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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17화)
Chap 6 목줄을 맨 고양이의 심정(2)


아침은 평온한 시간이다. 나는 작은 침대 위에 엎드려 누운 채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안락한 수면의 끝을 만끽하고…….
“시안! 시안!”
있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갑자기 소란스러운 뭔가가 들어왔다.
누군가해서 실눈을 뜨고 쳐다보니 렌이 잔뜩 들뜬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뭐야, 렌이냐? 제발 노크는 하고 들어와.”
그 말에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렌은 눈을 몇 번 끔뻑거리더니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고는 마치 칭찬을 바라는 듯한 아이처럼 헤헤 웃었다.
으으, 그런 뜻이 아니잖아.
‘어쩌다 보니’ 기사단에 얽매이게 된 것도 벌써 나흘째. 기사단의 전속 마법사가 되기는 했지만 마땅히 하는 일은 없었다. 뭐, 이리저리 부려 대는 것보다야 낫기는 하지만 뭔가 불안하단 말이지.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그나저나 이 녀석이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지금쯤이면 바깥의 연무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침 훈련을 하고 있을 시간일 텐데. 아, 창밖을 보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아침 먹을 시간이야, 시안.”
“으윽, 조금만 더 자게 해 줘. 난 아침잠이 많단 말이야.”
아무렇게나 대답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는데…… 어, 어쩐지 불안한 침묵이…….
조심스레 살며시 눈을 떠 보니 장난스런 표정의 렌이 침대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지 말고∼ 늦으면 못 먹는다니까?”
그렇게 말하고 다가온 렌이 내 몸을 덮은 이불을 붙잡더니 홱! 걷어 버렸다. 자, 잠깐만! 남자는 아침마다 사정이 있단 말이야!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비명을 지르듯 항복 의사를 나타내자 그제야 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쪼르르 방을 나섰다. 나가면서도 한마디를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빨리 나와야 돼?”
으으,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리람. 난 애초에 아침 식사를 거르는 편이라고.
한숨을 내쉬며 어기적대며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가볍게 씻고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늦게까지 자는 나와는 달리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훈련들 하는 사람들답게 이미 식사가 한창이었다.
나도 음식을 받아 렌이 앉은 식탁으로 가서 식사를 하려는데…… 제길, 아무리 나를 제외한 전원이 여자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사흘 동안 봐 온 풍경이지만 아무리 봐도 익숙해질 수가 없어!
내가 음식을 앞에 두고 잔뜩 인상만 찡그리고 있자 맞은편에 앉은 예나스가 입 안의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야, 안 먹을 거면 내가 먹는다?”
특히 당신, 당신 말이야! 아무리 편한 복장이라고는 하지만 남자인 나도 있는 데 민소매에다가 반바지라니!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고!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요, 제발 옷은 제대로 입어 주시면 안 될까요.”
귀족가의 영애만큼의 몸가짐은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게다가 당신 겨우 사흘 전에 나더러 옷차림에 신경 쓰라고 해 놓고서!
“이게 뭐 어때서?”
어째서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묻는 거냐고? 그렇게 물어 버리면 내가 딱히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잖아!
“너무 드러냈잖아요!”
내가 발끈해서 소리치자 그녀는 가볍게 쿡쿡 하고 웃으며 말했다.
“보기보단 고지식한 면이 있네? 그러면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고.”
“신경 꺼요.”
아니, 그럼 겉보기론 어떻게 보인다는 거야? 게다가 쓸데없이 정곡 좀 찌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예나스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이 복장이 훈련하기에 제일 편하단 말이야.”
으,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이 사람들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 기사니까. 털털하기로는 남자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니 아침부터 정숙한 옷차림을 하고 있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 그래도 예나스가 좀 튀는 편이라는 거지, 다른 기사들은 적당한 선자나 키고 있으니 다행인 걸까.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남자들이 상상하는 여자에 대한 환상들 따위는 전부 착각이라고.
여자들만이 생활하는 공간, 예를 들어 여학교나 여자 기숙사에서는 남자나 다름없는 털털한 성격이 드러난다는 등의 이야기 말이다.
……이게 사실일 줄이야. 그것도 내가 있으니 꽤 자제 하고 있는 듯한 태돈데. 대체 자기들끼리만 있을 때는 어떻게 하고 지낸단 거야?!
에잇, 어차피 난 3개월만 지나면 이곳을 떠날 사람이잖아. 그동안만 좀 참으면 되겠지.
