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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21화)
Chap 7 잡고 보니 새끼 고양이(3)
셀르는 바이안 왕국의 구석에 위치한 작은 영지다. 그리고 셀르 영지에는 사채업자가 하나 있다.
뭐, 돈을 빌리고 빌려 주는 일이 어느 영지에 없겠냐만, 이 사채업자는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빌린 돈의 몇 배에 달하는 이자를 받아먹기는 물론이고 돈을 갚지 못하면 폭력배들과 용병까지 잔뜩 동원해서는 집이나 직장에서 난동을 피우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영주조차 그에게 돈을 빌려 쓰고 독촉에 시달리다 보니 영지 내에서 그 사채업자의 위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와 패거리가 영지 내에서 행패를 부려도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니 사람들의 시름만 깊어 갔다.
그러다 보름쯤 전에 린부르크의 악마라고 주장하는 검은 로브의 사람이 나타났고, 평소처럼 빚을 갚으라고 패악을 부리던 사채업자의 패거리들은 린부르크의 악마가 사용한 마법에 깜짝 놀라 도망쳐 버렸다.
그들을 쫓아낸 린부르크의 악마는 뒷산의 숲으로 들어가 버렸고 영지민들은 악명은 높지만 사실은 선한 정의의 사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고 한다.
“예나스 씨, 이제 그만 놓아줘도 되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하는 내내 렌의 볼을 잡고 있던 예나스는 내 말에 그제야 볼에서 손을 놓았다.
“아, 말랑말랑한 게 잡아당기는 재미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너, 너무해!”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어루만지던 렌은 예나스의 말에 당장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울먹거리는 렌과 달래는 예나스를 쳐다보던 알카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도망갈 정도의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혹시 진짜 린부르크의 악마일지도 모르겠어.”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 안심하세요.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령 가짜라고 하더라도 마법을 쓴다면 귀찮아질 수도 있겠네요.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으니.”
살짝 찡그린 표정의 파르마콘이 알카네에게 동의하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용병들도 가짜가 사용한 마법에 놀라 도망쳤다니. 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거지? 만만히 볼 수 있는 마법사는 아니라는 건가.
알카네가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다문 채 그녀의 결정을 기다렸다.
“일단은 린부르크의 악마가 있다는 뒷산의 숲으로 가보도록 하자.”
물론 나도 내 행세를 하는 마법사가 대체 어떤 녀석인지 보고 싶기는 하지만, 숲으로 찾아간다고 해도 그 자가 ‘우하하핫! 내가 바로 린부르크의 악마다!’라고 말하면서 나올 리도 없잖아?
그런 생각을 했는데…….
“거기 멈춰 서라, 악당들아! 이 린부르크의 악마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또 돈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릴 생각이라면 당장 도망쳐라!”
정말로 나와 버렸잖아?!
오후 내내 숲을 뒤지다가 해가 저물 때가 되어 돌아가려던 우리 앞에 나타난 가짜는 후드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체구도 나와 비슷하고, 꼭 나를 보는 것 같네. 그런데…… 보통은 평범한 여행자 차림의 다섯 명 중에 남자라곤 한 명밖에 없는 일행을 보고서 악당이나 사채업자의 패거리라고 생각하지 않잖아.
“가짜네.”
진짜인 나를 본 적이 있던 네 사람은 허탈한 목소리로 단정 지으며 말했다.
“무, 무슨 소리냐 이 악당들! 나는 린부르크의 악마가 맞다!”
우리의 반응에 자칭 린부르크의 악마라고 주장하는 자는 잔뜩 당황한 태도로 소리쳤다. 그런데 어쩐지 목소리가 앳된 것 같은데. 가짜의 옆에 있던 갈색 머리의 평범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말했다.
“그래! 우리 오빠…… 아니, 마스터는 린부르크의 악마가 맞단 말이야!”
아…… 그래, 남매지간이구나. 아무래도 여동생이 레즈나 역할인가 보군.
……영지 사람들도 영지 사람들이지만 대체 이 녀석에게 쫓겨났다는 사채업자와 패거리들은 뭐 하는 녀석들이야? 척 봐도 애들인데!
두 사람의 모습에 알카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긴장하기는 했지만 눈앞의 두 사람에게서는 눈곱만큼의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붉은 장미 기사단이다. 너희를 허위 사실 유포 및 사칭, 그리고 소란 혐의로 체포하겠다.”
