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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25화)
Chap 8 여인본색(4)
“그럼 무슨 용건으로 나를 찾으신 거요?”
남작도 이제는 셀르 자작의 의도에 대해 감을 못 잡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작의 말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남작님이 돈 때문에 곤란해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영주성의 값나가는 것들을 팔아 조금의 돈을 마련해 왔습니다.”
“으음.”
도움을 주겠다는 말임에도 남작은 굳은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급히 영주성의 물건들까지 팔아서 돈을 마련해서 주겠단다. 뭔가 원하는 것이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해 줄 리가 없다.
“마땅히 요구하시는 것이 있겠지요.”
남작이 담담하게 말하자 젊은 자작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확실하군, 사채업자를 뒤에서 조종할 만한 인물이 아니야. 너무 단순해. 어쩌면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이라는 게 애초에 없었을 수도 있겠군.
잠시 머뭇거리던 젊은 자작은 남작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린부르크의 악마 행세를 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라비스 군이라고 하더군요.”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자작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걱정이 되는지 남작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대체 이자는 무엇을 요구하려고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인가. 키뮤스에게 진 빚과 라비스의 일. 불안해하는 남작의 눈치를 살피던 자작이 큰 결심을 한 듯이 말했다.
“따,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네놈이 제일 위험한 범죄자잖아! 알카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남작에게 물었다.
“마르크 남작님, 쥬디스가 올해로 몇 살이죠?”
“열세 살입니다…….”
잠시 주변을 뒤덮는 고요한 침묵.
여, 열세 살짜리에게 흑심을 품다니! 저거 완전히 변태잖아!
“자, 장인어른! 쥬디스 양을 저에게…….”
분위기가 기묘해지자 젊은 자작은 남작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남작은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누, 누가 장인어른이라는 거요!”
물론 어린 나이에 혼인을 하는 게 흔한 일이기는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어린 아이를 달라고 하는 걸 보니 어쩐지 소름이 돋잖아!
“자금도 제가 지원해 드리고 라비스 군의 일도 도와 드릴 테니 제발!”
나름대로 자작은 진심인지 간절하게 소리쳤다. 그런데 그 순간 남작의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제가 뭘요?”
어, 어라? 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분명히 이곳으로 오기 전에 만나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타난 라비스의 모습에 모두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라비스는 천진난만하게 구석에 쪼그려 앉은 나를 보며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걱정이 되어서. 그런데 왜 쪼그려 앉아 계세요?”
지금까지 모두들 내가 라비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라비스가 나타나자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서, 설마 저놈이…….”
렌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그 옆에 있던 알카네는 이를 갈며 낮게 말했다.
“네놈, 진짜였나! 대놓고 우리를 속이다니! 으득, 이번에야말로!”
아, 아니, 나는 처음부터 내가 진짜라고 말했는데?! 네 여자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드는 모습에 후드 아래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네 여자의 뒤로 피어오르는 정체모를 오라를 보던 나는 품에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꺼내어 들었다.
“블링크!”
스크롤을 찢자 흐릿하게 변하는 시야에 분노에 치를 떠는 네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대체 내가 왜 이 짓을 한 거지?
린부르크의 악마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던 알카네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악에 받쳐 소리쳤다.
“악! 또 튀었어! 이게 다 저 자식들 때문이야! 가만두지 않겠어!”
자신들을 가리키며 이를 가는 알카네의 모습에 키뮤스 일당은 공포에 부들부들 떨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저, 저희가 왜요?!”
처음에 기세당당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부들부들 떠는 그들의 모습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일당들 중 하나가 애써 용기를 내서 반발하듯 소리치자 예나스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소리친 자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니들이 가짜라며 이 개자식들아!”
그리고 이어진 주먹과 발길질의 향연.
