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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권
데빌 엠페러 1(1화)
서장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선과 악은 모두 무언가를 위하는 것이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이다.
선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악은 다른 이가 아닌 나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다.
1 장 후회와 기회(1)
무당산을 내려온 이래, 나는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왔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그들을 돕고, 그릇된 일을 보면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다 잘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대개 악한 이들은 선한 이들보다 강했다. 자신만을 위하고 남을 위할 줄 몰랐기에 그들은 강해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할 때,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했기에 그들은 강했던 것이다.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세상은 힘이 지배했고,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악이 될 필요가 있었다.
눈이 흐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이다.
내가 강했다면, 아니 내가 강해지기 위해서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나는 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과 악은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선 속에도 악이 있었으며, 악행을 해도 선행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고 악도 다 같은 악이 아니었다. 그릇된 일을 바라는 악함과는 자신을 위하는 악함은 달랐다. 이전까지는 단지 그것을 구별하려 들지 않았을 뿐이다.
고통이 다시 밀려왔다.
두 손으로 지혈했지만 상처가 너무 컸다. 이대로라면 의식을 잃을 것이고, 호흡이 멈출 것이다.
딱 잘라 말해 죽는 것이다.
젠장! 이대로 죽는 것은 싫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야만 하는 건가? 선을 행한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그때였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살고 싶은가?”
나는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할 힘이 없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대가 생각하면 나는 알 수 있다.”
생각만 하면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전음도 말을 하는 자가 내력을 사용해야 가능한 것이다.
“다시 묻겠다. 살고 싶은가?”
당연히 살고 싶다. 누가 죽고 싶단 말인가? 더 살 수만 있다면……. 더 살 수만 있다면…….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말인가?”
이자는 대체 누굴까? 누구기에 날 살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지? 혹시 신의라 불리는 호양생인가?
하지만 신의라 해도 사람의 마음은 읽어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많은 이들이 내게 이름을 붙여 주었을 뿐이다. 그대의 세상에서는 나를 이렇게 부르고 있다. 청룡(靑龍).”
사신(四神)! 청룡, 주작, 백호, 현무의 그 청룡이란 말인가? 사신 중 하나가 내게 말을 건 것인가?
“정확히는 그 청룡이 아니지만 나는 청룡이라 불린다. 나는 무한의 시간을 다스리는 지배자이며, 영원을 감시하는 관리자이다. 시간에 속박된 자여. 멸망을 피하지 못하는 자여. 그 대는 가여운 운명이로다.”
무한의 시간?
그는 극(極)과 태(太)의 개념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그대가 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오래된 존재. 묻겠다. 그대는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다…… 다만…….
“다만?”
그릇된 악만은 행할 수 없다.
그가 웃었다.
“후후…….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대가 생각하는 악을 행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말해 달라.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어떻게 하면 날 살려 주겠는가?
“그대의 인생을 원한다.”
내 인생?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 그와 인생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인생을 바꾼다고? 그렇다면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대의 얼굴과 모습이 바뀔 뿐이다. 모습이 바뀐다 해도 영혼은 그대의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과 혼을 바꾼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시간이 많지 않다. 바꾸겠는가? 바꾸지 않겠는가? 결정은 그대가 하는 것이다.”
그……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내가 그의 인생을 살아도 괜찮은 건가?
“새로운 인생은 그대의 것이다. 어떻게 하든 그것은 그대의 자유이다.”
좋다. 바꾸겠다.
어떤 인생이 되었든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와 거래를 했다.
2장 루비오(1)
“루비오! 루비오!”
누군가 내 몸을 흔들었다.
귀찮다. 더 자고 싶다.
더 자고 싶다고? 나는 죽은 것이 아니었던가?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청룡의 말대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얻은 것이다.
“루비오! 안 일어날 거야? 오늘 아침은 페트리 교수님 수업이란 말이야!”
낯선 목소리가 방금 전부터 루비오라 부르고 있었다. 이건 아마도 나를 부르는 소리일 것이다.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청룡은 새로운 인생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해 주지 않았다.
뭐, 그래도 좋다.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죽음의 공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루비오!”
그는 계속해서 불렀다.
“루비오! 루비오!”
그는 급기야 내 몸을 흔들었다.
“아아…….”
나는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루비오!”
눈을 뜨자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하지만 난 다시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이 아팠지만 새로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었던 것이다.
시야에 한 소년이 들어왔다. 소년은 황금색 머리카락과 파랗게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루비오! 얼마나 늦게 잤기에 여태 일어나지 못하는 거야? 책상 위에 늘어놓은 약재는 다 뭐고? 우린 마법사가 되려는 거지, 연금술사가 되려는 게 아니란 말이야.”
