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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23화)
5. 두 번째 충돌(3)
숲의 상황을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울리히에게 들은 드보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왜 웃으십니까? 적들이 매복해 있다는데요.”
옆에서 함께 울리히의 설명을 듣고 있던 디이터가 드보아에게 물었다.
드보아는 디이터의 질문에 웃음을 멈추고 대답을 했다.
“우선 저들 중에 그래도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특했고, 그들의 잔 머리가 울리히 경의 도움으로 쉽게 발각이 되었으니 아니 우습겠는가? 누군가 머리를 써서 겨우 20여 명의 사람으로 많은 인원이 있는 것처럼 꾸며 우리의 발길을 잡았다는 것은 분명 저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고 있다는 뜻일 것이네. 우리가 급작스럽게 들이닥쳐 저들이 도망칠 시간이 없으니 그런 잔꾀를 낸 것 아니겠는가? 지금 서두른다면 아마도 쉽게 가디언과 화전민 무리를 잡을 수 있을 걸세.”
드보아는 가디언들과 화전민들이 도망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명 되지도 않는 인원을 나눠서 구태여 자신들의 발목을 잡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역시 드보아 경이십니다. 저희가 나타난 것을 보고 놀란 나머지 도망치기 위해서 꼼수를 쓴 것이군요. 그럼 병력을 최대한 빨리 진군시키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그리고 울리히 경, 경은 제자들과 함께 마을을 살펴주게.”
드보아의 대답으로 정지해 있던 레겐스부르크 영지군의 전 병력은 속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울리히로부터 2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등짐을 지고 급히 달아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드보아는 더욱더 영지군을 다그쳤다.
* * *
“선두 기마대가 나타났습니다. 대위님.”
살짝 흥분한 기색의 송채민 상병은 자신의 애병인 K3 분대기관총의 검은 총신을 어루만졌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다들 조심하고. 웃으면서 볼 수 있도록 하자.”
“필승!”
“필승!”
* * *
중갑기마대와 경기마대의 선두에서 달리던 드보아는 급히 말을 고삐를 낚아챘다.
히이이힝!
히이잉!
푸르르릇!
드보아가 급히 말을 세우는 것을 본 기사들과 기마대도 급히 말을 세웠다.
워낙 급하게 말을 세운지라 삽시간에 대열은 흐트러졌고, 사방은 말들의 울음소리로 채워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드보아 경? 울리히 님의 말씀대로 화전민들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말들이 일으킨 자욱한 먼지를 헤치고 디이터가 드보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저기를 보게.”
드보아는 허리에 찬 검을 빼 들어 그 칼끝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디이터는 드보아가 든 검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전면에는 하츠 마을의 목책이 손에 닿을 만큼 가깝게 자리 잡고 있었고, 목책 아래에는 이상한 형상의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사실 그것의 모습은 진지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는 모습이었다.
목책 앞을 따라서 길게 도랑이 나 있었고 도랑 곳곳에는 나무로 지붕이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붕이라고 하기도 어색했다. 마치 개울에 난 나무다리처럼 도랑을 덮었는데 그 위에는 흙이 덮여 있는 모습이 뭐라 설명하기 힘든 형상이었다.
분명 다리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 증거로 흙을 덮은 지붕 아래에는 동그란 모자를 쓴 사람 몇 명이 얼굴만 겨우 드러내고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계곡에서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화전민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어서 돌격해서 저들을 잡아야 합니다.”
디이터는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는 화전민들이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급한 마음이 들었다.
막상 화전민들이 숲 속으로 완전히 도망친다면 지리를 잘 모르는 영지군으로서는 그들을 다시 잡을 방법이 묘연했다.
사실 이번 출병이 드보아의 복수가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상황을 보건데 복수의 대상인 가디언들은 이미 도망치고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화전민들이라도 잡아서 귀환해야 할 것 아니던가?
군터는 최소한 세금이라도 약속을 받아 왔는데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온 그들이 아무 소득 없이 터덜터덜 귀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디이터의 재촉을 들으면서 드보아는 눈앞에 펼쳐진 하츠 마을을 살펴보았다.