예나스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일어서는데 가느다라면서도 힘 있는 손가락이 내 어깨를 두드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보니 나를 따라 일어선 렌이 입 안에 음식물을 가득 담은 채로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 같다. 양 볼이 가득 부푼 걸 보니 꼭 다람쥐 같다. 그것도 먹이 주머니가 가득 찰 정도로 먹이를 입에 넣은 다람쥐.
아무래도 나랑 같이 일어서려고 급하게 남은 음식들은 입안으로 밀어 넣은 것 같기는 한데.
“……일단은 입 안의 걸 다 먹고 나서 말하는 게 어때.”
내가 당연한 것에 대해 알려 주자 녀석은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 안에 든 것들은 꿀꺽 삼켰다.
“헤헤, 사실은 조금 이따가 말해 주려고 했는데 말야.”
“응, 그럼 나중에 말해 줘.”
장난스레 대답하며 식기를 반납하고 돌아서자 렌이 다급히 내 팔을 붙잡았다. 다시 돌아보니 녀석은 내 장난에 조금은 화가 났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었다.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지. 가끔 이 녀석을 볼 때마다 기사 시험은 어떻게 통과했는지 궁금하단 말이야. 혹시 싸움만 잘하면 다 뽑는 건 아닐까.
……음, 예나스를 생각해 보면 성격 같은 건 시험 대상에 없는 것 같기도.
“렌을 너무 놀리지는 말라고.”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예나스가 씨익 웃으며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이거 상당히 기분 나쁜데? 어째서 비슷한 나이의 여자가 머리 위에 손을 얹었는데 어색하지 않은 거냐고!
“일단 손 좀 치우고 말해 줄래요?”
“응? 아! 워낙 손을 얹기 좋은 위치에 있어서 말이야.”
방금 전에 너무 놀리지는 말라고 한 사람이 할 만한 태도가 아니잖아! 지금 나보다 키 크다고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내가 작은 게 아니라 댁이 너무 큰 것뿐이야!
어쩐지 말하다 보니 더 슬퍼지는 것 같다. 착각이겠지.
예나스는 내 머리에서 손을 치우고는 킥킥 웃으며 렌을 쳐다보았다.
“내가 대신 말해 줄까?”
렌은 강하게 부정하듯 고개를 내저어 보이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말하려는 게 뭔지는 몰라도 빨리 좀 끝내 줘. 순식간에 피곤해져 버려서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드러눕고 싶으니까.
“오늘은 중요한 날이야, 시안.”
중요한 날? 오늘 저녁 식사로 엄청 비싼 거라도 나오는 건가? 감을 잡지 못한 내가 멀뚱히 쳐다보자 렌은 기대감에 들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의상실에서 오늘 오전 중에 시안의 제복을 보내 준대.”
“어, 그랬어? 그런데 그게 왜?”
도저히 제복이 완성된 거랑 오늘이 중요한 날이라는 것의 연관성을 못 찾겠어.
렌은 원하는 반응이 나온 것이 즐거운지 환하게 웃었다.
“헤헤, 나중에 도착하면 말해 줄게.”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내가 나중에 말해 달라고 했잖아. 괜히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말이야. 쳇, 난 모자란 잠이나 보충하러 갈까.
길게 하품을 하며 식당을 나서려고 하는데 예나스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붙들었다.
“아참,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오늘 설거지 당번은 너야.”
뭐, 뭣이? 그런 건 대체 언제 정한 건데? 당사자의 의견은 무시한 그런 결정 따위, 단단히 따져 주겠어! 하는 생각 정도는 갖고 있다고.
으, 도저히 예나스에게는 뭐라고 대들 수가 없단 말이야. 3개월간 쫓길 때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다섯 사람 중 하나니까. 음, 그 다섯 사람 중에 렌 녀석도 포함되어 있었긴 하지만 그런 어수룩한 모습을 자꾸 보고서도 무서워 할 수는 없잖아.
……그보다 설거지를 반쯤 하고서야 생각 난 건데, 내가 익힌 마법 중에 세척 마법이 있지 않았던가? 어쩐지 렌이랑 계속 어울리다 보니 나까지 바보가 되어 가는 듯한 기분이다.
조금은 허탈한 기분으로 세척 마법을 사용하고는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채 10초가 지나기도 전에 잔뜩 들뜬 기색의 렌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박차며 쳐들어왔다.
“도착했어!”
젠장, 잠을 더 자기는 글렀군. 이젠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지쳤어.
내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녀석은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는 무언가를 건네주더니,
“빨리 입고 나와!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라고 말하고는 바람처럼 방을 나가 버렸다. 멍하니 서 있다가 렌이 건네 준 것을 쳐다보았다.
