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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23화)
Chap 8 여인본색(2)
알카네의 이야기에 파르마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정확한 증거도 없잖아요. 셀르 자작도 린부르크의 악마가 나타났다니 놀라서 왕실에 도움을 청한 것이 아닐까요. 도적들과 특급 수배범의 위험성은 천지 차이니까요.”
파르마콘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알카네가 말한 것과 내가 생각한 건 만약일 뿐이니까. 린부르크의 악마가 마르크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허위 사실에 대해 추궁한다면 특급 범죄자가 나타났다기에 민심이 흉흉해져서 급히 알리느라 실수가 있었다. 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고 말이야.
알카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골치가 아픈 거야. 조금 전에 상부에 연락해서 알아보니 키뮤스라는 자는 상인 길드에 소속도 되지 않은 자더라고. 등록조차 되지 않은 상인이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게 수상쩍어. 자엘 룬으로 돌아가면 조사단을 보내 달라고 상부에 정식으로 건의할 생각이야.”
“저기…… 우리가 이 일에 대해 조사해 보면 어떨까요?”
눈치를 살피던 렌이 조심스레 이야기하자 알카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잊었어? 우리는 가짜 린부르크에 대해 알아보러 온 것뿐이야. 키뮤스라는 자에 대해 조사하는 것은 우리 권한 밖이야. 게다가 섣불리 이리저리 들쑤셨다간 오히려 우리는 물론이고 마르크 남작에게까지 피해가 돌아 갈수도 있어.”
하나의 기사단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확실하지 않은 사건에 함부로 휘말리는 것을 꺼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
딱 잘라 이야기하는 알카네의 말에 렌이 뭔가 미련이 남았는지 넌지시 말했다.
“그래도 사채업자들이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혼내 주는 정도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알카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씁쓸한 시선으로 렌을 쳐다보았다.
“렌. 나도 너의 그런 성격은 좋아해. 하지만 우리가 사채업자를 상대한다고 치자. 그다음은 어쩔 건데. 그자들이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계속 머무르며 감시라도 할 거야? 게다가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방해했다며 고발할 수도 있어. 게다가 우리는 한쪽의 말밖에 듣지 못했으니 누가 나쁘고 누가 옳은지도 알 수 없어.”
알카네의 냉정한 말에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렌은 아…… 하는 신음과 같은 소리만을 흘리며 서 있었다.
“차라리 상부에 요청해서 정식으로 조사단을 보내는 것이 나아. 사채업자가 수상하건 아니건, 조사단이 조사하게 하는 수밖에 없어. 사채업자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 다음의 말은 뻔하지. 마르크 영지가 사채업자에 의해 난장판이 되더라도 구경만 할 수밖에 없다는 뜻. 렌 스스로도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라는 것도 여러모로 현실적인 제약이 많구나. 이런저런 가정을 꺼내어 회의를 한 네 사람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털썩.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그래도 내가 사실은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니. 조금은 뿌듯한데?
“어쩌면 도울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는 것도 같은데 말야.”
침대 아래에 내려놓은 내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을 떠올리며 중얼거린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너무 위험하단 말이지. 그냥 알카네의 말대로 조사단이 이곳에 와서 제대로 알아보고 사채업자의 죄를 찾아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나.
“벌써 떠나시려는 겁니까?”
우리가 떠난다는 말을 들은 마르크 남작이 허둥지둥 거리며 뛰어 내려왔다. 얼마나 급했는지 허둥지둥하며 옷의 단추를 여미면서였다.
“예. 갈 길이 멀기도 하고…… 더 머무를 이유도 없으니까요.”
자신이 배정받은 방에서 짐을 챙겨 나오던 알카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쳇,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서두르라고 한 사람이 대체 누군데 가장 늦게 나오는 거야? 덕분에 편안한 아침잠의 여운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고!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
아래층의 소란스러움에 잠에서 깼는지 라비스가 잠옷차림으로 층계에 서 있었다.
