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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25화)
5. 두 번째 충돌(5)
문무혁 대위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목책 앞에서 군터를 만나고 있었다.
정 상병의 안전이 확인된 지금 문 대위는 세워 놓았던 계획을 실행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하츠 마을을 발전시키며 조금씩 남작령에 편입하여 이 세상으로 나가려던 계획은 급작스런 드보아 헨켈의 복수심 때문에 사라졌다.
새로 세워진 그의 계획은 단순했고 그만큼 비정했다.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을 손아귀에 넣고 꿀꺽하는 것. 그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문 대위는 남작령 무력의 지휘부를 몰살시켰다.
“아니 저번에 약속드린 세금이 모자라셨습니까? 군터 대공자님!”
“아닙니다. 알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전 이번 출병을 반대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정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문 대위는 군터의 마음을 떠보았다.
“제가 무슨 말씀을 대장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살려만 주십시오.”
군터는 최대한 자신을 낮추었다.
아무리 철없는 그라도 지금 영지가 풍지박살 나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죽이다니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대공자님의 말씀이 맞는다면 저희가 왜 대공자님을 해하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저희가 영주님께 잘못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처음에야 잘 몰라서 세금을 못 냈지만 군터 공자님께 약속을 드린 이후 저희도 세금을 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기 보이시는 거대한 건물도 그것을 위한 준비고요.”
문 대위는 수차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는 강가의 건물을 가리켰다.
솔직히 거대하다는 표현을 하기에는 많이 부족했지만, 군터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물론 문 대위가 가리킨 건물의 용도도 관심 밖이었다.
“압니다, 알고 말고요. 오늘 같은 일은 다시는 없을 겁니다. 제가 다시 약속드리지요.”
군터는 문 대위에게 최선을 다해서 목숨을 구걸했다.
문 대위는 군터가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고 기회를 잡았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대공자님의 말씀을 안 믿으면 누구의 말을 믿겠습니까? 사실 처음 공자님을 뵈었을 때부터 풍기는 기도가 남다르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존귀한 레겐스 남작가의 대공자님은 역시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군터는 문 대위가 자신을 살려 준다는 약속을 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늘에서 가느다란 생명줄이 내려오는 심정이었다. 더군다나 저 무서운 가디언 대장이 자신을 칭찬하지 않는가.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가디언 대장의 말은 가느다란 생명줄이 굵디굵은 동아줄로 변하는 듯했다.
“하, 저희도 이젠 의탁할 곳이 있어야 할 텐데 큰일입니다. 마냥 이런 산골에서 화전민들하고 살기도 이젠 신물이 날 지경이지요.”
군터는 문 대위가 내민 미끼를 덥석 물었다.
“저희 영지로 오시지요. 마침 이번 출병을 주도했던 기사들도 전부 죽어서 기사단의 자리도 전부 비어 있습니다. 제가, 제가 여러분을 저희 영지의 기사로 맞이하지요.”
군터는 자신에게 온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저 강대한 무력을 가진 집단의 주군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지요. 마침 다행스럽! 아니, 아니, 아시다시피 저희 영지의 무력의 기둥이 사라져 어디서든 기사를 영입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대장님이 오시면 대환영입니다.”
문 대위는 군터가 우스웠다. 이렇게 쉽게 넘어오다니.
그가 먼저 자신들을 초빙하게 하려고 얼마나 많은 수를 생각했던가. 그런 고생도 허무하게 단 한 번의 낚시질에 넘어오다니.
자신들의 가신인 기사들이 몰살했는데 마침 다행스럽다는 말까지 해 가면서 말이다.
문무혁 대위는 마지막으로 군터를 흔들었다. 자고로 쉽게 남작령으로 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유비의 삼고초려 정도는 아니라도 그가 간절히 원해서 문 대위 일행이 영입되는 것이 모양새가 좋았다.
“대공자님의 말씀은 참으로 고맙습니다. 심사숙고해서 좋은 방향으로 성사되도록 해 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예전의 약속 말입니다.”
군터는 문 대위의 반승낙이 너무도 기꺼웠다. 그들만 자신의 수하로 데려올 수 있다면 자신을 무시하는 뷔르츠 백작령과 주변 영지의 떨거지들도 문제없었다.
이미 그는 가디언들을 거느리고 떨거지들을 호령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약속 말씀이십니까?”
군터는 겁이 버럭 났다.
“세금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면제해 드리지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신하된 도리로 당연히 내야죠. 제가 말씀드린 약속이란 건 일전에 말씀드린 마법 무구를 뜻하는 겁니다. 솔직히 저희가 가진 마법 무구의 성능은 보셔서 아시다시피 엄청납니다. 그런 만큼 만들기도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듭니다. 그런데!”
문 대위는 살짝 신하라는 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군터가 그 소리를 듣고 좋아하려는 틈을 주지 않고 말을 끊고는 옆에 놓여 있는 정 상병의 AK―47 소총을 들어 보였다.