새하얀 셔츠와 바지. 그리고 무릎까지 길게 내려오는 롱코트. 이게 내 제복이라는 건가? 기사단 소속 마법사의 제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다른 단원의 제복과의 차이점이라면 날렵하게 굴곡을 드러내 보이는 보통의 제복에 비해 내 것은 조금 더 로브에 가까웠다. 게다가 후드까지 달려 있고 말이야.
남성용과 여성용이라는 차이도 있겠지만 기사와 마법사라는 직업적 차이도 있어서인가. 기사는 움직이기 편하면 장땡이지만 마법사는 로브 속에 이것저것 많이 넣어 다니니까. 그러고 보니 모양만 코트지 로브와 다를 게 없잖아, 이거.
제복으로 갈아입고서 거울을 쳐다보니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쫓기던 때는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검은색의 로브의 후드를 필사적으로 눌러썼거든. 그러고 보니 흑마법사와 하얀색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거 아냐?
게다가 전부 하얀색이라 세탁하기 귀찮겠는데. 하긴 나야 3개월 뒤면 전혀 입을 일이 없겠지만.
아차,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늦게 내려가면 또 뭐라고 할 텐데.
“아, 왔다, 왔어!”
서둘러 아래로 내려가니 예나스에게 무어라 신이 나서 떠들던 렌이 계단을 내려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크게 흔들며 반기고 있었다.
“뭐야, 늦었잖아. 무슨 옷을 갈아입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려?”
거봐, 내가 저 말 할 줄 알았지. 예나스는 혀를 쯧쯧 차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 생각보다는 괜찮네.”
내 모습을 발견한 예나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럼 대체 무슨 모습을 생각한 건데?
“그럼요! 시안이 얼마나 멋진데요. 그렇지?”
예나스의 말에 렌이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던 파르마콘을 쳐다보며 물었다.
“예, 잘 어울리시네요.”
“옷이 날개로군.”
사근사근한 목소리의 파르마콘의 칭찬에 이어 알카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 사람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소파에 반쯤 드러눕듯이 앉아있던 예나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나는 옷이 괜찮다고 말한 거야.”
저 여자의 말은 무시하는 게 내 정신건강에 굉장히 좋을 것 같군.
“아, 그런데 아까 해주겠다고 한 말이 뭐야?”
아까 전에 렌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묻자 녀석은 알카네를 한번 쳐다보았다. 알카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렌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녀석, 단장 대신에 자신이 소개하게 된 것이 기쁜가 보군. 내 생각을 확인이라도 해 주듯 렌은 어울리지도 않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에헴.’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에헴, 제복을 입는다는 건 말이야, 기사단의 정식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하거든. 우리 가족이 되었다는 말이지. 헤헤, 한가족이 된 것을 축하해!”
처음에 점잔을 피우며 시작했던 녀석의 말은 끝에 가서는 평소와 같은 무게감 전혀 없는 모습으로 끝났다.
렌의 말이 끝나자 다른 사람들도 박수를 치며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가족이라…… 왠지 뭉클한 말인걸.
어쩐지 조금은 푸근한 기분이 들어 웃음을 지으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팔이 어깨동무를 하듯 내 목을 둘러 감았다.
뭐, 뭔가 불안한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어느새 다가온 예나스가 옆에서 실실 웃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입은 제복을 받고 나서야 정식 단원으로 인정이 되어 함께 훈련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럼 나도 이제부터는 함께 훈련을 한다는 거야? 나처럼 고상한 마법사가 무식한 기사들의 훈련을 따라 갈 수가 있을 리가 없잖아!
애초에 제복을 맞추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좋지 않은 징조를 느꼈다. 하지만 예나스 저 여자가 내 의견 따위는 듣지도 않았었지.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겠어.
……큭, 내 목을 둘러 감은 예나스의 강인한 손길을 벗어날 방법 따위는 없는 건가!
“뭐, 그래도 너는 ‘일단은’ 마법사니까, 기사인 우리와는 수련 자체가 다르니 우리의 훈련에 합류시킬 순 없겠지.”
오, 맙소사. 이건 말도 안 돼. 이 사악한 마녀가 나를 기쁘게 하는 말을 해 줄 줄이야.
내가 조금은 감동을 받아서 쳐다보았는데…… 어라? 예나스는 불길한 미소를 씨익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기초 체력 정도는 있어야겠지? 저번처럼 적에게 멱살이나 잡히는 볼썽사나운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댁들도 스타스에게 이리저리 당했었잖아! 게다가 애초에 마법사인 내가 아무리 훈련을 해 봐야 스타스 같은 괴물들을 상대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어째서 병 주고 약을 줬다가 다시 병을 주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