뜰 생각을 않는 두 사람의 모습에 파르마콘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예나스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렌을 돌아보았다.
“아참, 렌. 저 녀석 좀 데려가서 제복을 맞춰 줘. 오늘부터 이 녀석도 우리 기사단의 단원이니까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렌, 다녀오도록 해.”
알카네도 예나스의 말에 동의하며 쳐다보자 렌은 멍하니 서서 눈을 끔뻑거리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예!”

그런 이유로 나는 렌에게 어디론가 끌려가는 중이다.
“렌, 손 좀 놓고 가면 안 될까? 조금은 아픈데.”
너무 꽉 붙잡았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들떠 있던 렌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아주었다. 옷을 맞추러 간다니까 잔뜩 신이 난 걸 보니 렌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 것 같다.
“미, 미안.”
계속해서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 부끄러운지 렌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보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아, 우리 기사단이랑 계약한 곳이 있거든. 이 근처야.”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렌이 멈춰 선 곳은 대로의 끝에 위치한 의상실 앞이었다.
“안녕하세요! ……어라? 카리츠?”
활기차게 인사를 하며 의상실의 문을 열었던 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렌의 목소리에 진열된 옷들을 구경하고 있던 한 사내가 깜짝 놀라더니 돌아보았다. 그도 놀랐는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반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레이나 선배.”
그러고 보니 저 남자, 어제 기사 위원회의 명령을 전하러 왔던 그 기사인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할 듯 우물쭈물 거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그런 불편한 소식을 전하러 가서…….”
조심스레 사과하는 카리츠의 말에 렌은 해맑게 웃으며 손을 가로저었다.
“아냐. 너도 명령을 받고 온 것뿐이잖아. 게다가 그 일도 잘 해결됐는걸!”
렌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에 카리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두 사람을 멀뚱히 구경하고 있자니 약간은 기분이 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설마하니 나는 없는 사람 취급하기냐?
다행인지 불행인지 렌보다 카리츠라고 불린 젊은 기사가 먼저 나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나저나 선배. 이쪽의 일행 분은 누구신가요?”
“아차, 깜빡했다. 시안, 어제 봤었지? 이쪽은 흑사자 기사단의 카리츠 호크아이라고 해.”
“루시안 알프하임입니다.”
가볍게 목례를 하자 카리츠는 나와 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조금은 굳어 보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십 년 전 약속의 그…….”
내가 고개를 돌려 렌을 쳐다보니 녀석은 다른 곳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넌 대체 어디까지 그 약속을 이야기하고 다닌 거야? 설마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내 이름을 말하면 10년 전의 약속을 운운하는 건 아니겠지?
“하아…… 네, 제가 바로…….”
“그런데 선배는 어쩐 일이십니까?”
이, 이 자식이! 무시하기냐? 적어도 대답은 다 들어 줘야 할 것 아냐!
“시안이 이번에 던젤 씨의 후임으로 우리 기사단에 들어 왔거든. 그래서 제복을 맞춰 주려고.”
“아, 그렇습니까.”
뭐, 뭐냐. 그 친구 덕으로 일자리를 얻은 낙하산을 대하는 듯한 그 시선은! 난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잡혀 있는 거란 말이다!
“그러는 카리츠는 여기 웬일이야?”
“제복이 찢어져서 수선하러 왔습니다.”
카리츠가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렌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나저나 린부르크의 악마를 놓친 것 때문에 너희 단장님이 뭐라고 안 하셨어?”
움찔. 갑자기 왜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렌의 물음에 그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예, 그때만 생각하면…… 린부르크의 악마를 놓쳤다고 얼마나 질책당했는지 몰라요. 붉은 장미 기사단은 단장님이 너그러우셔서 좋겠어요.”
미안, 도망쳐서. 흑사자 기사단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파견했었던가? 아니, 대부분의 기사단은 일부 단원만을 파견했었지. 단장에 부단장까지 대부분이 나를 잡으러 추적한 것은 붉은 장미 기사단이 유일했지, 으으.
“헤헤, 부러우면 너도 다리 사이에 있는 거 떼고 오든가.”
……숙녀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냐? 대체 아카데미의 기사학부 놈들은 애한테 뭘 가르친 거냐?!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하, 역시 그건 좀 무리예요.”
그런 건 좀 웃어넘기지 좀 마!
“카리츠 씨. 맡기신 옷의 수선이 끝났습니다.”
타이밍 좋게 재단사가 검은색의 제복을 들고선 다가왔다. 자신의 제복을 건네받은 카리츠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렌에게 말했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전 이만 용건을 마쳤으니 돌아가 봐야겠네요.”
아쉽다는 그의 말에 렌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냐, 나도 시안의 제복을 맞춰 줘야 해서. 그럼 잘 가∼”
적어도 여기 온 목적은 잊지 않았다니 다행이구나. 카리츠는 렌의 작별 인사에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가게를 나섰다.
그런데 어쩐지 가게를 나가면서 나를 쳐다보던 카리츠의 묘한 시선이 마음에 걸리는데. 음, 착각이겠지.
치수를 재기 위해 재단사에게 몸을 맡긴 동안 렌은 의자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를 선배라고 부르던데 무슨 사이야?”
“아, 아카데미에 다닐 때 나를 잘 따르던 후배야.”
으음, 그냥 잘 따르는 정도가 아닌 것 같던데. 뭐,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치수를 재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며칠 내로 완성해서 보내 주겠다는 재단사의 말을 들으며 가게를 나서는데 렌이 탄성을 터트렸다.
“아, 예쁘다.”
렌이 감탄을 터트린 것은 하늘을 선명한 주홍빛으로 가득 물들인 노을이었다.
“하루 이틀 보는 모습도 아닌데 뭘 그래?”
무덤덤하게 대꾸하니 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시안은 너무 무신경해.”
뭐, 뭣이! 내가 얼마나 섬세한 남자인데. 내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니 녀석은 작게 한숨을 푹 내쉬더니 걸음을 옮겼다.
“야! 방금 그 한숨은 뭐야? 응?”
“아무것도 아냐!”
렌은 가볍게 혀를 배죽 내밀고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달렸다. 뭐, 길거리가 온통 노을빛으로 물든 게 그럭저럭 보기 좋기는 하네…… 잠깐만, 너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빠른데?
“야! 같이 가!”
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설마 저 바보 녀석 내가 저 속도를 따라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 난 뛰는 게 싫다고.
잠시 뒤에 머쓱한 표정의 렌이 돌아오자 나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 웃지 마! 난 시안이 따라올 줄 알았단 말이야!”
내 웃음에 얼굴을 잔뜩 붉힌 렌이 투덜거리듯 소리쳤다. 더 놀렸다간 정말로 화를 낼 것만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 알았으니까 저녁이나 먹으러 돌아가자. 나 배고파.”
생각해 보니까 나 어제 마차에서 정신을 차린 이후로 제대로 먹은 것이 없잖아. 낮에 잠에서 깨자마자 예나스에게 끌려 나온데다 검의 전당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만 있었으니까. 게다가 슬슬 저녁 먹을 때이기도 하고.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렌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혼자만 가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도 달리지는 말아 주라. 내가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닐 테니까.
“저녁 먹으러 가자!”
렌은 방금 전까지 얼굴을 붉히던 것은 어디로 갔는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단순하기는.
음, 아무리 생각해도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으로 좋은 건 하나 정도는 있는 것 같아. 식사가 공짜라는 것 말이지. 응? 뭐 다른 거라도 있어? 아, 기숙하는 것도 합치면 두 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