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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20화)
Chap 7 잡고 보니 새끼 고양이(2)
……저거 어디서 많이 본 수배 전단이다.
“이번 목표다. 익숙한 녀석이지?”
알카네는 눈을 찡그리며 현상 수배 전단을 우리 앞에 내밀었다.
어, 어째서 내 수배 전단이 알카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거야?!
[린부르크의 악마(신원 불명) - 500,000실링
죄목 ― 마족 소환, 금지된 마법 습득 3건, 금지된 마법의 사용 27건, 327채에 달하는 민가 파괴, 린부르크 경비대 폭행, 폭풍의 기사단 폭행 등등.
몹시 사악하고 위험한 자이니 발견 즉시 가까운 기사단이나 군부대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 역시 저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몽타주는 변함이 없군. 그런데 민가 파괴와 경비대 폭행, 기사단 폭행 등은 전부 레즈나가 저지른 건데 어째서 내가 한 걸로 되어 있냐고! 어차피 나로 인한 일이라는 건 맞지만 그래도 찝찝하잖아!
그나저나, 지금 보니 엄청 음침하고 사악하게 그려 놨잖아?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는데 저런 분위기가 나게 그리다니. 뭐, 나야 현실과 몽타주의 괴리가 클수록 의심을 받을 확률이 줄어드니 좋지만.
잠깐, 그런데 나는 국경을 넘어 도망친 걸로 되어 있지 않았나? 내가 여기에 있는데 나를 잡으러 어디로 간다는 거지? 서, 설마 내 정체를 알아채고…… 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그는 분명 듀로타로 도망쳤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해가 되지 않아 조심스레 묻자 알카네 또한 그게 의문인지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이번에 나타난 녀석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놈을 사칭하는 가짜인지 확실하지도 않아.”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에 이리저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에 몹시 기분이 상했는지 알카네는 찡그린 표정으로 내 수배 전단을 거칠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예나스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의욕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가짜든 진짜든 이번에야말로 그놈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어!”
아니, 지금도 충분히 보여주고 계신데요. 으으 어쩐지 이번 일, 말도 안 되게 꼬일 것만 같은 기분이 뭉클뭉클 샘솟는다.
“그런데 이 정보는 어떻게 구한 거죠?”
가만히 보고 있던 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알카네는 울상에 가까운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셀르의 영주가 자신이 린부르크의 악마라고 주장하는 녀석이 나타났다는 제보를 했어. 그리 믿음이 가지 않는 정보이다 보니 상부에서는 우리를 그곳으로 보내 진위를 확인하려는 거고.”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하던 알카네는 참고 있던 울분이 폭발했는지 천장을 향해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명령을 내릴 거면 일단 진위부터 확인하고 보내란 말이야!”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검의 전당으로 달려간 다음 아무나 붙잡고 멱살을 잡고 흔들 듯한 그녀의 모습에 렌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됐건 잘된 일이잖아요. 진짜라면 이번에야말로 놈을 잡을 수 있으니 좋은 일이고 설령 가짜라고 하더라도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범죄자를 잡을 수 있는 거니…….”
렌의 말에 알카네는 더욱 우울한 표정을 짓더니 기사 위원회에서 보내온 명령서를 내밀며 말했다.
“기껏해야 건달이라도?”
[린부르크의 악마와 그의 마족이라고 주장하는 일남일녀는 마르크 숲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마르크 남작의 영지에 나타나 선량한 상인을 습격하고 난동을…….]
“누가 봐도 가짜네. 진짜 놈은 린부르크 이후로는 마족을 불러낸 적이 없어.”
아니, 딱히 불러내지 않았다고는…… 얼마 전에도 불러냈는데.
공문을 멍하니 쳐다보던 예나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놈의 기사단은 마법 협회와 척을 지고 기사 위원회와는 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런 취급을 받는 거야? 이러다 나까지 위험해지는 거 아냐?
“그, 그래도 특급 범죄자를 사칭한다는 사람이 기껏 한다는 짓이 겨우 그거라니 귀엽지 않아요?”