드보아의 오러에 총신이 싹둑 잘려 있는 소총을 본 군터의 눈은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문 대위는 소총을 그의 앞에서 좌우로 흔들었다.
“이렇게 됐습니다. 보시다시피 이곳이 잘려 있지요. 제 것과 한 번 비교해 보시지요.”
군터는 문 대위가 내민 두 자루의 총을 비교해 보았다. 확실히 불이 뿜어져 나오는 곳이 짧았다.
“약속드린 대로 마법 무구를 대공자님에게 드리려 했으나 저희도 여유가 없습니다. 워낙 자금이 많이 들어야지요. 이것 한 자루를 수만금을 들여 겨우 만들었는데 대공자님의 신하인 그 기사가 잘라 놓았지요.”
군터는 문 대위의 말을 듣고 입을 쩍 벌렸다. 이미 문 대위가 말한 신하라는 말에 기뻐할 기분은 사라졌다. 수만금이라니. 저 마법 무구가 자신의 것이 될 뻔했다니. 그걸 그 멍청한 드보아 헨켈이란 놈이 잘라 놓았다니.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세상에 그 무도한 드보아 헨켈이란 놈이. 역시 그놈은 죽어도 쌉니다.”
군터는 레겐스부르크의 검이라 불리던 충성스러운 신하를 아낌없이 욕했다. 그놈은 그런 욕을 들어도 싼 놈이었다.
* * *
레겐스부르크 남작령 영지군은 수뇌부의 시체만을 겨우 마차에 실고 귀환 길에 올랐다.
군터는 미칠 듯한 마음을 겨우겨우 추스르고 있었다.
그는 문 대위가 소총으로 기사들에게서 벗겨 놓은 갑옷을 100여 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관통시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싹둑 잘린 마법 무구를 바라본 그는 당장에라도 뛰어가 드보아 헨켈의 시체를 짓밟고 싶었다.
가디언 대장의 설명으로는 드보아의 칼에 잘린 마법 무구는 이미 제 기능을 잃었다했다.
군터의 머리로는 그가 건네받은 AK―47 소총의 내부 부품들 노리쇠와 안전장치, 스프링, 공이 등이 전부 빠진 빈껍데기라는 것을 결코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손아귀에 들어왔다 사라져 버린 마법 무구에 대한 원망만이 드보아 헨켈에게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수확이 있었다.
가디언들이 자신의 수하가 될 거라는 믿음이었다. 군터의 믿음이 어떤 식으로 그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는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6. 사람들
군터가 잘린 AK―47 소총 껍데기를 가지고 떠나고 대충 전장 정리가 끝나자 문무혁 대위는 하츠 마을 앞을 유유히 흐르는 베서강가에 앉아 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심난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문 대위는 뒤에서 들리는 김성한 박사의 목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고민이 많으신가 보군요. 어쩌겠습니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구요.”
“김 박사님, 헛걸음하셨네요.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그만.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이라니요. 제가 한 일이 있어야지요. 에미린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어찌 됐든 오늘 일은 잘 마무리됐다고 들었습니다.”
문무혁 대위는 오늘 있었던 일을 사정을 잘 모르는 김성한 박사에게 설명했다.
김 박사는 문 대위가 이야기의 시작 때는 조용하게 그리고 마지막 드보아 헨켈이라는 기사의 돌진과 그의 검에서 뿜어지던 광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열띤 얼굴과 흥분된 어조로 설명하는 것을 간간히 맞장구치며 들어주었다.
김성한 박사는 문 대위의 고뇌를 잘 알고 있었다.
문무혁 대위는 근본적으로 마음이 약하고 착한 사람에 속했다. 그건 그를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그의 부하들의 모습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군인이 됐다는 것이 아이러니했지만, 그가 내린 명령에 의해서 부하들이 살인을 했을 때 문 대위가 받을 상처와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을 모를 김 박사는 아니었다.
그저 지금 그가 문 대위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의 부하들이 해 줄 수 없는, 문무혁이란 남자의 말을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사람은 의외로 마음속의 고민을 입 밖으로 표현하면 말을 하는 중에 스스로 해답을 찾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김 박사는 잘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제 좀 시원해졌네요.”
“하하. 감사라니요. 문 대위님은 저한테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하시는 거 아십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저도 대위님의 부합니다.”
김 박사의 농담에 문 대위는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영주 큰아들에게 준 물건 괜찮겠습니까? 걱정이 되네요.”
“속은 다 빼고 껍데기만 줬으니 괜찮을 겁니다. 거기에다 저희가 영주성의 가신으로 들어갈 언질까지 주었으니 지금은 어떻게 다시 한 자루 얻을까 생각하느라 정신없을 테고요.”
“문 대위님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그런데, 앞으로 계획은 어떻습니까?”
