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데빌 엠페러 1(2화)
2장 루비오(2)
문득 무당산을 처음 오르던 날이 생각났다.
끝없이 이어진 전각과 구름 사이로 보이던 태화궁.
무당산의 건물들은 일류 화공의 붓끝으로 그려 놓은 듯 수려하고 웅장했다.
이곳은 어떨까? 이렇게 넓은 궁이라면 무당산 못지않은 경관을 자랑할 것이다.
페트리 교수의 목소리가 상념에 잠긴 날 깨웠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페트리 교수는 어떤 사람일까? 내 스승님처럼 근엄하고 무서운 사람일까? 아니면 대사형처럼 외유내강한 사람일까?
일단 겉모습에서는 특별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빛나는 안광도 고집스러운 수염도 없었다. 얼굴의 주름은 나이와 비례했고, 이마에서 가끔 흘러내리는 땀은 그가 수업에 열심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페트리 교수가 계속해서 말했다.
“정령 마법은 정령과 직접 계약해서 그들을 소환하는 정령술과는 다릅니다. 정령 마법은 하늘과 땅, 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감사하고 그들에게서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정령 마법의 원천인 것입니다. 마나를 모으고, 기술적으로 그것을 다루는 것은 그다음의 일인 것입니다.”
하늘과 땅, 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감사하고 힘을 빌린다라…….
그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토납법인가?
나는 일찍이 스승님께 토납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도가의 무공은 무위자연, 즉 세상과 어우러짐을 중시했다. 그래서 내공을 수련할 때도 토납법을 중시했다.
도가의 토납법은 앞서 페트리 교수가 설명한 것처럼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땅, 물, 바람, 산, 나무, 바위, 하늘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이다.
페트리 교수가 설명하는 내용은 무당파의 토납법과 매우 유사했다.
나는 토납법은 물론 무당파의 여러 내공 심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정령 마법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며, 마나의 양에 의해 그 효력이 정해집니다. 마나를 모으는 곳은 각자의 지팡이나 마도구이며 개인의 역량에 따라 그릇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정령 마법?
아마도 내공 심법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겠지.
내가 사부님께 배운 것은 진무신공과 무당심법이었다. 어릴 때는 무당심법으로 기초를 쌓고, 커서는 진무신공으로 내공의 운용법을 배웠다.
페트리 교수가 계속 말했다.
“지팡이나 마도구에 끼어진 마정석과 마나석들은 그 순도에 따라 저장할 수 있는 양이 달라집니다. 이건 다른 강의에서 다루는 내용이니 짧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페트리 교수의 설명은 이상했다.
애써 모은 정기를 어째서 지팡이나 마도구 같은 도구에 밀어 넣는단 말인가? 검기를 쓰기 위해서인가?
검기도 단전에서 흘러나오는 내력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토납법으로 모은 내력을 검에 흐르게 해 봐야 검기는 쓸 수 없었다. 한 번의 호흡으로 모은 정기는 검기가 될 만한 양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틀렸다. 토납법을 통해 정기를 모은 뒤, 소주천을 일주해 단전에 모아 두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언제든 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내공이란 쌓으면 쌓을수록 그 위력이 배가된다. 지팡이에 모아서 짧게 한 번 사용하고 마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도움이 되었다.
페트리 교수는 계속해서 정령 마법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토납법의 기초적인 것에 불과했다.
잠시 뒤, 나는 지루해지고 말았다. 페트리 교수는 손님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점쟁이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 학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넣어 두는 쪽이 페트리 교수의 설명을 듣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새로운 사부님께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전의 삶에서 모든 것을 이미 배운 터였다.
“루비오 군.”
짧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난 아직 루비오라는 내 이름이 어색했다.
“루비오 군.”
두 번째로 내 이름이 울려 퍼졌다.
그때, 파란 눈의 소녀가 뒤에서 나를 찔렀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루비오, 페트리 교수님이 부르시잖아.”
나를? 나를 부르는 건가?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다급히 일어났기 때문일까? 주변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얼굴을 들지 못할 만큼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트리 교수가 나를 향해 말했다.
“루비오 군. 자네는 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는 작은 막대를 들어 올렸다. 막대는 서당에서 사용하는 회초리보다 약간 더 굵고 길었다.
나는 막대의 용도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건 아마도 지금처럼 한눈을 파는 제자를 벌하는데 쓰는 것일 것이다.
페트리 교수가 막대를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자네는 내 강의가 마음에 들지 않나?”
스승의 질책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강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 사부였다.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페트리 교수는 내 대답이 불만스러운 듯 목소리를 높였다.
“루비오 군. 앞으로 나오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나가 연단 위로 올라섰다.
“루비오 군, 방금 내가 설명한 것을 들었겠지? 2학년이니 마법 정리도 끝냈을 테고. 제2과정을 할 수 있겠나?”
마법 정리? 제2과정?
뭔지는 잘 몰랐지만 내가 속한 항렬에서 꼭 알아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페트리 교수의 눈이 빛났다.
“오호, 그래?”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설마 난 함정에 빠진 것인가?
페트리 교수가 막대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루비오 군, 마나를 모아 보게. 마법 성립 제2과정의 중요한 부분이니, 할 수 있겠지? 자네도 이제 2학년이지 않나.”