그녀가 펼쳐 보인 가죽 수첩 안에는 기사단임을 상징하는 은색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
알카네가 내보인 배지를 잠시 쳐다보던 가짜가 흠칫하고 몸을 떨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 붉은 장미 기사단이라면 분명 그분, 아, 아니, 나를 몇 번이나 궁지로 몰아넣었던 기사단!”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그보다 ‘그분’이라는 건 나를 부르는 건가?
예나스는 어이가 없는지 코웃음을 치더니 검을 뽑아 가짜에게 겨누었다.
“네 녀석이 가짜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진짜 린부르크의 악마에 대해 우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으니까!”
아니, 그건 자랑이 아닌데요. 확신하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확신하신음을 흘리더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앗! 튄다!”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 숲 속으로 달려가는 남매의 모습에 렌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런데 진짜인 나조차 블링크나 텔레포트 스크롤 덕분에 간신히 따돌릴 수 있었던 기사들을 달리기로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아?
“인탱글링 루츠!”
게다가 나도 저 남매가 어째서 내 행세를 하고 다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열심히 달려가는 남매의 발아래에서 칙칙한 회색빛이 감도는 나무뿌리가 치솟아 올랐다.
나를 사칭하던 소년은 몸을 비틀며 피한 덕분에 잡히지 않았지만 여동생은 나무뿌리에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엄마야!”
막 달리던 도중에 발목이 뭔가에 걸리면 관성에 의해 넘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엄마를 찾으며 넘어지던 소녀는 다행히 손을 잡고 있던 소년이 붙잡아 준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남매를 따라잡은 네 명의 여자가 도주로를 막아선 채 포위하고 있었다.
“도망치는 건 포기해.”
별다른 악의 없이 이야기하는 알카네의 말에 소년은 힘없이 고개를 숙이는 듯하더니 손에 쥐고 있던 스태프를 들어 올리더니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린부르크의 악마를 우습게 보지 마라! 내 동료를 놓아주지 않으면 마신의 숨결을 맛보게 해 주겠다!”
가짜의 외침에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으로 다가오던 네 여자의 걸음이 순식간에 멈췄다.
“저거…… 진짜냐?”
다가오던 예나스가 가짜의 스태프의 끝에 치솟아 오르는 회색의 기류를 보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습은 확실히…… 이전에 봤던 것과 같은데요. 하지만 꼭 마신의 숨결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 그래. 저게 마신의 숨결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 회색의 기류가 격렬하게 치솟는 것 정도는 드물기는 하지만 다른 마법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니까. 그, 그런데 어째서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는 거냐고!
……그러고 보니 나 말이야. 지금 저 여자아이의 발목을 잡는다고 인탱글링 루츠에 정신을 집중하느라 움직일 수가 없지? 게다가 우리 일행들 중에서는 저 가짜와 가장 가까이 붙어 있고.
……어, 어라?!
파르마콘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가짜 녀석이 움찔하더니 회색의 구체를 아무것도 없는 빈 공터에 던졌다.
“가, 가짜 같으면 직접 보면 알 거 아냐!”
아무도 없는 공터로 날아간 회색 구체는 한 그루의 나무에 닿더니 주변을 가루로 만들었다.
설마, 정말로 마신의 숨결을 익혔다는 거야? 나를 제외하면 마일론밖에 익히지 못했을 텐데? 아니, 스승님의 서재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던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생각보다 흔한 거 아냐?!
“후후후! 이젠 내가 진짜인 걸 알겠지? 거기 당신! 내 동료를 풀어 줘!”
뭐, 이 자식아? 그게 가짜가 진짜에게 할 말이냐? 가짜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나를 가리키더니 스태프에 또다시 회색의 구체를 피워 올렸다.
그런데 잠깐만. 마신의 숨결씩이나 되는 큰 마법을 연속해서 두 번이나 사용할 수 있다고? 그것도 아무런 무리 없이? 설마, 그건 진짜인 나조차도 조금은 힘들다고.
아름드리나무가 가루가 되어 사라져 가는 모습에 알카네를 비롯한 네 사람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가짜를 바라보았다.
“설마, 진짜 마신의 숨결이라고? 하지만 린부르크의 악마 녀석은 확실히 아냐. 그렇다면 금지된 마법을 익힌 또 다른 녀석인가.”