알카네가 머쓱하게 웃으며 쳐다보자 라비스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는지 힘없이 웃었다.
라비스의 등 뒤에서 오빠의 잠옷을 꼭 움켜잡은 채 졸린 눈을 비비던 쥬디스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기사 언니들이 나쁜 놈들 다 잡아 주는 거 아니었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이상하다는 듯 말하자 알카네를 비롯한 기사들은 그리 마음이 편하지는 않은지 시선을 피했다. 당황한 라비스가 자신의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써 웃었다.
“쥬디스. 저분들은 바쁜 분들이셔. 우리 때문에 귀찮게 해 드렸는데 곤란하게 하면 못써.”
하나뿐인 오빠의 말에 어린 여동생은 습관처럼 검지를 입에 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들이 린부르크의 악마 행세를 해서 소란을 피운 것과 사채업자들을 처단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를 어린 소녀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출발하자.”
알카네는 담담하게 돌아서며 다른 사람들을 재촉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나와 다른 세 사람도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남작의 저택을 나서려 했다.
“크, 큰일입니다! 그놈들이 영지 북쪽에 쳐들어와서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쾅!
황급히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오며 외친 병사의 말에 남작과 라비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쾅! 하는 소리에 멍하게 변했다.
“크윽.”
그리고 병사가 힘껏 열어젖힌 문에 이마를 부딪친 알카네가 표정을 잔뜩 찡그린 채로 쪼그려 앉아선 이마를 붙잡고 신음을 흘렸다.
방금 전의 쾅! 하는 소리는 저택의 문과 알카네의 이마가 거세게 부딪치는 소리였다…….
피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크게 다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꽤 아프겠지?
잠시 모두가 입을 다물고 침묵.
“히익! 죄송합니다!”
어제 숲에서 우리들을 포위했던 병사들 중 하나였다. 자신 때문에 이마를 움켜쥔 여자가 누군지 알아본 그가 비명을 지르듯 사과했다.
“아니, 괜찮네.”
쪼그려 앉아 있던 알카네는 자신의 꼴사나운 모습을 깨달았는지 벌떡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 뭐 해. 이미 방금 전의 모습을 모두가 다 봤는데.
“아, 키뮤스 놈들이 쳐들어왔다고 했나?”
웃어야 할지 병사에게 화를 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멍하니 있던 남작이 병사가 한 말을 떠올리며 다급히 물었다. 방금 전의 일로 일일이 화를 낼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예. 놈들이 남작님을 불러오라며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단장. 어쩌죠?”
사채업자와 패거리가 다시 왔다는 말에 남작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한 것을 보며 렌이 알카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알카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젯밤에 오간 이야기를 확인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렌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작은 힘없이 웃었다. 기사들이라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은 지난번 왕실의 답변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 아이들로 인해 폐만 끼쳤는데 괜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름대로 손님을 배려하는 말에 알카네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겠습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군요.”
알카네의 인사에 남작은 쓰게 웃었다.
우리가 남작의 저택을 나서려는데 라비스의 목소리가 우리를 붙잡았다.
“딱 한 번만 더 린부르크의 악마님 행세를 하게 해 주세요!”
뒤를 돌아보니 우리를 따라 뛰쳐나온 라비스가 간절한 얼굴로 알카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어떡게 할 거냐는 뜻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라비스에게 툭 내던지듯 말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난 아무 말도 못 들은 거야. 게다가 가짜가 다시 나타난다는 것도 모를 거고.”
풋, 솔직하지 못하기는. 나름대로 허락하겠다는 말이지, 저거? 알카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던 라비스는 이내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받았음에도 일행의 표정은 그리 나아 보이지 않았다. 끄응, 라비스 저 녀석을 그냥 보내도 될까? 사채업자가 자신만만하게 나타나서 남작을 찾는 걸 보면 혹시…… 자신들을 엿 먹였던 것이 가짜라는 걸 알아챈 것 아닐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어느덧 갈림길 앞에 도달했다. 잠시 서 있던 알카네는 흐음 하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방향을 못 잡고 있었다.
