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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24화)
5. 두 번째 충돌(4)
문 대위는 맞은편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레겐스부르크 영지병들과 용병들을 쳐다볼 겨를도 없이 참호 간에 파 놓은 통행로를 달렸다.
마지막 기사의 하얗게 빛나는 칼이 참호를 덮어 놓은 흙과 통나무들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문 대위는 자꾸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을 지우며 정진영 상병이 있던 참호에 도착했다.
군터는 부르터와 정신없이 도망을 치다가 채명훈 하사의 저격을 받았다.
타고 있던 말이 속절없이 죽자 말에서 떨어진 상태 그대로 꼼짝없이 엎드려 있던 두 사람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문무혁 대위의 제일가신(?)인 브렌튼이었다.
브렌튼은 군터에게 모든 병사들의 무기를 버리게 하고 인솔해서 전날 잤던 야영지로 되돌아가라는 문 대위의 말을 전했다.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었던 군터와 부르터 그리고 100여 명의 영지병의 인솔로 문 대위의 명령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끔하게 이루어졌다.
울리히 힘멘도르크는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아직 의식을 잃지는 않고 있었다.
군터는 그런 울리히를 치료해 주기는커녕 친절하게도 입에 재갈을 물리고 꽁꽁 묶어서 브렌튼에게 인수했다.
울리히는 온몸을 휘감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당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파이어 월 마법을 발현하고 두 번째 마법을 케스팅하는 순간 무언가가 자신이 두르고 있던 실드 마법을 뚫고 들어왔다.
전쟁 통에 맞아 보았던 퀴렐 정도의 충격은 튕겨 나갈 정도의 실드였으나 자신이 맞은 그것은 실드를 무시하다시피 했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무언가가 실드에 의해 탄도가 약간 변해 자신의 다리를 관통했다는 점인데 어차피 그 정도 충격이면 케스팅하고 있던 플라이 마법과 실드 마법이 깨어지는 데는 충분한 충격이었다.
그는 10여 미터 상공에서 그대로 추락했다.
천만다행으로 플라이 마법이 풀리면서 추락하는 속도가 느려져서인지 아니면 그가 떨어진 곳이 단단한 지반이 아닌 풀숲이어서인지는 모르지만 관통된 다리 이외에 팔 하나가 더 부러지는 것으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문 대위는 반쯤 무너진 참호의 통나무를 걷어냈다. 역시 급히 달려온 김준성 중사도 문 대위를 돕기 시작했다.
문 대위는 자신을 자책했다.
더 많은 화력을 퍼부었어야 했다.
C―4를 매설하고, 40mm 유탄을 퍼부었어야 했다.
20mm 유탄은 쌈 싸먹으려고 아꼈던가?
그는 뇌리에는 토벌군의 지도부만 몰살시키고 욕심 많은 군터만 살리려 했던 처음의 계획은 이미 아득히 사라지고 없었다.
토벌군을 이기려만 들면 방법은 간단했었다.
야영지에서 그들이 야영을 할 때 40mm유탄을 퍼붓고, K3를 난사하고, 브렌튼에게 선보였던 C―4와 휘발유 조합에 탈레반들이 고이고이 모셔놓은 IED(급조폭발물)용 볼베어링만 더했어도 그들은 몰살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문 대위의 자신의 무능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첫 살인의 공포가 아직도 남아 있는 자신이 미웠고, 지도부를 몰살 한 후 군터를 꼭두각시로 삼아 영지 무력의 상층부 전체가 사라진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을 조정하려던 그의 계획이 미웠다.
적이 자신들을 우습게보게 만들려고 자신이 계획해서 실행한 자치대를 이용한 가짜 매복 작전이 들어맞아, 드보아가 일제 돌격을 명해서 쉽게 지도부를 몰살시켰다는 생각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엄청난 운동 능력을 가진 기사들이 흩어지는 상황이 막강한 무기를 가지고는 있으나 운동 능력은 보통 사람하고 같은 자신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들을 일제돌격 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계획을 짜고 또 수정했는지도 잊었다.
타이밍을 맞추어 마을 사람들이 도망치는 연습을 하느라 밤잠을 못자고 연습했던 일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오직 지금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정진영 상병의 웃는 얼굴뿐이었다.
문무혁 대위는 지금 자신이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곳 사람들 600여 명의 목숨보다 정진영 상병의 목숨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오직 최대한 빨리 무너진 참호에 깔려 있을 정진영 상병을 구출하는데 팔려 있었다.
* * *
에미린은 정진영 상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츠 마을에 와 있었다.
남작 영지 한 개의 전 전력이 투입되는 와중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계인들이 무척이나 신기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에 대한 호기심도 컸다.
기대만큼이나 실망도 컸다.
구덩이를 파고 숨어드는 이계인들의 행동은 기사도를 숭상하고 정정당당함을 외치는 유로핀 대륙의 전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실망은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과 함께 삽시간에 몰살되어 버린 기마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이름 모를 마지막 기사의 오러를 머금은 검이 정진영 상병이 있는 참호를 갈랐다.
그 순간 에미린은 생전 하지도, 듣지도 못한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정 상병이 있던 참호로 내달렸다.
겨우 무너진 참호의 잔해를 헤집고 찾아낸 정 상병은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정진영 상병의 모습을 본 문 대위는 바로 박재훈 병장과 조진 병장을 함께 오크 마을에 있는 김성한 박사에게 보냈다.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승마 경험이 있던 조 병장의 말을 타는 실력이 일행 중 가장 우수했고 모든 것을 다 잘하는 박재훈 병장답게 그의 말 타는 솜씨도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정 상병은 운이 좋았다.
