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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22화)
Chap 7 잡고 보니 새끼 고양이(4)
“포위당한 모양인데요.”
렌이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힘없이 말하자 사방에서 다가오는 횃불의 모습을 이제야 눈치챈 마르크 남매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이곳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눈치였다.
“일단은 어떻게 된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만. 누가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병사들 사이사이에 낮에 본 영지의 주민들이 잔뜩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낫이나 식칼 같은 것들을 들고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묻는 말에 사람들 사이에서 순박한 인상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장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을 본 마르크 남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아버지가 어째서…… 설마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아들의 당황한 목소리에 마르크 남작은 힘없이 웃으며 쳐다보았다.
“내가 모자라 너에게 힘든 일을 떠맡겼는데 그 책임마저 떠넘길 수는 없지 않겠니.”
잠시 처량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던 라비스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도련님과 아가씨를 놓아줘!”
맨 처음 탐문을 했던 늙은 상인은 무기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막대기를 들고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변에서 아무거나 집어 들고서 허겁지겁 달려온 것 같다.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니 기사를 상대로 맞선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두려우면서도 여기까지 와서 우리를 막아선다는 것은…… 미쳤거나, 아니면 그 정도로 마르크 남매를 귀중하게 여기는 거겠지.
그 모습에 알카네가 한숨을 내쉬며 남작에게 말했다.
“하아, 병사들 몇 명과 민간인들만으로는 저희를 막는 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기사단장과 부단장 급이 각각 한 명씩, 그리고 상급에서 최상급 사이의 기사 두 명. 주위를 살펴봐도 마르크 영지의 병사는 기껏해야 열세 명. 나머지는 모두 가재도구를 들고 있는 민간인들뿐이다.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는지 마르크 남작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잘 안답니다. 그러니…….”
잠시 말끝을 흐리며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던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알카네를 쳐다보며 말했다.
“일단은 식사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어?”
남작의 뜬금없는 말에 무슨 말을 하려나 귀를 기울이고 있던 예나스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그녀와 다를 바가 없었고.
유일하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알카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듣기에는 꽤 긴 이야기인가 보군요.”
아, 그런 뜻이었어? 알카네의 말에 남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쉽게 풀어서 이야기 하란 말이야!
Chap 8 여인본색(1)
그런데 이거, 먹어도 되긴 하려나. 내 앞에 놓인 엄청나게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 점심때가 되었으니 허기가 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곳이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혹시나 우리의 입을 막기 위해 독을 탔다거나 마취약을 넣어서 어떻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선뜻 음식을 입에 가져가지 않고…….
“괜찮은 맛이군요.”
머, 먹었어? 알카네가 식사를 시작하자 다른 세 여자도 식사를 시작했다.
“아, 알카네 씨!”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눈을 가볍게 찡그리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앞으로는 단장이라고 불러. 너도 지금은 정식 단원이니까.”
지, 지금이 그런 걸 지적할 때요?
남작도 바보는 아닌지라 내가 생각하는 것을 대충 짐작했는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끄응,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거지. 그래도 알카네가 저렇게 평온하게 식사를 하는 걸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을지도?
식사를 다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차를 받아 든 알카네는 홍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남작을 응시했다.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남작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라니? 어째서 뜬금없이 그런 말만 하고 끝이냐!
“그냥 한번 해 보고 싶었습니다.”
아, 찬바람이 부는 거 같다. 싸늘한 분위기를 감지한 남작이 말을 덧붙이자 알카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무 집행 방해로 체포할까요?”
“사양하죠.”
가볍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신 남작은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겨우 일 년쯤 전의 일입니다. 가뭄 때문에 엄청난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했는데 다른 영지에서 식량을 사자니 다른 곳들도 상황이 마찬가지라 곡물의 가격이 너무 올라 버린 겁니다. 저희 영지와 영지민들의 재정으로는 무사히 겨울을 넘길 만큼의 식량을 구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표정에는 분노와 서글픔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한탄을 하는 듯한 남작의 목소리를 어린 남매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때마침 갑자기 저희 영지로 찾아온 키뮤스라는 상인에게 돈을 빌려 간신히 식량을 구매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이자가 자꾸만 늘어나서 결국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겁니다. 사채업자는 자꾸만 독촉을 해 대고, 영지민들이 그자들의 행패에 시달려도 저 역시 빚을 진 처지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조용히 듣고 있던 알카네가 갑자기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다. 그러고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갚지도 못할 돈을 빌린 겁니까?”
알카네가 찡그린 표정으로 묻자 남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별다른 수가 없는 걸 어떡합니까? 겨울을 넘기지 못하면 굶어죽는 사람이 나올 지경이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몹시 살갑게 빌려 주는데다가 사람이 좋아 보여서 이렇게까지 독하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치를 떨며 이야기하는 남작은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나이에 비해 더 삭아 보였다.
“이야기를 계속해 주시겠습니까.”
남작의 불쌍한 모습에도 알카네는 전혀 흔들림이 없는 태도로 말했다. 냉정한 건지 아니면 침착한 건지.
“예. 아무튼 제 능력으로는 갚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셀르의 자작께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왕실에 사자를 보내 봤지만 정당한 상거래니 관여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사채업자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영지민들 사이에서 터전을 버리고 떠나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쯤에…….”
잠시 말을 멈춘 남작은 자신의 아들인 라비스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린부르크의 악마라고 칭하는 자가 사채업자와 패거리들을 쫓아냈고, 그 이후로는 아시는 대로입니다.”
