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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못 쳐 1(19화)
Chap 7 잡고 보니 새끼 고양이(1)


으으, 대체 지금 시간이 몇 시지? 어제 렌에게 봉변을 당한 뒤에 힘겹게 방으로 올라와서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간신히 잠들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어젯밤 마신 술 때문인지 머리는 지끈지끈 아프고 속은 울렁거려. 뭐, 뭔가 마실 것이 필요해.
내가 마실 것을 찾아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내가 힘없이 대답을 함과 동시에 잔뜩 주눅이 든 기색의 렌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번에는 노크를 제대로 했군.
“이, 일어났어?”
“뭐, 보는 대로.”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질문에 대답하자 렌은 헤헤 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일어나자마자 예나스나 알카네에게서 어젯밤의 일을 전해 듣고는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에게 사과하러 온 거겠지. 어제 정신을 잃은 렌을 방으로 데려간 것이 예나스와 알카네였으니까.
그, 그런데 사과를 하러 온 거 아니었나? 어째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지?
한참을 멀뚱멀뚱하게 서서 나를 쳐다보던 렌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치더니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시안 화났어?”
“응, 지금 그럴 것 같은데.”
지금 사과하러 온 거냐, 아니면 장난치러 온 거냐? 한참이나 기다렸다가 기껏 들은 말 때문에 머리가 더 아파질 지경이라고!
으으, 너무 천연덕스럽게 물어보는 터라 어쩐지 화내기도 뭣한데. 여기서 내가 화를 내 버렸다간 나만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겠지.
“아참, 단장이 점심 먹고 모이래.”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점심 먹고 모이라니. 아직 아침도…… 헉, 창문을 내다보니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평소에 내가 늦잠을 자면 언제나 렌이 쳐들어와서 깨우곤 했는데.
“오늘은 용케도 안 쳐들어왔네. 드디어 나의 수면 권리를 존중해 주어야겠다는 갸륵한 결심을 하게 된 거냐?”
“아니, 예나스 언니가 오늘은 푹 자게 해 주라면서 못 하게 말리던걸. 그 대신 내일부터는 다시 내가 깨워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허, 예나스 그 여자가 내 걱정을 해 주다니.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렌에게 과실주가 맛있다며 권해 줬던 게…… 예나스잖아!
“다행이다. 시안이 화내지 않아서. 난 이만 준비할 것이 있어서 가 볼게. 그럼 나중에 봐!”
내가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렌은 이내 밝게 웃으며 말하고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저 녀석, 대충대충 넘기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내가 화를 낼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음, 일단은 좀 씻을까. 어젯밤에 옷을 갈아입기는 했지만 아직도 몸에서 퀴퀴하고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우욱!
어기적거리며 욕실로 들어서려는데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도, 도대체…… 이 기사단의 사람들은 노크라는 걸 할 줄 모르는 거냐?!
“여! 드디어 일어난 거냐?”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선 것은 물 잔을 손에 들고 있는 예나스였다.
“적어도 노크는 해 주시지 않을래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믿음이 가지지 않는 태도로 ‘어.’ 하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녀는 잠시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오바이트를 뒤집어쓴 소감은 어때?”
“애초에 렌이 맛이 갈 정도로 술을 잔뜩 먹인 게 당신이잖아요.”
숙취 때문에 머리도 아프고 잔뜩 피곤해서 소리칠 기력조차 없다. 내가 힘없이 묻자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시선을 피했다.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일단 이거부터 마셔라.”
어쨌거나 숙취 때문에 몹시도 목이 마른 참이었기에 그녀가 건네주는 물잔을 순순히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 하려고 했는데.
“우웨에에…… 여기에 대체 뭘 처넣은 겁니까!”
이 쓰고 시고 비릿하면서도 느끼한 이 맛은 대체 뭐야?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게 더 신기해! 숙취를 해소하되 시원하게 토해서 숙취를 하라는 거야?! 아니, 이건 애초에 숙취해소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병이 날 것 같은데!
입에 한 모금 넣자마자 그 괴상한 맛에 그대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주르륵, 하고 그 액체가 흘러내리자 예나스가 눈을 찡그렸다.
“왜 그걸 흘리는 거야? 그게 얼마나 좋은 건데. 숙취에 좋은 거란 좋은 건 다 집어넣었다고.”
다, 당신…… 그냥 물이라든지 꿀물이라던가 하는 정상적인 생각은 해 본 적 없는 거야?