“단장, 어쩌죠?”
알카네의 굳은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리자 렌이 긴장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알카네는 표정을 찡그리고 있을 뿐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 결정을 내릴 거면 좀 빨리 하란 말이야. 지금 사정권에 가장 가까운 건 나니까!
초조하게 가짜가 만들어 낸 마신의 숨결을 바라보던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마신의 숨결과 똑같다고 할 정도로 닮은 모습에 당황해서 느끼지 못했지만, 가짜가 만들어 낸 마신의 숨결에서는 마신의 숨결 특유의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할까.
“너, 그거 가짜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넌지시 물으니 스태프를 쥐고 있던 가짜의 손이 흠칫하고 떨리는 것이 보였다.
옳거니!
“무, 무슨 헛소리야! 당신도 방금 전에 저 나무가 소멸되는 걸 봤잖아!”
내 말에 가짜가 당황하는 반응을 보고선 알카네를 비롯한 네 사람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뭔가 알아챘음을 눈치챈 거겠지.
“그래? 그럼 말이야…….”
내가 뭔가 말할 듯하며 손을 들어 올리자 가짜는 또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긴장한 기색으로 귀를 기울였다. 사실 입을 연건 속임수다!
“우왁!”
홱!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자갈을 가짜에게 힘껏 던졌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자갈에 깜짝 놀란 녀석이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피하자 스태프에 어려 있던 회색의 기류가 맥없이 흩어졌다. 그리고 조금 전에 가짜가 공격했던 나무에서는…….
“호오.”
산산이 분해되어 소멸된 줄로만 알았던 아름드리나무가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것을 보며 알카네가 감탄을 흘리며 말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자신의 마법이 가짜라는 걸 알아챘냐는 말을 하려는 거겠지. 겁을 먹은 것이 반, 당황한 것이 반인 목소리로 묻는 말에 나는 당당히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흐흐흐, 마신의 숨결이라면 나 역시 본 적이 있지. 마신의 숨결을 사용하면 마나의 뒤틀림으로 인해 마법의 주위로 공간이 조금씩 일그러지거든. 근데 넌 그걸 몰랐던 모양이군!”
물론 본 적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사용하는 마법이지만.
내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치자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렌이 쓸데없는 말을 내뱉었다.
“시안, 지금 엄청 악당 같아.”
저걸 그냥…… 훗! 하지만 지금은 쓸데없는 말에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비장의 한 수가 불발로 끝나자 남매는 더 이상 반항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겁을 먹었는지 몸을 잘게 떠는 것도 보였다.
“그럼 얼굴이나 볼까?”
예나스가 후드를 벗기자 금발에 앳된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뭐야? 애잖아?”
소년의 후드를 벗겼던 예나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한두 살 정도 어려 보였다.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알카네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두 아이에게 수갑을 채웠다.
“돌아가자마자 상부에 정식으로 항의해야겠어.”
저런 어린애나 잡으러 사흘이나 말을 타고 달려온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알카네를 조심스레 쳐다보던 소년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붙잡힌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제발 이 일의 책임을 저 혼자 지면 안 될까요?”
소년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어째서?”
알카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소년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주춤거리며 말했다.
“제 이름은 라비스 마르크라고 합니다. 여긴 동생인 쥬디스 마르크고요.”
소년의 말을 듣고 ‘그게 뭐 어떻다고?’라고 묻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알카네가 멍하게 남매를 쳐다보았다.
“마, 마르크라고?”
그러고 보니 이 영지의 이름이…… 어라?
“예, 제논 마르크 남작님이…… 제 아버지가 되세요.”
영주인 마르크 남작의 아들이라면, 도련님이라는 거잖아. 어째서 이런 짓을?
“만약 지금의 말이 거짓이라면 귀족 사칭의 죄까지 추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알겠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알카네가 위협이라도 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라비스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이 일에 아버지는 연관되지 않게 해 주세요!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미간을 찡그린 채 마르크 남매를 쳐다보던 알카네가 갑자기 작게 움찔거리더니 침음을 흘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렌과 예나스, 파르마콘이 허리춤에 매어 둔 검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이 보였다.
알카네는 쓴웃음을 지으며 라비스를 쳐다보았다.
“미안하지만 그건 무리일 것 같아. 아무래도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거든.”
대답이라도 하듯 수풀 사이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스럭거리는 기척은 한 곳이 아닌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