겨, 겨우 그거라니. 이런저런 흉악범들을 주로 상대하다보니 이젠 그런 건달 같은 녀석들은 귀여워 보인다는 거냐? 어쩐지 그거 무서워!
렌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억지로 웃으며 말하자 알카네와 예나스가 도끼눈을 치켜뜨며 동시에 외쳤다.
“전혀!”
저 둘의 의견에는 나도 동감이다. 왜 하필 나를 사칭하는 거야? 그저 사람들을 겁줘서 돈이나 뜯어내고 할 거라면 나 말고도 범죄자는 많잖아! 그러다가 내 현상금이 더 올라가 버린다거나 하면 어쩌려고!
***
“이곳이 바로 그 가짜가 출몰한다는 마르크 영지인가?”
알카네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특급 수배범이 자주 출몰하는 영지치고는…… 너무 활발한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도 그게 이해가 가지 않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일단은 탐문부터 해 보자.”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영지 내부의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알카네는 그렇게 말하고는 근처에 앉아 좌판을 벌이고 있던 상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이 영지에 얼마 전부터 린부르크의 악마가 나타났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무슨 용건인가 싶어 멀뚱히 쳐다보던 늙은 상인은 린부르크의 악마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새하얗게 겁에 질린 표정 대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물론이지! 그분이 이 영지를 괴롭히던 도적놈들을 내쫓아 주셨지! 그 덕에 우리가 얼마나 편하게 살고 있는지 말이야.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 지경이라네.”
상인의 말에 예나스는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며 다시 물었다.
“……도적을 쫓아내 줬다고요?”
“그럼! 물론이지!”
이해할 수 없는 상인의 말에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영지에서 난동을 부린 게 아니라요?”
예나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끼어들며 묻자 상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동은 무슨! 처음에는 특급 수배범이 나타났다고 주민들이 겁을 먹은 적은 있었지만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으셨네. 그런데 자네들은 누군가?”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이 자꾸 꼬치꼬치 캐묻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훑어보았다.
“설마, 현상금 사냥꾼인가?”
뭐, 따지고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정확히는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라 기사지만. 우리가 상인의 이상한 반응에 영문도 모르고 멀뚱히 서 있자 상인은 우리가 긍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는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아가씨들이 그분을 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충분히 당해 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미 붙잡고선 부려먹는 여자들인데요.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한 상인의 말에 발끈한 예나스가 소리쳤다.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거예요?”
“흥! 아무튼 더 해 줄 말은 없어! 이거야 원 재수가 없으려니까.”
상인이 잔뜩 투덜거리며 좌판을 정리하고 자리를 떠나버리자 멀뚱히 서 있던 파르마콘이 알카네를 머쓱하게 웃으며 쳐다보았다.
“어쩐지 저희가 미움 받고 있는 것 같네요.”
파르마콘의 말에 예나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내가 기사가 된 뒤에 별의별 사건들을 다 맡아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나 역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나를 향한 수많은 욕은 들어 봤지만 나를 칭찬하는 말이라니.
알카네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가볍게 매만졌다.
“일단은 삼십 분 뒤에 여기서 모이는 걸로 하고 흩어져서 탐문을 해 보자.”
나도 일단은 내 이름으로 선행을 한다는 그 가짜에 대해 관심이 있었기에 돌아다니며 린부르크의 악마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워낙 작은 영지이다 보니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쫙 퍼진 듯했다.
이야기를 알려 주기는커녕 조금 전의 상인처럼 화를 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로 30분이 흐르자 나는 아까 전의 장소로 돌아갔다.
“뭔가 들은 것이라도 있어요?”
예나스는 찡그린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있었고 파르마콘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내 표정을 보고도 모르겠어? 그러는 너는?”
아무 기대 않는다는 듯한 물음에 나는 그녀의 옆에 쪼그려 앉아 한숨을 내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알카네는 우리 세 사람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패배자 집단에 합류했다.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벌써 퍼진 모양이야. 린부르크의 악마에 대해 물으니 무시하거나 화내기만 하더군.”
