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도망 못 쳐 1(24화)
Chap 8 여인본색(3)


쯧,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 없는 작자로군. 슬슬 나서 보실까.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물러가는 게 좋을 텐데.”
잔뜩 목소리를 깔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들의 앞으로 나섰다.
수풀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나를 발견한 남작과 키뮤스 일당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하핫! 네놈이 가짜라는 건 다 알고 있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음, 역시 자신들이 본 린부르크의 악마가 라비스가 내 행세를 했던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건가. 혹시나 해서 마신의 숨결을 만들어 볼까?
프스스.
“풋! 그게 환상 마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 속을 것 같으냐!”
끄응, 일단 나서기는 나섰는데 이런 문제가 있었군. 라비스 녀석이 가짜로서 워낙 날뛴 탓에 진짜인 내가 나서도 가짜 취급을 당하잖아! 그렇다고 마신의 숨결을 정말로 사용하자니 사람을 죽이는 것만큼은 피해 왔던 것이 물거품이 되니 아깝고.
으으, 레즈나를 불러내서 날뛰게 해야 하나.
진짜 린부르크의 악마를 눈앞에 두고서도 못 알아보는 바보들에게 어떻게 하면 저놈들을 내쫓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에 멀리서 익숙한 네 명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히익! 분명히 먼저 떠났어야 할 저 여자들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멀찍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알카네와 렌, 예나스와 파르마콘이었다. 마침내 남작과 키뮤스가 대립하는 곳의 중앙에 선 그녀들은 눈앞의 키뮤스 일당을 훑어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길 막지 말고 비켜.”
태연하게 손짓하는 알카네의 모습에 용병들 중 하나가 기가 차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년들은 뭐야?”
우락부락한 용병의 말에 알카네가 미간을 찡그리며 옆에 있던 파르마콘을 돌아보았다.
“이년들? 파르마콘, 기사를 못 가게 막는 건 무슨 죄지?”
알카네의 물음에 파르마콘은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음, 일단은 업무 방해죄겠죠? 게다가 이년 저년이라고 불러 댔으니 기사 모욕죄도 추가해도 될 것 같은데요. 어림잡아서 오 년 이하의 징역에 일만 실링 미만의 벌금형이 나올 것 같네요.”
알카네의 물음에 파르마콘이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있던 키뮤스가 박장대소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푸하핫, 기사라고? 어떤 멍청이가 계집들로 기사를 만든단 말이야?”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알카네를 비롯한 네 여자는 눈을 번뜩이더니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호오, 이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군. 예나스, 우리 기사단을 만드신 분이 누구지?
“그야 위대하신 국왕 폐하시죠. 이건 엄연히 국왕 모독죄이니 구족을 멸할 수도 있는 대죄인 걸요.
여기서 잠깐. 붉은 장미 기사단에 대해서 알고 넘어가도록 할까? 기사들을 제외하고 붉은 장미 기사단에 대해서 나처럼 잘 아는 사람도 드물걸?
국왕의 기사단 육성 계획 중의 하나로 창설된 특수 목적의 기사단. 소문으로는 신하 중 한 명이 ‘어째서 여성만으로 기사단을 꾸리신 겁니까?’라고 묻자 우리의 위대하신 국왕 폐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취향일세. 존중하게나.’
뭐, 그러니까 그 취향이 뭔지는 일단 넘어가고, 일단은 여기사라는 것 자체가 흔하지가 않으니 신입 단원을 구하는 것이 만만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국왕도 붉은 장미 기사단을 창설해 놓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리 크게 신경도 안 썼으니. 하긴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가 계속 범죄자들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지원자가 드물 수밖에 없었겠지. 그러던 차에 나, 그러니까 린부르크의 악마가 나타났고 그녀들은 자신들의 기사단을 홍보하기 위해 3개월이나 전력을 다해 나를 뒤쫓았다.
으으, 그 덕에 붉은 장미 기사단의 이름이 여러모로 알려지기는 했지만 나는 엄청나게 고생을 했지.
그 수가 대여섯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기사단이기는 해도 일단은 국왕이 관심을 가지고 창설했던 기사단답게 단원 하나하나의 실력은 만만히 볼 수준은 아니다…… 일단은 렌 녀석도.