목책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보이는 모습으로 보면 도저히 산골 화전민 마을이라고는 볼 수 없는 깨끗한 모습이었다. 마을 앞의 강에는 무언지 모를 거대한 건물에 달린 수레바퀴가 돌고 있었는데 흔히 마을에 한 개쯤은 있는 물레방앗간의 확대판으로 보였다.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디이터의 말대로 화전민들이 도망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드보아는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헨켈가의 고귀한 문장을 이어받을 이자르가 저따위 천민들에게 목숨을 잃다니. 물론 그도 이자르의 죽음이 도망치고 있는 화전민들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도망친 걸로 여겨지는 가디언들의 모습을 찾을 길 없는 지금 누군가는 그가 무신 토비아스에게 바친 자신의 피 한 잔의 맹세의 대가를 치러야 할 터였다.
첫 번째 계곡에서의 꼼수는 웃어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의 꼼수마저 웃을 수는 없었다.
고랑에 숨어 얼굴만 빼꼼하게 내밀고 있는 저 천하디천한 화전민들이 자신을 능멸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 고랑 속의 인간들을 보았을 때 들었던 의심을 지우고 손에 든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맑디맑은 가을 하늘에 솟은 드보아의 검이 햇볕을 받아 반짝거렸다.
드보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전 기마! 돌격!”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드보아의 검이 전방을 향해 힘차게 내리쳐졌다.
드보아 헨켈의 명령을 받은 중갑기마대장인 디이터 경이 이끄는 10기의 중갑기마대와 경기마대장인 오트마 경이 이끄는 30기의 경기마대는 바로 돌진을 시작했다.
40여 미터 떨어진 적 진지를 향한 중갑기마대와 경기마대의 돌진은 출발한 지 불과 10여 미터를 지나자 최고 속도에 다다랐다.
그리고 바로 삐끗대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파여 있는 작은 함정들에 군마의 발목이 빠져 돌진하던 말들이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달리던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발목이 부러지며 나자빠지는 말들이 속출했고, 넘어지는 말의 거대한 몸체는 떨어진 병사의 몸을 덮쳤다.
그리고 그 순간 기마대에게는 파멸이 다가왔다.
* * *
송채민 상병이 참호의 가장 우측에서 거치하고 대기하고 있던 K3 분대기관총의 연사가 달려오고 있는 40여 기의 기마들을 45도 각도에서 덮친 것이다.
세계 1차 대전 때의 최악의 참호전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기관총의 발명이었다.
이전에는 대열을 맞추어 서로 마주보며 다가가면서 총을 쏘는 방식이었던 전쟁 방식은 기관총의 위력에 삽시간에 지루한 참호전으로 바뀌었다.
수냉식 맥심 기관총 2정의 교차 사격이 1개 군단을 저지시키는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본 전쟁 지휘부는 도저히 기존 전쟁 방식을 답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지루한 참호전은 결국 전차에 의한 전선의 종심 돌파가 이루어져 사라질 때까지 수많은 장군들과 죽어 나간 병사들에게 넘을 수 없는 악마의 벽으로 남았다.
비록 단 30초간 이루어진 한 자루 분대기관총의 사격이었지만, 겨우 42기의 기마를 저지하는 데는 너무나도 충분한 화력이었다.
250발 탄띠 한 개 분량의 5.56x45mm 탄환이 덮친 기마대의 돌격 현장은 말 그대로 목불인견이었다.
송채민 상병은 차오르는 손바닥의 땀을 전투복에 닦으면서 전면을 주시했다. 급탄을 도와주던 말 많은 이준혁 상병도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군터와 부르터는 전면에서 벌어진 참상을 보고 그대로 말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인 것이다. 하츠 마을에 살고 있는 가디언들은 괴물이었다. 자신들이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드보아는 자신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기마대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밀려왔다.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중갑기마대, 경기마대와 두 명의 기사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얼마나 영지에 중요한 전력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드보아는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는 남은 기사 3명과 함께 말에서 내려 돌격하기 시작했다. 드보아는 본능적으로 적의 무기가 석궁에서 발사된 퀴렐과 같은 궤도를 그리며 날아온다는 것을 느꼈다.