내가 쫓길 때 셀르를 지나면서 꽤 부유한 영지라고 생각했는데 셀르의 영주는 이웃이 돈이 없어 고생하는 걸 구경만 할 정도로 야박한 건가? 흐음.
눈을 반쯤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알카네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남작님께서는 아드님이 린부르크의 악마 행세를 한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알카네의 물음에 그는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우리 모두가 이 두 아이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고만 겁니다.”
“아버지…….”
자신을 질책하듯 힘없이 말하는 남작의 모습에 라비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부를 뿐이었다.
남작과 사람들이 어떻게 숲 속에 나타났나 했더니 이미 영지민들도 알고 있었던 거로군. 그래서 우리가 린부르크의 악마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는 걸 남작에게 알린 거였어.
잠시 크게 심호흡을 한 남작은 애써 웃으며 알카네를 쳐다보았다.
“그러니 모든 죄는 저에게 씌워 주시지 않겠습니까. 제 아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남작의 말에 라비스가 깜짝 놀라며 무어라 말하려하자 듣고 있던 알카네가 들고 있던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잘 알겠습니다. 이 일은 돌아가서 상부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럼 제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황한 남작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묻자 알카네는 오히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 아이들이 무슨 짓이라도 했습니까? 그리고 제 생각인데 린부르크의 악마가 이 마을에 나타났다는 건 아무래도 헛소문인 것 같군요. 상부에도 그렇게 보고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태연하게 찻잔을 다시 입에 가져가는 알카네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남작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런데 아무리 단장이 저런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일이 커질 텐데? 그러나 렌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주스를 마시고 있었고 예나스와 파르마콘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이 여자들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어쩐지 억울해지는 이 기분은 뭘까. 여기는 봐주면서, 어째서 나한테는 ‘너에게 돈을 빌려준 기억이 없으니 마음대로 해.’라고 말해 주지 않은 거냐고!
“라비스라고 했었지? 아까 전의 그거, 역시 환상 마법이지?”
아까 전의 모습이 문뜩 생각나 묻자 라비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마신의 숨결과 똑같이 구현해 낸 거지?”
라비스는 잠시 주저하더니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앞에서 그분이 마신의 숨결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딱 한 번.”
응? 마신의 숨결을 사용하는 나를 본 적이 있다고? 어디서 본 거지? 물론 기사단과 마법사들에게 쫓기며 마신의 숨결을 사용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짐작도 못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자꾸 린부르크의 악마를 그분이라고 하던데 왜 하필 린부르크의 악마를 사칭한 거야? 진짜가 자신을 사칭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듣고 찾아와서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물론 내가 무슨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왜 하필 나냔 말이지!
“그자들을 위협할 만한 이름이 필요했어요. 그분의 외모에 대해서 아는 분이 아무도 없으니 속여 넘길 수 있을 것 같았고요. 게다가…….”
잠시 말끝을 흐린 라비스는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그분이라면 자신의 흉내를 냈다고 해서 해코지를 하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맞아요! 두 달 전에 저희가 셀르에서 돌아올 때 숲에서 오크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그분이 마신의 숨결로 우리를 구해 주셨는걸요. 그래서 기왕 할 거면 사람들에게 그분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도적들을 쫓아낸 거예요!”
라비스의 말에 쥬디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 쳤다. 아, 이제야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셀르에서 죽어라 도망칠 때 숲에서 갑자기 숲에서 오크 무리를 맞닥트려서 깜짝 놀란 나머지 마신의 숨결로 날려 버렸었지. 설마 그때 이 아이들이 그 장소에 있었을 줄이야. 그때 마신의 숨결을 봤으니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만큼 유사한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건가?
그, 그런데 말이지…….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군. 금지된 마법의 사용 한 건 추가. 이것도 돌아가면 보고해야겠어.”
결국 나만 더 위험해져 버렸다?!
자신들 때문에 고생했으니 편히 쉬다 가라는 남작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여관방보다 훨씬 편한 남작의 저택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방으로 들어선 나는 환호를 지르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으아, 이런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자는 게 얼마만이람.”
싸구려 여관방의 침대는 딱딱하기 그지없어서 얼마나 등이 쑤셨는지 몰라. 그런데…….
“왜 이 방에 여러분들이 있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어째서 내가 배정받은 방에 알카네와 렌, 예나스와 파르마콘이 모여 있는 거냐고!
예나스가 뚱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싫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
예이, 예이, 그러시겠죠. 저 같은 말단이 하늘과 같은 고참님께 뭐라고 하겠습니까요.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항할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자 예나스는 킥킥하고 웃으며 말했다.
“임시 회의야.”
그러곤 이내 알카네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단장. 어떻게 생각해요?”
알카네는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뭔가 찜찜하단 말이지. 영지 전체를 먹여 살릴 정도의, 그것도 가격이 잔뜩 오른 상태의 식량을 구매하는 데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갈 텐데. 그 큰돈이 상인 하나에게서 어떻게 나왔을까? 게다가 아무리 봐도 마르크 영지는 그런 큰돈을 상환할 능력이 없어. 득보다는 실이 더 클 텐데 뭣 때문에 돈을 빌려 준 걸까?”
그건 그렇지. 돈을 빌려 줘 봤자 상대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손해만 볼 테니까.
“게다가 린부르크의 악마가 나타났다는 걸 알린 것이 셀르의 영주라는 게 더 수상쩍어. 그것도 허위 사실로 말이야.”
응, 허위 사실이긴 허위 사실이지. 사채업자를 선량한 상인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렇고 말이야. 혹시 알카네는 사채업자와 셀르의 영주가 한통속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 그런다고 셀르의 영주가 얻는 게 뭐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