키뮤스 일당 중에서 용병들 몇몇이 반항을 시도해 보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들이 여자라고는 하지만 용병과 정식 기사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 블링크로 사라진 내가 어떻게 이 모습들을 보고 있냐면…… 난 블링크라고 외치기는 했지만 블링크를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찢은 것은 인저빌리티라는 투명화 마법이 걸린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로우 킥! 이라고 외치면서 어퍼컷을 날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녀들이 조금만 침착했다면 내 속임수를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눈앞에 있던 나를 놓쳤다는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이었다.
뭐, 나로서야 다행인 일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얻어맞던 키뮤스 일당은 일렬횡대로 반듯하게 무릎을 꿇고서 손을 들고 있었다. 오크 라이더 가월을 피범벅이 될 정도로 패고 붙잡아 갔다는 게 사실인가 보다.
잔뜩 주눅 든 얼굴의 일당들 앞에 선 알카네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사를 모욕한 것으로도 모자라 국왕 폐하를 모욕하다니. 가만히 두고 넘어갈 수 없군.”
그녀의 말에 키뮤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기사모독죄야 그렇다 쳐도 국왕 모욕죄는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다.
“헉! 저희가 어찌 국왕 폐하를 욕되게 했겠습니까요. 다 모르고 한 일이니 한 번만 자비를…….”
굽실대는 키뮤스를 못미덥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알카네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수상쩍으니 수도에 조사단을 요청하겠다. 혹시 너희들이 도망칠지 모르니 감금해 두도록 하지.”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마르크 남작의 영지는 병사들도 얼마 안 되는데다가 놈들에게 돈을 빌린 사람들이 태반인지라 탈출을 도울 수도 있었다. 그것 때문에 다들 고심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 저기요오.”
“또 뭐야! ……아, 자작님. 무슨 일이죠.”
생각지 못했던 문제에 잔뜩 날카로워져 있던 예나스가 끼어든 청년에게 소리쳤다가 상대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저들을 감금하는 것은 저희도 돕겠습니다.”
그의 말에 알카네가 고민이 되는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열세 살짜리 소녀와 결혼하겠다던 자이니 못미더운 듯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모르는 바가 아닌지 자작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장인어른을 곤란하게 하던 자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돕겠습니다.”
“누가 당신의 장인어른이란 말이오!?”
마르크 남작이 기겁하며 반박했지만 자작은 수줍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은 경악스럽다는 듯 그를 쳐다보던 마르크 남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알카네를 쳐다보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키뮤스 일당이 병사들에게 포박되어 끌려가는 것을 보고 있던 알카네는 남작의 말에 씩 웃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무슨 말이신지 모르겠군요. 저희는 그저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수상쩍은 무리들을 체포했을 뿐입니다.”
아아, 무슨 계획인가 했더니. 일부러 시비를 걸어서 조사단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 주려고 했던 거군.
“저희는 이만 가던 길을 가야겠군요. 자엘 룬에 도착하자마자 조사단을 보낼 테니 그때까지 저들의 감시를 부탁드립니다.”
알카네는 남작과 자작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뒤돌아섰다.
“어? 그런데 루시안 씨는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는 걸까요.”
“그러게. 화장실 간 것치고는 너무 오래 걸리는데? 진짜 도망친 거 아냐?”
파르마콘의 말에 예나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찡그렸다. 헉, 그러고 보니 난 잠시 화장실 간다고 일행에서 떨어져 나온 거였지!
나는 기척을 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싶은 곳에서 전력으로 달렸다.
으으! 빨리 이 로브를 벗고 합류해야 돼. 안 그러면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니까.
“시안이 도망칠 리가 없어요!”
렌이 불만스럽게 빽 내지르는 외침을 들으며 나는 달려갔다.
뭐라고 변명을 한다. 아, 그렇지. 화장실 갔다 돌아와서 열심히 길을 달렸는데 아무리 가도 안 보여서 헤맸다고 하면 되겠구나, 헤헤!
……이게 통할 줄 알았는데 합류하자마자 예나스가 공중 옆차기를 날렸다.