새로운 나는 루비오라는 이름을 쓰는 것인가?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소년이 허리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어서 옷 입고 책과 지팡이를 챙겨! 페트리 교수님은 귀족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아.”
책? 지팡이?
나는 눈을 비비면서 물었다.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누구야?”
소년이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헤유……. 플린, 자니 드 플린.”
“자니 드 플린?”
“어휴! 이걸 어쩌면 좋아.”
플린은 내게 옷을 던지면서 말했다.
“어서 입고 나가자. 곧 강의 시작이야!”
나는 플린이 던진 옷을 주워들었다. 괴상하게 생긴 옷이었다.
푸른색에 넓고 멍청한…….
상, 하의가 붙어 있는 옷을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플린이 내게 책과 지팡이를 내밀었다.
“자!”
“아, 고마워.”
플린이 내 손을 잡고 방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웅장한 대청이 나타났다. 무당산의 진무대전도 이렇게 넓지는 않았다.
설마, 여긴…… 대청이 아닌 건가?
내가 멍한 눈으로 사방을 바라보자 플린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루비오, 너 오늘따라 더 멍청해 보인다.”
내 이름이 루비오인 건 확실하군.
“루비오, 뭐해? 빨리 가자!”
나는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기……기다려.”
몇 개의 복도를 지난 뒤, 플린이 큰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휴우! 아직 시작은 안 한 것 같네. 루비오, 정말 다행이다.”
플린은 미소를 지으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자, 들어가자.”
플린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엄청나게 넓은 방이었다.
방의 좌우 폭은 20장(60m), 천장의 높이는 대략 10장(30m) 정도였다.
사실 방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대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방 한가운데는 의자가 빼곡히 놓여 있었다. 족히 수백 개는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우리 두 사람을 포함해도 백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의자는 많고 사람은 적었다.
나와 플린은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야.”
플린이 안도했다.
그의 얼굴 표정을 보니 일단 위기는 넘긴 것 같았다.
방 안의 소년, 소녀들은 중원 사람들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이 플린처럼 푸른 눈이나 갈색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와 삶을 바꾼 사람은 중원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 앉은 뒤 심호흡을 했다.
“후우…….”
플린이 책을 뒤적이는 동안 나는 안을 살폈다.
양쪽 기둥을 따라 아름다운 조각상이 잔뜩 서 있었다. 이곳의 조각상들은 절이나 도관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었지만, 여기 있는 조각상들은 그저 장식에 불과한 것 같았다.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마자 누군가 뒤에서 나를 찔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황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또 구석이구나.”
그녀의 눈은 마치 푸른 가을 하늘 같았다.
“오늘은 루비오도 늦었네. 무슨 일이야? 모범생 루비오가 지각할 때가 다 있고. 모두 플린 때문이지?”
그러자 플린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페트리 교수님이 아직 오지 않았어. 지각은 아니란 말이지.”
“호오, 그러셔요?”
“그리고 오늘은 루비오가 늦은 거야.”
“정말?”
“정말이라고!”
“그렇다면 별일이네. 루비오가 늦다니.”
나는 플린과 같은 또래의 소년 같았다.
흠……. 그러고 보니 내가 소년이란 건 짐작에 지나지 않는군.
내가 소년이긴 한 걸까?
이곳에 거울은 없고…….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래를 만져 보는 것이었다. 나는 손을 밑으로 내렸다.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음……. 달려 있었다.
다행이었다. 여자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삶이라면 한 번 살아 본 적이 있었다.
내가 한숨을 내쉰 순간, 앞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왔다.”
연단 옆에 있는 문을 통해 날카로운 눈빛의 중년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중년인은 나와 같은 헐렁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다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연단 위로 올라섰다.
나는 다른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읽는데 익숙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과 거친 호흡, 그리고 구겨진 옷자락, 정돈 되지 못한 책들. 그는 어디선가 급히 뛰어온 것이다.
“늦었군. 늦었어.”
탁!
페트리 교수가 허리에 낀 책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모두에게 말했다.
“아침 회의가 길어져서 늦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모두 평소보다 수업에 집중해 주었으면 합니다. 대표, 시작하지.”
대표라 불린 소년이 일어서서 말했다.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소년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페트리 교수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여러분,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3장 정령 마법의 응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령 마법이란…….”
페트리 교수는 이곳에 모인 소년, 소녀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었다.
흠……. 그렇단 말은……. 나는 그의 제자란 말이군.
사부와 제자가 있다면 이곳은 문파가 틀림없다.
글을 가르치는 서당이라고 하기에는 이곳의 건물들은 너무나 크고 웅장했다.
이곳은 분명 다른 세상의 명문대파일 것이다.