“하츠 마을에서 시간을 벌려던 생각은 접었습니다.”
문 대위는 김 박사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다행히도 오전의 전투에 대한 심리적 고뇌는 벗었는지 김 박사에게 계획을 설명하는 문 대위의 눈은 석양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 * *
부르터의 인생은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었다.
남작령 제일의 상인으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기반이 있으면서도 부르터는 끊임없이 적을 만들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선천적으로 욕심이 많았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사이에 어느새 자신의 주변에는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외로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부에 탐닉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가로챘고, 엄연히 상인 길드에 의해서 상인마다 정해진 품목과 영역이 있음에도 다른 상인의 물품을 거래해 분쟁을 일으켰다.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자기 스스로 외면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부르터는 그런 행동이 야망을 위해서라고 자신의 외로움을 포장했다. 그의 야망은 왕국 제일의 상인이 되는 것이었다.
하츠 마을의 한 오두막에 갇혀 있는 부르터는 자신의 인생이 파멸했음을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가디언들이 전투에서 사용한 마법 물품의 대가로 로펜에게 인도한다는 거래장에 인장을 찍었다.
가디언들이 전투에 사용한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부르터는 이번 원정에 영지군의 보급을 무상으로 맡았고, 그런 행위라면 그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군터가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계약서를 가디언들에게로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터는 왜 그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는지 궁금했다.
조금 전 저녁이라고 음식을 가져온 자치대장이라는 자는 한 달만 고생하면 풀어 줄 거라고 약속했다.
단순히 문 대위 일행이 살인이 싫어서 그를 살려 주는 것이라는 것을 그가 알았더라 하더라도 변할 것은 없었다.
살려만 준다면! 그렇다면 기회는 있었다.
부르터는 복수를 맹세했다.
* * *
마을 자치대 대장인 요르크는 하루 종일 바삐 몸을 움직이느라 조금 풀려 있던 허리에 묶인 검은 띠를 단단히 조여 매고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집으로 귀가할 때 한 집안의 가장은 피곤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귀신같은 빨간 두건의 조교 채명훈 하사의 가르침이 PT체조와 함께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증거였다.
요르크는 채명훈 하사가 존경스러웠다.
천한 화전민이었던 자신을 늑대에서 구해 주었고, 밭만 갈만 갈 줄 알던 그에게 아직도 발음이 힘든 태권도라는 걸 가르쳐 주었다.
그 대가로 얻은 검은 띠는 그에게 일종의 증표와 같았다.
태어나서 말 그대로 무지렁이로 살던 요르크에게 자비와 대지의 신인 미리엄 여신이 주는 훈장!
채 하사 일행을 만나기전의 그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바뀌어 있었다.
솔직히 그들이 오기 전보다는 이런저런 일로 몸도 마음도 힘들었지만, 그 보답으로 식생활은 풍족해졌고, 안전해졌다.
아이들은 포동포동 살이 쪘고, 나날이 똑똑해졌으며 즐거운 노래를 불렀다.
마을의 몇몇 노인네들은 아직도 가디언 일행을 의심 반, 걱정 반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요르크는 노인들의 걱정이 부질없는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요르크는 자신의 집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가 지키고 보살펴야 할 가족이 사는 집이다.
그는 크게 소리쳤다.
“아빠 왔다!”
* * *
마인즈는 마을의 혼란을 뒤로하고 자신의 땀이 배어 있는 제재소에 와 있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빈 제재소에서 끊임없이 웅웅대며 회전하고 있는 톱날을 바라보았다.
처음 문 대위의 계획을 듣고, 정 상병의 설계도를 받아 들었을 때 얼마나 무시했던가.
자신의 무지가 한탄스러웠다.
그리고 대견스러웠다.
지금 이곳에서 돌아가고 있는 제재소는 자신의 작품이었다. 겨우 집이나 짓고 마차나 수레 따위만 만들던 자신이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회전하고 있는 원형 톱날의 옆면을 만졌다.
정 상병이 줄에 펜을 달아 철판의 원형을 잡고, 밀링이라는 물건과 선반이라는 물건으로 철판을 다듬고 톱니를 만들고 귀중한 자신들의 무기를 손톱만 하게 잘라서 톱니에 용접이라는 것을 하는 광경을 옆에서 쭉 지켜봤던 마인즈는 그들의 기술이 놀랍기도 했지만, 문득 이들이 왜 이 땅에 왔는지 궁금해졌다.
못 배운 그이지만 무언가 심오한 신들의 뜻이 담겨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득 그는 정 상병이 가지고 있던 손바닥만 한 귀물에서 보았던 영상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는 건물들과 그 사이를 엄청난 속도로 뛰듯이 걸어 다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마인즈는 다시 회전하는 톱날을 보았다.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한 기분이 밀려왔다.
마인즈는 그의 불안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도래』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