그러니까 한마디로, 저 키뮤스가 말한 계집들로 기사단을 만든 멍청이는 바이안 왕국의 국왕이라는 거지.
“우리는 수도로 귀환하던 중이었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저자들이 우리 길을 막고 모욕한 것도 모자라서는 폐하까지 모욕했군. 이거 가만히 있을 수 없겠는데.”
알카네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말하고는 품에서 기사단임을 증명하는 배지를 내보였다. 배지를 알아본 용병들 몇몇이 방금 전의 일을 떠올려 배지는 헉 하고 숨을 삼키더니 키뮤스에게서 슬금슬금 물러났다.
“뭐, 뭐 하는 거냐? 저 미친년들의 거짓말에 속은 거냐?”
갑작스러운 용병들의 반응에 당황한 키뮤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치자 용병들 중 하나가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언젠가 내가 판가라스 도적단 토벌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분명히 저 여자들을 본 적이 있어!”
호오, 붉은 장미 기사단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가 있다니. 용병의 말에 키뮤스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지, 진짠가?”
“내 눈이 병신이 아닌 이상 확실해! 반항하는 오크 라이더 가월을 피범벅이 될 정도로 두드려 패고 체포해 가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그 용병의 말에 다른 용병들은 물론 키뮤스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가월이라면 자신들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판가라스 도적단의 두목인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흉악하게 생긴데다가 커다란 늑대를 타고서 황야를 돌아다니며 상인들과 마을을 약탈하기로 유명한 오크였다. 꽤 높은 상금이 걸려 있어서 많은 현상금 사냥꾼들이 노렸었으나 모두 가월의 도끼날 앞에 고혼이 되었었다. 언젠가부터 가월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했더니, 설마 기사단에게 체포당했었을 줄이야!
“나, 나도 붉은 장미 기사단이라면 들어 본 적이 있어. 국왕이 직접 창설한 기사단이랬지.”
용병들 사이에서 붉은 장미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가 속속 튀어나왔다. 항시 귀를 열고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용병들이다 보니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그, 그렇게 무서운 여자들이었나? 헉, 그럼 방금 내가 한 말은…….”
뒤늦게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한 대가를 깨달은 키뮤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동료들을 쳐다보던 아르바가 눈치 없이 소리쳤다.
“기사단이고 뭐고 그게 어쨌단 거요! 그냥 확 덮쳐 버리면 그만이잖아!”
눈치 없는 아르바가 거칠게 검을 뽑아 들며 소리치자 키뮤스와 주변의 용병들이 그의 입을 급하게 막았다.
저기, 그런데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누가 누굴 덮친다고?”
무지막지하게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인 예나스가 손마디를 꺾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한 번 손마디를 매만질 때마다 우두둑! 하는 위협적인 소리가 나왔다.
“어머, 지금 왕실의 기사를 추행하겠다는 뜻 같은데요. 아무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될 테니 정당방위를 해야겠죠?”
예나스의 말을 받으며 파르마콘이 싱긋 웃었다. 그녀가 말한 정당방위의 정도는…… 으, 으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섭군.
해맑게 웃으며 말했지만 호의라고는 쥐꼬리만큼도 보이지 않는 파르마콘의 모습에 모두가 히이익 하고 숨이 막히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기, 기사님들! 한 번만 봐주십쇼!”
“후후, 자신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이제야 깨달으신 것 같군요. 그런데 용서를 받으려면 응분의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정중한 어조로 하는 말이었으나 그 말을 하는 알카네의 분위기는 전혀 정중해 보이지 않았다. 알카네의 말에 키뮤스 패거리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 그런데 말이죠. 너희님들 뭔가 잊고 계신 거 같은데요.
“저기요오…….”
어쩐지 내 존재는 완전히 잊힌 듯한 말도 안 되는 기분에 조심스레 말을 꺼내어 보자 키뮤스 패거리가 만만한 상대를 찾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가짜는 입 다물어!”