데빌 엠페러 1(1화)
서장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선과 악은 모두 무언가를 위하는 것이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이다.
선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악은 다른 이가 아닌 나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다.
1 장 후회와 기회(1)
무당산을 내려온 이래, 나는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왔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그들을 돕고, 그릇된 일을 보면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다 잘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대개 악한 이들은 선한 이들보다 강했다. 자신만을 위하고 남을 위할 줄 몰랐기에 그들은 강해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할 때,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했기에 그들은 강했던 것이다.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세상은 힘이 지배했고,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악이 될 필요가 있었다.
눈이 흐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이다.
내가 강했다면, 아니 내가 강해지기 위해서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나는 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과 악은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선 속에도 악이 있었으며, 악행을 해도 선행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고 악도 다 같은 악이 아니었다. 그릇된 일을 바라는 악함과는 자신을 위하는 악함은 달랐다. 이전까지는 단지 그것을 구별하려 들지 않았을 뿐이다.
고통이 다시 밀려왔다.
두 손으로 지혈했지만 상처가 너무 컸다. 이대로라면 의식을 잃을 것이고, 호흡이 멈출 것이다.
딱 잘라 말해 죽는 것이다.
젠장! 이대로 죽는 것은 싫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야만 하는 건가? 선을 행한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그때였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살고 싶은가?”
나는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할 힘이 없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대가 생각하면 나는 알 수 있다.”
생각만 하면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전음도 말을 하는 자가 내력을 사용해야 가능한 것이다.
“다시 묻겠다. 살고 싶은가?”
당연히 살고 싶다. 누가 죽고 싶단 말인가? 더 살 수만 있다면……. 더 살 수만 있다면…….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말인가?”
이자는 대체 누굴까? 누구기에 날 살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지? 혹시 신의라 불리는 호양생인가?
하지만 신의라 해도 사람의 마음은 읽어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많은 이들이 내게 이름을 붙여 주었을 뿐이다. 그대의 세상에서는 나를 이렇게 부르고 있다. 청룡(靑龍).”
사신(四神)! 청룡, 주작, 백호, 현무의 그 청룡이란 말인가? 사신 중 하나가 내게 말을 건 것인가?
“정확히는 그 청룡이 아니지만 나는 청룡이라 불린다. 나는 무한의 시간을 다스리는 지배자이며, 영원을 감시하는 관리자이다. 시간에 속박된 자여. 멸망을 피하지 못하는 자여. 그 대는 가여운 운명이로다.”
무한의 시간?
그는 극(極)과 태(太)의 개념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그대가 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오래된 존재. 묻겠다. 그대는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다…… 다만…….
“다만?”
그릇된 악만은 행할 수 없다.
그가 웃었다.
“후후…….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대가 생각하는 악을 행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말해 달라.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어떻게 하면 날 살려 주겠는가?
“그대의 인생을 원한다.”
내 인생?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 그와 인생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인생을 바꾼다고? 그렇다면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대의 얼굴과 모습이 바뀔 뿐이다. 모습이 바뀐다 해도 영혼은 그대의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과 혼을 바꾼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시간이 많지 않다. 바꾸겠는가? 바꾸지 않겠는가? 결정은 그대가 하는 것이다.”
그……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내가 그의 인생을 살아도 괜찮은 건가?
“새로운 인생은 그대의 것이다. 어떻게 하든 그것은 그대의 자유이다.”
좋다. 바꾸겠다.
어떤 인생이 되었든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와 거래를 했다.
2장 루비오(1)
“루비오! 루비오!”
누군가 내 몸을 흔들었다.
귀찮다. 더 자고 싶다.
더 자고 싶다고? 나는 죽은 것이 아니었던가?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청룡의 말대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얻은 것이다.
“루비오! 안 일어날 거야? 오늘 아침은 페트리 교수님 수업이란 말이야!”
낯선 목소리가 방금 전부터 루비오라 부르고 있었다. 이건 아마도 나를 부르는 소리일 것이다.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청룡은 새로운 인생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해 주지 않았다.
뭐, 그래도 좋다.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죽음의 공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루비오!”
그는 계속해서 불렀다.
“루비오! 루비오!”
그는 급기야 내 몸을 흔들었다.
“아아…….”
나는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루비오!”
눈을 뜨자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하지만 난 다시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이 아팠지만 새로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었던 것이다.
시야에 한 소년이 들어왔다. 소년은 황금색 머리카락과 파랗게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루비오! 얼마나 늦게 잤기에 여태 일어나지 못하는 거야? 책상 위에 늘어놓은 약재는 다 뭐고? 우린 마법사가 되려는 거지, 연금술사가 되려는 게 아니란 말이야.”