말을 타면 표적이 되기 쉬웠다. 오랜 시간 동안의 단련으로 숙련된 그의 몸은 그가 의식하기도 전에 드보아의 신형을 갈지자로 이동시켰다.
오랜 시간 드보아와 함께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을 지켰던 3명의 기사는 드보아의 경험과 본능을 넘어서지 못하고 직선으로 참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기사들에게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울리히 힘멘도르크는 실드를 둘러쓰고 플라이 마법을 펼쳐서 허공으로 상승했다. 기마대의 돌격과 시간을 맞추어 펼치려던 마법은 너무 이른 기마대의 몰살에 타이밍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캐스팅해 놓은 4서클 최대의 범위 마법을 도랑에 퍼부었다.
“파이어 월!”
3서클이라서 플라이 마법과 공격 마법을 더블 케스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유겐과 우줄라도 자신들이 시전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 마법인 파이어 볼을 날렸다.
울리히가 시전한 마법은 도랑을 덮쳤다. 하지만 에미린으로부터 마법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문 대위의 철저한 대비로 파이어 월은 참호에 별다른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문 대위의 명령으로 마을 사람들은 참호 지붕을 이루고 있는 통나무들 위에 많은 양의 흙을 깔아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흙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같은 이유로 유겐과 우줄라가 시전한 파이어 볼도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 * *
채명훈 하사는 자신을 자책했다.
마법사가 하늘로 떠오르는 순간을 노렸으나, 기마대가 몰살하는 장면에 잠시 눈이 팔려 기회를 놓쳤다.
순간 마법사의 마법이 펼쳐졌고, 채 하사는 급히 자신의 MSG―90 저격총을 발사했다.
급한 마음인지 하늘에 떠 있는 마법사의 가슴을 겨냥했음에도 그의 다리에 총탄이 명중했다.
마법사가 충격을 받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본 채명훈 하사는 혀를 쯧쯧거리며 총구를 나머지 표적에게 향했다.
대대 최고의 명사수인 그에게 두 번의 실수란 없었다. 단 두 발의 총탄으로 마차 위에서 마법을 사용했던 남, 여 두 명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채명훈 하사는 문득 이번이 자신의 최초 살인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저격총에 달린 10배율 조준경 너머로 보이는 대상의 쓰러지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입안이 썼다.
기사들이 달려오는 속도는 지난번 전투 때의 어린 기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그들과 참호 간의 40여 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달려오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은 일견 장엄하기까지 했다.
참호에 있던 분대원들은 그들이 들고 있는 AK―47 소총을 정조준해서 발사했다.
드보아는 자신보다 앞에 달려가던 기사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들의 어리석음에 한탄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가 직사 무기임을 인식하지 못하다니. 그렇지만 그도 언제까지나 한탄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그도 칼을 들지 않은 왼팔에 그들이 쏜 무언가를 맞았다. 팔을 감싸고 있는 철판을 꿰뚫고 들어온 그것은 자신의 왼팔을 그대로 분쇄해 버렸다.
풀 플레이트 갑옷의 철판이 감싸고 있어서 팔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뿐이지 아마 갑옷을 안 입었더라면 팔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아득히 밀려오는 고통을 참으며 온몸에 오러를 칼날에 담아 눈앞에 있는 참호를 갈랐다.
오랜 수련 과정과 아수라장을 경험한 그에게 자신의 칼끝에 걸리는 피육이 썰리는 느낌이 느껴졌다. 최소한 한 명은 죽인 것이다. 그가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웃음을 지으려는 찰라 그의 머리를 무언가가 꿰뚫었다.
정진영 상병은 도랑에 줄지어 만들어져 있는 참호 중 가장 중간 참호에 있었다.
미친 듯 갈지자로 달려오는 기사를 맞췄을 때는 그를 저지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달려왔다.
들고 있던 AK―47 소총의 탄환이 떨어지자 그는 옆에 미리 준비해 놓았던 여분의 AK―47을 집어 들고 몸을 돌렸다.
정진영 상병은 그 순간 너무나도 어두운 암흑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