마나? 페트리 교수의 설명을 토대로 분석해 보면 마나란 땅, 물, 바람에서 얻은 정기를 말했다. 그렇다면 토납법으로 단전에 내력을 모으면 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페트리 교수는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할 수 있겠나?”
그가 왜 놀라는 것이지? 내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나는 약간 교만해지고 말았다.
‘좋아. 더 크게 놀라게 만들어 주지.’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페트리 교수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좋아. 자네가 마나를 모으는데 성공하면…… 이번 학기 B+ 학점을 보장하지.”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B+ 학점이래…….”
“그 악명 높은 페트리 교수님이잖아. 교수님이 이런 적이 있던가?”
“성공만 한다면 루비오 녀석 쉽게 학점을 따겠는데?”
“하지만 루비오가 어떻게 마나를 모아. 우린 겨우 이론만 배우고 있잖아. 실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하이 클래스 애들뿐이잖아.”
“무리니까 페트리 교수님이 파격적인 제안을 한 거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마나, 즉 정기를 모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초보자라면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 수련을 한 사람이라면…….
아뿔싸! 난 완전 초보자였던 것일까? 성취가 느린 정도가 아닌 완전 초보자라면…….
후! 완전 초보자가 토납법을 능숙하게 구사한다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페트리 교수는 2학년이라고 했다. 두 번째 학년이라면 처음 시작한 사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니 완전 초보자일 가능성은 낮았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후…….”
그러자 페트리 교수가 나를 재촉했다.
“루비오 군, 왜 그러나? 못 하는 건가?”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객기를 부리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야.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큰 망신을 당할 뿐이지. 처음부터 못 하겠다고 용서를 빌었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못 할 거라고?
가슴속에서 오기가 꿈틀거렸다. 여기까지 나온 이상 뒤로 뺄 수는 없었다. 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두 손에 숨을 불어넣으면서 말했다.
“하겠습니다.”
페트리 교수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좋아. 나는 여기서 자네가 잘하는지 똑똑히 지켜보겠네.”
나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고는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주변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 바닥에 앉았어.”
“뭔가 새로운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알게 뭐야. 이상한 책이라도 읽은 모양인데……. 잘될까 모르겠어.”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주변에 흐르는 기의 흐름을 잡을 수 없었다. 마음을 비우고 하늘과 땅, 그리고 물의 존재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초보자가 아니었다. 사방이 시끄럽다고 해도 언제든 마음을 비울 수 있었기에 곧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사라졌다. 눈과 귀를 다스려 외부와 벽을 쌓은 것이다.
나는 흩어져 있는 물과 바람, 그리고 대지를 찾았다. 놀랍게도 연공 시작과 동시에 친근한 느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근처에 용맥이나 지맥이 흐르는 것일까?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양의 정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흘러든 정기를 소주천을 따라 일주시켰다. 새로운 몸은 혈맥이 하나도 뚫려 있지 않은 듯 각 관문마다 기의 흐름이 느려졌다.
하지만 나는 몸에 흘러든 막대한 양의 정기로 막힌 곳을 모두 뚫어 버렸다. 이후, 정기를 일주시켜 단전으로 흘려보냈다.
더없이 쾌적한 느낌이었다. 진작 이런 곳을 알았더라면 나는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었을 것이다.
탁!
그때였다. 누군가 내 머리를 내리쳤다.
“큭!”
머리는 중요한 대혈이 모여 있는 곳이다. 운기행공 도중에 그곳에 충격을 받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맥이 온통 뒤집혔다. 전신의 기혈이 뒤틀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나는 급히 기혈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흘러든 정기의 양이 많아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때 페트리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비오 군. 대체 뭐하는 건가? 나는 분명 지팡이에 마나를 모으라 했는데……. 자네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마나를 이리저리 흐트러뜨리고 있지 않은가?”
페트리 교수가 지팡이로 내 머리를 내리친 것이다. 그는 가볍게 내리쳤지만…….
난 기가 막혔다.
스승이란 자가 제자를 주화입마시키려고 하다니……. 이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그에게 가지고 있었던 약간의 존경심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이어 페트리 교수가 말했다.
“루비오 군, 어서 자리로 돌아가게! 자네는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한 것 같군.”
나는 그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들끓는 기혈을 가라앉혀야 하는데 어떻게 일어서서 자리로 돌아간단 말인가?
적어도 향 한 대 태울 시간은 필요했다.
그러나 페트리 교수는 내 기맥을 완전히 망치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루비오 군.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 건가?”
페트리 교수가 다가와 나를 흔들었다.
몸을 흔들다니! 더 이상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크윽!”
정기가 단전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모든 기혈에 상처를 냈다. 온몸이 칼로 베이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으으으윽!”
빌어먹을! 이걸로 끝인 건가? 이럴 수는 없었다.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설마 청룡이 내게 사기를 친 것은 아니겠지?
“루비오 군!”
“루비오!”
“어떻게 된 거야?”
“페트리 교수님! 루비오가!”
“루비오 군. 정신 차리게!”
사방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의 목소리도 또렷이 들리지 않았다.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