드보아가 죽음을 앞두고 온몸의 오러를 주입해서 휘두른 검의 위력은 대단했다. 참호를 덮고 있는 상당한 두께의 흙을 갈랐고 그 밑의 통나무도 잘라냈다. 더불어 정 상병이 막 들어 올리던 AK―47 소총의 총신을 잘랐고 그가 입고 있던 방탄복까지 베어 버린 모습에 일행은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강철로 된 총신과 방탄복의 세라믹 판까지 자르느라 검의 위력이 급격히 줄어들어 정 상병의 가슴은 베어졌을망정 뼈까지 다치지는 않은 듯싶었다.
에미린은 정 상병을 둘러싸고 있는 이계인들을 헤치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접근하는 모습을 본 분대원들은 자리를 비켜 주었다.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있는 정 상병의 모습을 본 그녀는 가만히 손을 피가 흐르는 그의 가슴에 얹고 나지막이 주문을 읊조렸다.
“힐!”
조진 병장의 연락을 받고 김성한 박사와 민유라 간호사는 최대한 서둘러 하츠 마을로 왔다.
잘 타지 못하는 승마 실력으로 급히 달려오는 바람에 멍투성이가 된 엉덩이를 문지르며 정 상병이 누워 있다는 아카데미로 들어선 두 사람은 에미린과 히히덕거리고 있는 정진영 상병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분대원들은 히히덕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쓰라린 속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일행의 또 다른 공인 커플인 김 박사와 민 간호사가 들어서자 다들 인상을 쓰고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이고, 눈꼴셔서 못 보겠네. 채 하사님, 우리는 언제나 솔로를 면합니까?”
“얌마. 넌 헬가라도 있잖아. 난 뭐냐?”
채명훈 하사는 이준혁 상병의 투정에 핀잔을 주었다.
“헬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래도요. 그냥 불쌍해서 신경이 쓰일 뿐이라고요.”
“웃기지 마라. 불쌍해서 날이면 날마다 음식을 챙겨서 그렇게 들락거리냐? 꼬실 생각이 아니면 그딴 짓을 왜 하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송채민 상병의 핀잔이 이어졌다.
“아, 그나저나 어디서 엘프를 찾나. 그래야 우리도 짝을 만들 거 아니냐? 요즘은 옆구리 시려서 잠을 못 자긋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엘프에게 장가가기 모임을 해체해야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채명훈 하사와 송채민 상병의 넋두리에 이준혁 상병이 쐐기를 박고 도망쳤다.
“앞으로 10년 내에는 힘들걸요. 크크크크. 전 헬가한테 갑니다.”
채명훈 하사와 송채민 상병은 자신들을 약 올리고 도망간 이준혁 상병을 뒤쫓아서 혼을 낼지 말지를 고민했다.
‘두고 봐라. 꼭! 엘프와 결혼하고 만다.’
‘흥! 두고 봐라. 이 상병 나중에 후회할 날이 있을 거다.’
대한민국 해병 정예 수색대 소속의 남자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저 둘은 남자끼리 손잡고 뭐한데?”
문 대위를 찾아 아카데미를 나서던 김성한 박사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옆을 따르던 민유라가 대답했다.
“그러게나요. 혹시 두 사람이 그런 사이?”
외로운 솔로 남자 두 명의 마음이 찢어지는 소리가 석양이 물들어 오는 아름다운 하츠 마을에 울려 퍼졌다.
하츠 마을 사람들은 전장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역시 군터의 영지군처럼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었던지라 수습하는 속도는 빨랐다.
아마도 분명 군터의 영지군이 다시 가져갈 창과 검들은 한곳에 곱게 모아 두었고, 죽은 기사와 기마대가 입고 있던 갑옷을 벗기고 죽은 말의 시체들을 마을로 옮겨 육포로 만들 준비를 하는 마을 사람들의 손길은 바쁘기만 했다.
“김 중사님. 꼭 저 갑옷을 벗겨야 합니까? 찝찝하게스리.”
터덜터덜 마을로 돌아온 채명훈 하사는 마을 사람들을 감독하고 있던 김준성 중사에게 말했다.
“나라고 그러고 싶겠냐? 마을 사람들 말로는 저 갑옷이 엄청 비싸단다. 갑옷 한 개 가격을 대충 계산해 보니 웬만한 소형차 한 대 가격은 족히 되겠더라.”
“휴우∼ 그렇게 비싸요? 그래도 전 영 마음이 내키지 않네요.”
“마음도 싱숭생숭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라. 정 상병이 큰일을 겪었으니 아카데미에 가서 한 번 들여다보고.”
김준성 중사는 은신하고 있던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느라 소식을 못들은 채 하사에게 정 상병이 겪은 일을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정 상병 운도 좋네요. 피가 철철 나는 상처를 한 방에 고쳐 주는 아리따운 귀족 아가씨를 꼬시다니. 흐흐.”
“그러게. 신기하긴 하더라. 그 아가씨가 뭐라고 하니까 상처가 그냥 아물던데. 에미린에게 잘해야겠다. 우리도 언제 신세질지 모르쟎냐.”
“그건 그렇네요. 정 상병의 거만이 하늘을 찌르겠는데요?”
채 하사는 자신이 저격한 두 명의 남, 여 마법사의 시체가 마을 사람들에게 옮겨지는 모습을 보며 의식적으로 밝은 모습을 보이려 했다.
“아이고 부러워라. 하하하하하하하!”
“…….”
그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는 김준성 중사는 웃고 있는 채 하사의 어깨를 말없이 가만히 두드려 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