알카네의 말에 예나스와 파르마콘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시하고 화만 내면 다행이지.
“게다가 재수 없다며 물을 뿌리거나 소금을 뿌려 대질 않나. 봐요. 간신히 피하기는 했지만 옷이 살짝 젖…….”
투덜거리며 말하는데 어쩐지 조용했다. 내가 세 사람을 보니 그녀들은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저도요.”
“불쌍해라…….”
예나스의 말에 파르마콘과 알카네가 맞장구치며 나를 동정했다. 뭐, 뭐야. 그럼 나만 그런 일을 당한 거야?
“역시 만만하게 생기면 위험하다니까.”
“잠깐, 예나스 씨! 그 말의 뜻은 대체 뭡니까?”
내가 울컥해서 소리치자 그녀는 후후후 하고 낮게 웃으며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어깨와 함께 으쓱해 보였다.
뭐, 뭐야! ‘네 녀석이 정녕 그걸 몰라?’라고 묻는 듯한 저 태도는! 직접 말하는 것보다 더 기분 나빠!
이 모습에 입가를 가린 채 쿡쿡거리며 웃던 파르마콘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부단장이 좀 늦네요.”
그러고 보니 약속 시간인 30분에서 10분이나 지났는데 어째서 렌이 오지 않는 거지? 영지가 워낙 작아서 길을 잃어버리는 게 오히려 더 힘들 텐데?
……잠깐. 그 녀석은 기사단의 부단장이긴 하지만 평소에는 엄청 어리바리한데다가 순진한 구석이 있지. 그리고 이 영지 사람들의 대부분, 아니, 거의 전부는 우리를 싫어한다.
그리고 떠오르는 내가 조금 전에 했던 말.
어, 어쩌면 악질에게 걸려서 물과 소금 세례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더 무서운 건, 렌이 정말 열 받게 되면 엄청나게 무섭다는 거다. ……이건 3개월이나 당해 본 내가 제일 잘 안다.
고개를 돌리니 그녀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 찾으러 가죠.”
내 말에 그녀들은 조금도 이견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렌을 혼자 보내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한 거였어!
그렇게 우리 네 사람은 초조하게 렌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는데…….
“때려도 돼요?”
렌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예나스가 잔뜩 약이 오른 목소리로 묻자 알카네는 이마를 움켜쥐더니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대 정도라면 이번만큼은 봐줄게.”
렌 녀석은 처음 보는 여자아이와 솜사탕을 먹으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예나스 씨, 세 대 중에서 한 대만 나한테 양보해 주시지 않을래요.
우리가 힘이 빠져서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이야기가 끝났는지 여자아이가 렌에게 손을 흔들더니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배웅을 하는 렌의 뒤로 다가가는 마녀가 한 명.
“늦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잔뜩 걱정하게 만들어 놓고 너는 여기서 태평하게 솜사탕이나 먹고 있었던 거야?”
당장이라도 양쪽 볼을 잡아당기는 처절한 응징을 하려는 듯한 예나스의 모습에 렌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영지에 나타났다는 린부르크의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
렌의 대답에 예나스는 물론이고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렌이 말한 것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영지 사람들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아 실망하고 있는데, 솜사탕 가게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그래서 솜사탕을 사주고 린부르크의 악마에 대해 물어보니 술술 대답해 주었다는 건데.
“어쩐지 바보가 된 기분이야…….”
예나스가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렌이 그렇게 간단하게 정보를 구할 동안 우리들은 뭘 한 거지? 으음, 역시 정신 연령이 비슷하면 잘 통하는 건가.
싱글싱글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던 렌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가짜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 그 여자애. 솜사탕 가게의 알렌을 좋아한대.”
알렌은 대체 누구야? ……그딴 것을 우리가 알아서 뭘 하자는 거냐!
“후후후, 부단장님. 어서 이 영지에 나타난 린부르크의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괴롭힐 거야.”
이미 괴롭히고 있잖아. 예나스가 자신의 양 볼을 붙잡고 잡아당기자 렌은 불분명한 발음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