쳇, 역시 안 되겠어. 이 몸의 진면목을 잘 아는 꼬마들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윽! 저 지금 화장실이 급한데…… 곧 뒤따라 갈 테니 먼저들 가세요.”
잔뜩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하자 예나스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헤, 도망치려는 건 아니고?”
쳇, 도망치려면 언제고 도망칠 수 있었어! 게다가 설령 도망친다고 해도,
“도망쳐 봐야 수배를 내릴 게 뻔한데 도망치겠어요?”
“음, 하긴 그러네.”
정말로 내릴 거였냐!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예나스를 쳐다보자 알카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가고 있을 테니 금방 오도록 해.”
그러고는 갈림길의 두 가지 길 중에서 하나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들이 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근처의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큰일을 보려는 거냐고? 그럴 리가!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가방을 열었다. 손에 이끌려 나온 것은 온통 검정색인 낡은 로브 한 벌.
“끄응,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찜찜한데.”
아무리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었다지만 린부르크의 악마 때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후우, 심호흡을 깊게 들이쉬고는 단숨에 로브를 뒤집어썼다. 오랫동안 가방에 처박아 두기만 해서인지 텁텁한 먼지 냄새가 한가득 느껴졌다.
“켁! 세탁이라도 해 둘 걸 그랬네.”
투덜거리며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준비해 둔 거울로 살펴보았다.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음침한 분위기가 피어오른다. 어딜 봐도 세간에 알려진 린부르크의 악마 그대로다.
흠, 북쪽이라고 했었지. 나는 어제 확인해 둔 라비스의 마나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기왕 일을 할 거라면 확실히 해 둬야지!
“하하하! 남작님. 대출금의 상환 기일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언제나 되어야 갚을 겁니까?”
통통한 체격의 사내는 보는 사람이 기분이 나빠질 만한 웃음을 터트리며 마르크 남작에게 말했다. 말은 정중했지만 건들거리는 태도나 표정은 악랄한 채권자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이자를 낮춰 주면 안 되겠나. 이자를 갚느라 돈을 마련할 수가 없네.”
남작이 간절한 목소리로 간청했으나 사내는 귀를 후비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자가 높다는 건 남작님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아뇨. 이제 와서 이러시면 곤란하지.”
좀 전보다 조금 더 시건방져진 사내의 말에 남작은 표정을 살짝 굳혔으나 이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갚은 이자가 원금보다 많네! 이만하면 좀 줄여 줘도 되지 않나!”
남작의 발악하는 듯한 외침에 사내는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옆에 있던 사내를 쳐다보았다.
“아르바. 아무래도 저 인간이 우리 돈을 갚기 싫다는 거 같은데, 어쩔까.”
이제는 영주에 대한 존중이라는 걸 말아먹은 듯한 어조였다.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음침하게 생긴 아르바라는 거한이 크게 웃었다.
“크크! 키뮤스 님. 그렇다면 돈 대신 영지나 저택이라든가 하는 돈 될 만한 것들을 모조리 쓸어 가면 그만입죠!”
아르바의 위협적인 말에 안 그래도 어두운 표정이던 남작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놈들은 처음부터 영지를 노린 거였다.
“그, 그런! 국왕 폐하께서 내리신 영지를 너희들이 함부로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분노에 찬 남작의 외침에 키뮤스는 피식 웃더니 아르바가 가져온 만두를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할 거 아냐!”
키뮤스의 말과 동시에 아르바와 용병들이 주변의 기물을 닥치는 대로 던지거나 부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영지민들을 비명을 질렀으나 용병들과 건달들이 두려워 차마 말리지는 못했다. 그 모습의 보는 남작의 얼굴은 보는 것이 안쓰러울 정도로 핼쑥해졌다.
“그, 그만둬라!”
남작이 소리쳤으나 키뮤스는 코웃음을 치며 먹던 만두를 그의 발치에 던졌다.
“아, 그러니까 돈을 갚으면 된다니까? 크크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