그리고 며칠 뒤.
“아참, 그러고 보니 마르크 영지에서 올라온 소식 없어요?”
소파에 앉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렌이 문뜩 생각났는지 물었다.
“응? 아, 그러고 보니 라비스가 편지를 보내왔어.”
렌의 물음에 옆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예나스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들 사건을 해결하는데 부단장이라는 사람이랑 댁은 그렇게 태연하게 놀아도 되는 거야?!
“편지요?!”
반쯤 드러누워 있던 렌이 그 말에 벌떡 일어나며 눈을 반짝거렸다. 만약 렌에게 꼬리가 달렸으면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흔들어 댈 기세로군.
“응, 아마 단장이 받았다고 하던데. 아, 단장!”
렌의 말에 대답하던 예나스가 때마침 지나가던 알카네를 불렀다.
서류를 들고서 지나가던 알카네는 자신을 부른 예나스가 마르크 영지의 뒷일에 대해 묻자 피식 웃었다.
“조사단이 알아보니 키뮤스 그자는 불법으로 음란물을 유통시킨 전적이 있던 자였어. 마르크 영지에 빌려 준 돈들도 범죄로 벌어들인 돈으로 밝혀졌고. 그래서 재산을 몰수하고 국외로 추방했다더라.”
쩝, 그자도 불쌍하군. 하필이면 이 여자들에게 걸려서는…… 쯧쯧! 뭐, 마르크 영지의 일이 잘 해결된 듯하니 다행이로군.
“그 셀르 자작은 어떻게 되었대요?”
셀르 자작이라면…… 13살밖에 되지 않은 쥬디스에게 눈독을 들이던 그 소심해 보이는 예비 범죄자? 서, 설마 정말로 일을 저질러서 체포되었다거나 그런 건가!
“응? 아! 쥬디스도 뭐, 그 사람을 싫어하는 기색은 아닌 것 같대. 라비스 말로는 거의 매일 찾아와서 쥬디스에게 얼굴 도장을 찍고 마르크 남작을 귀찮게 하는 것 같지만, 일단 쥬디스가 성인식을 치를 때까지 기다리는 걸로 마르크 남작의 허락은 받아 낸 것 같아.”
거참, 꽤 소심해 보이던데 의외로 그런 면에서는 남자답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 서류는 뭐예요?”
아까부터 들고 있던 서류가 궁금했던지 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말에 알카네는 쓰게 웃으며 서류를 우리에게 보여 줬다.
“조사단에 끼어 있던 마법 협회의 마법사가 그 자리에 남은 마나의 흔적인지 뭔지를 조사해서 우리가 본 게 진짜 마신의 숨결로 확인되었어. 정말로 놈이 돌아왔으니 수배서도 갱신해야 하지 않겠어?”
그녀의 말과 동시에 내 눈에 보인 것은…….
[린부르크의 악마(신원 불명) - 560,000실링
죄목 ― 마족 소환, 금지된 마법 습득 3건, 금지된 마법의 사용 29건, 327채에 달하는 민가 파괴, 린부르크 경비대 폭행, 폭풍의 기사단 폭행 등등.
몹시 사악하고 위험한 자이니 발견 즉시 가까운 기사단이나 군부대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추가 : 국경을 넘어 도주한 줄 알았으나 자국 내로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입수하였습니다. 사악한 자인 만큼 무슨 짓을 또 저지를지 모르니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혀, 현상금이 늘었다? 게다가 라비스가 말했던 걸 잊지도 않고 금지된 마법의 사용 건수까지 늘렸어?!
간신히 듀로타 왕국으로 도망간 척해서 나에 대한 관심을 돌렸는데 이렇게 되면 완전히 헛수고만 한 셈이잖아!
젠장, 이렇게 된 이상 기필코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정확히 하루 뒤, 나는 특급 수배범들과 다시 조우하게 된다.
내 인생은 대체 왜 이런 걸까?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