새로운 나는 루비오라는 이름을 쓰는 것인가?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소년이 허리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어서 옷 입고 책과 지팡이를 챙겨! 페트리 교수님은 귀족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아.”
책? 지팡이?
나는 눈을 비비면서 물었다.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누구야?”
소년이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헤유……. 플린, 자니 드 플린.”
“자니 드 플린?”
“어휴! 이걸 어쩌면 좋아.”
플린은 내게 옷을 던지면서 말했다.
“어서 입고 나가자. 곧 강의 시작이야!”
나는 플린이 던진 옷을 주워들었다. 괴상하게 생긴 옷이었다.
푸른색에 넓고 멍청한…….
상, 하의가 붙어 있는 옷을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플린이 내게 책과 지팡이를 내밀었다.
“자!”
“아, 고마워.”
플린이 내 손을 잡고 방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웅장한 대청이 나타났다. 무당산의 진무대전도 이렇게 넓지는 않았다.
설마, 여긴…… 대청이 아닌 건가?
내가 멍한 눈으로 사방을 바라보자 플린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루비오, 너 오늘따라 더 멍청해 보인다.”
내 이름이 루비오인 건 확실하군.
“루비오, 뭐해? 빨리 가자!”
나는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기……기다려.”
몇 개의 복도를 지난 뒤, 플린이 큰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휴우! 아직 시작은 안 한 것 같네. 루비오, 정말 다행이다.”
플린은 미소를 지으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자, 들어가자.”
플린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엄청나게 넓은 방이었다.
방의 좌우 폭은 20장(60m), 천장의 높이는 대략 10장(30m) 정도였다.
사실 방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대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방 한가운데는 의자가 빼곡히 놓여 있었다. 족히 수백 개는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우리 두 사람을 포함해도 백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의자는 많고 사람은 적었다.
나와 플린은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야.”
플린이 안도했다.
그의 얼굴 표정을 보니 일단 위기는 넘긴 것 같았다.
방 안의 소년, 소녀들은 중원 사람들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이 플린처럼 푸른 눈이나 갈색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와 삶을 바꾼 사람은 중원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 앉은 뒤 심호흡을 했다.
“후우…….”
플린이 책을 뒤적이는 동안 나는 안을 살폈다.
양쪽 기둥을 따라 아름다운 조각상이 잔뜩 서 있었다. 이곳의 조각상들은 절이나 도관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었지만, 여기 있는 조각상들은 그저 장식에 불과한 것 같았다.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마자 누군가 뒤에서 나를 찔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황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또 구석이구나.”
그녀의 눈은 마치 푸른 가을 하늘 같았다.
“오늘은 루비오도 늦었네. 무슨 일이야? 모범생 루비오가 지각할 때가 다 있고. 모두 플린 때문이지?”
그러자 플린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페트리 교수님이 아직 오지 않았어. 지각은 아니란 말이지.”
“호오, 그러셔요?”
“그리고 오늘은 루비오가 늦은 거야.”
“정말?”
“정말이라고!”
“그렇다면 별일이네. 루비오가 늦다니.”
나는 플린과 같은 또래의 소년 같았다.
흠……. 그러고 보니 내가 소년이란 건 짐작에 지나지 않는군.
내가 소년이긴 한 걸까?
이곳에 거울은 없고…….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래를 만져 보는 것이었다. 나는 손을 밑으로 내렸다.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음……. 달려 있었다.
다행이었다. 여자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삶이라면 한 번 살아 본 적이 있었다.
내가 한숨을 내쉰 순간, 앞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왔다.”
연단 옆에 있는 문을 통해 날카로운 눈빛의 중년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중년인은 나와 같은 헐렁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다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연단 위로 올라섰다.
나는 다른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읽는데 익숙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과 거친 호흡, 그리고 구겨진 옷자락, 정돈 되지 못한 책들. 그는 어디선가 급히 뛰어온 것이다.
“늦었군. 늦었어.”
탁!
페트리 교수가 허리에 낀 책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모두에게 말했다.
“아침 회의가 길어져서 늦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모두 평소보다 수업에 집중해 주었으면 합니다. 대표, 시작하지.”
대표라 불린 소년이 일어서서 말했다.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소년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페트리 교수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여러분,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3장 정령 마법의 응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령 마법이란…….”
페트리 교수는 이곳에 모인 소년, 소녀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었다.
흠……. 그렇단 말은……. 나는 그의 제자란 말이군.
사부와 제자가 있다면 이곳은 문파가 틀림없다.
글을 가르치는 서당이라고 하기에는 이곳의 건물들은 너무나 크고 웅장했다.
이곳은 분명 다른 세상의 명문대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