뭐, 뭐지. 진짜인 내가 완전히 가짜가 되어 버린 듯한 기분은. 알카네들도 나를 라비스가 린부르크의 악마로 분장한 것이라 여긴 것인지 잠깐 시선을 주더니 물러나 있으라는 듯 작게 웃으며 눈짓했다.
괜히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었기에 알카네의 눈짓에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해 주었다.
어쩐지 굉장히 비참한 기분이야. 흐흑, 난 역시 예나스가 말한 대로 별 볼일 없는 마법사였던 건가.
내가 절망에 빠져서 한쪽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바닥에 이상한 그림을 그리건 말건 알카네들은 키뮤스 일당에게 으르렁 거리고 있을 때였다.
“하! 하! 하! 하! 마르크 남작님. 꽤, 꽤 난처해 보이시는군요.”
얼핏 듣기에도 어색한 것 같은 웃음을 애써 호탕하게 외치며 소심해 보이는 청년이 다가왔다. 호탕하게 외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어색함 때문에 그를 더욱 초라하게 보이게 했다.
그를 발견한 마르크 남작이 무거운 침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셀르 자작…….”
엥? 겉보기에도 귀족이라기보다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심하게 생긴 저 청년이 셀르 자작이라고? 이제 갓 스무 살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셀르 자작이라고요? 제가 알기로는 셀르 자작께서는 쉰 살이 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나와 같은 의문을 가졌는지 알카네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일을 풀어나가던 중에 갑자기 끼어든 저 청년 때문에 흐름이 끊겼으니 짜증이 난 모양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계획인 거지? 아무 생각 없이 키뮤스 일당에게 시비를 걸어서 일을 키웠을 리는 없을 테고.
셀르 자작이라며 나타난 후리후리한 체격의 청년은 처음 보는 이방인이 인상을 가득 찌푸리며 묻자 겁을 먹었는지 흠칫하더니 이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흐흠! 내 아버님이신 선대 셀르 자작께서는 반년 전에 돌아가셔서 내가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렇게 묻는 당신은 누구냐! ……요.”
귀족인 자신에게 어쩌지는 못할 거라 여겼는지 기세 좋게 대답하던 그는 알카네의 표정이 변함없자 마지막에 다시 꼬리를 내렸다. 자작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알카네는 뭔가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흠, 돌아가신 줄 몰랐군요. 아, 그러고 보니 삼 년쯤 전에 선대 자작님께서 수도에 올라오셨을 때 당신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봤었습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붉은 장미 기사단의 단장인 알카네 엘리어네스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수하들이고요.”
그 유명한 붉은 장미의 기사들인 것도 모자라 한 명은 단장이란다. 안 그래도 울상인 키뮤스 패거리의 얼굴이 더더욱 죽을상이 되었다. 음냐, 부단장까지 같이 있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꽤 곱게 살아왔는지 그는 붉은 장미 기사단의 이름을 듣고도 고개를 잠시 갸웃거린 것이 다였다.
“그, 그런가? 아무튼 나는 마르크 남작님과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자리를 좀 비켜…… 주세요.”
음, 눈치가 빠른 사람이로군.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던 자작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의 키뮤스 패거리가 간절한 시선으로 고개를 내젓자 조심스레 마지막 말을 존대로 바꾸었다.
알카네가 렌과 예나스, 파르마콘을 차례대로 쳐다보더니 무언의 동의를 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동안 기다리도록 하지요.”
알카네의 말과 동시에 안도의 한숨들이 터져 나왔다.
안 봐도 뻔하지. 키뮤스 패거리겠지. 그런데 난 뭐 하고 있냐고? 아까부터 바닥에 그리던 이상한 그림을 마저 그리고 있었다!
“흠흠! 마르크 남작님, 요즘 돈 때문에 고민이 크시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정말로 키뮤스 일당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저 소심하게 생긴 자작이란 말이야?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마르크 남작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자신이 뭔가 기분 나쁘게 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셀르 자작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 그동안 도와 드리지 못한 것 때문에 서운하신 거라면 죄송합니다. 저희도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영지를 관리하느라 바빴답니다.”
말하는 것이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물론 저 소심하게 생긴 얼굴로 사채업자를 배후에서 조종할 만한 배짱은 없어 보이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