“마음만 감사하게 받을게요.”
“이게 뭐 어때서 그래? 남자라면 어지간한 건…….”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을 마시지 않는 것에 기분이 상한 건지 예나스는 자신이 가져온 것을 입에 가져가 한 모금하더니.
“우웨에에에.”
나와 똑같은 반응을 보이더니 이내 불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물잔의 내용물을 내려다보았다.
“이, 이 정도일 줄이야.”
설마 맛도 안 보고 가져온 거였어?! 으, 그래도 저 엄청난 액체를 맛봤더니 지끈거리던 머리가 확실히 말끔해지는 기분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예나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어제는 미안했다.”
응?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혹시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영문을 몰라 하며 쳐다보자 살짝 인상을 찡그린 그녀는 우물쭈물 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에게 감시를 붙였잖아. 기사로서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고 몰래 감시를 붙이다니. 기사로서 당당하지 못한 짓을 한 것 같다. 그 점에 대해 사과하지.”
아…… 평소에는 난폭하고 까칠한 예나스지만 그녀 역시 기사로서의 진실함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걸까.
“괜찮아요.”
사과를 듣고 나니 예나스에게 가지고 있던 악감정이 조금은 사그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하자마자 예나스는 훗 하는 비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그 덕에 내 생각이 틀린 게 아니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제, 제길. 이 여자를 믿은 내가 바보였지! 3개월 뒤에는 제발 가지 말라고 눈물로 사정해도 한껏 비웃으며 떠나가 주겠어! 그런데 이 여자가 눈물로 사정하면서까지 나를 붙잡으려 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그냥 상상만으로 만족해야겠군.
“이제 용건이 없으면 그만 나가 줄래요?”
물리적인 찝찝함과 정신적인 찝찝함을 씻어 내려면 열심히 씻는 수밖에 없어.
“용건이라. 아, 어제 말한 대로 오늘부터 기초 체력 훈련을 시작하는 건…….”
“차라리 날 죽여요.”
안 그래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도 아파 죽겠는데 훈련이라니. 질려 버린 내가 말을 잘라먹으며 고개를 내젓자 예나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그냥 네 말대로 해 줄까?”
“아, 아니요!”
이 여자라면 충분히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 내가 힘차게 대답하자 그녀는 그제야 인상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내가 시킨 일 중에서 한 가지를 빼먹었더군? 정육점에 가서 고기를 주문하고 와.”
말을 끝까지 들으나마나, 제대로 못 쉰다는 건 같잖아!
“……오후에 주문하러 갈 테니 그때까지라도 자게 해 줘요.”
처량한 내 신세에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나오는 것 같다. 내가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말하자 그녀는 내 모습이 우스운지 킥킥거리며 웃었다.
“농담이야. 고기는 어제 이미 통신기로 주문했어.”
아, 그렇구나. 통신기로 주문…… 뭐, 뭣이?! 그럼 ‘자고로 음식을 만드는 재료를 사는 것은 신중해야 돼. 직접 가서 보고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가장 믿음직하다고.’ 이건 뭐였냐고!
뭔가 속은 듯한 기분에 할 말을 잃은 나를 보더니 예나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푹 쉬어 두도록 해. 이번 임무는 저번만큼이나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저번이라면…… 마일론을 추적했을 때! 으으, 끔찍한 기억이 다시 생각나 버렸잖아. 스타스에게 목을 붙잡혔을 때의 살벌함이란…… 으으!
저번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건 설마!
“특급 수배범. 혹은 그에 준하는 자라는 겁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그냥 뒤돌아섰다.
“자세한 건 나중에 브리핑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거야.”
탁!
문이 닫히고 잠시 동안의 정적. 으으,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야. 일단은 예나스도 나갔으니 하려던 목욕이나…….
그 순간 벌컥! 하고 문이 열리더니 예나스가 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우와악! 또 무슨 일입니까?!”
셔츠를 반쯤 벗고 있던 내가 서둘러 옷을 여미며 묻자 그녀는 킥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너에 대한 감시는 그만두지. 한번 믿어 보겠어.”
목소리나 어조는 상당히 호의적인데 어, 어째서 표정은 ‘한 번만 더 귀찮은 짓을 하면 부단장의 친구고 뭐고 흠씬 패 버릴 테다.’인 거냐고!
그나저나. 특급 수배범, 혹은 그에 준하는 자가 목표라니. 어쩐지 불안해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