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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3화)
2장 루비오(3)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고요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삭……. 사삭…….
아니,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군.
누군가 방에 있었다.
이 소리는…….
그래, 책장을 넘기는 소리군.
방 안에 있는 누군가가 책장을 넘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나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누운 채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가부좌를 취하지 않아도 흩어진 정기를 모으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나는 흩어진 정기를 조금씩 모아서 단전으로 인도했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정기가 모여들었다. 정기가 다친 혈맥을 통과할 때마다 섬뜩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이를 악물었다. 신음 소리를 내면 책을 읽고 있던 사람이 움직일 것이다.
누군가 날 방해한다면 앞서와 같이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숨을 죽여 연공을 했다. 정기를 모으고 그것으로 다친 혈맥을 다독였다.
그렇게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흩어졌던 정기들이 소주천해서 단전으로 흘러들어 갔다.
잠시 후면 이것도 마무리될 것이다. 연공이 모두 끝난 것이다.
‘정말 큰일 날 뻔했군.’
숨을 죽였기 때문일까?
책을 읽는 사람은 내 연공을 방해하지 않았다. 나는 흩어진 정기를 단전에 모은 뒤 연공을 끝냈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솔직히 좀 더 쉬고 싶었다. 그래서 누운 채로 더 휴식을 취했다.
쉬는 동안 생각했다. 페트리 교수는 어째서 나를 주화입마 시키려고 했던 것일까? 설마 운기행공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단순한 이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 페트리 교수는 수십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는 사부가 아니던가?
나는 긴 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루비오 군?”
목소리가 가늘었다.
여자?
“루비오 군. 일어난 거야?”
드르륵!
그녀가 커튼을 걷어 내자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루비오 군, 괜찮아?”
나는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태산의 선녀? 아니다. 선녀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는 다만 평범함을 넘어선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다행이야, 루비오 군. 페트리 교수님이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몰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페트리 교수? 그가 날 걱정했다고? 제자를 주화입마에 빠뜨리려 했던 사람이? 그것참 고마운 노릇이군.
“방금 전까지 교수님이 여기 계셨어.”
그는 위선자다. 애초에 그가 내 연공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기다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는 것이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들 수업중이야. 점심시간까지는 아직 삼십 분 남았어.”
삼십 분?
그렇군. 이곳의 시간을 재는 단위일 테지. 이곳은 중원이 아니다. 시간을 말할 때 시진이나 각을 쓰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점심시간까지는…… 아니 오늘 하루는 푹 쉬도록 해. 힐링으로 치료했지만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천산의 빙설처럼 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나는 그녀의 눈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은 플린이나 강의 때 본 소녀보다도 훨씬 푸르렀다.
“감사합니다.”
이윽고 그녀가 오른손 식지를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열도 없고, 괜찮겠지 루비오 군? 설마 보건소을 기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루비오 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면 외교 문제가 된단 말이야. 자신의 몸에 좀 더 신경을 써 줬으면 좋겠어. 아프면 바로 보건소로 오고. 할 수 있겠지?”
외교 문제? 무슨 말이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
그건 그렇고 내가 그녀를 기피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방으로?”
“네. 아참, 혹시 한 가지 부탁을 할 수 있을까요?”
“부탁?”
“부축을 좀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내가 도와줄게.”
그녀는 얼굴만이 아닌 마음씨도 고운 것 같았다. 보나마나 인기가 많겠지?
내 다섯째 사매는 그녀처럼 아름다웠다. 그래서 많은 무당파 제자들이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많은 제자들 중 그녀의 마음을 얻은 이는 한 명뿐이었다.
물론 그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 내가 부축해 줄게.
그녀의 손길은 더할 수 없이 따뜻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아 내 방으로 향했다.
사실 혼자 걷지 못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의 길을 몰랐기에 혼자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도와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복도와 대청을 지나면서 나는 그것들을 머릿속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오늘부터는 이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렇다면 이곳을 내 집처럼 여길 수 있어야 했다.
큰 회랑을 지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 계단…….
그래, 기억이 난다.
이 계단은 플린이 내 손을 붙잡고 내려왔던 그 계단이었다.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루비오의 방이 어디더라?”
그녀는 내 방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다.
나는 아침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플린은 나를 저쪽에서 끌고 나왔다. 계단의 위치로 보건데 저쪽이 확실……. 제길 확실하지는 않았다. 기억이 흐릿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른쪽입니다.”
그러자 그녀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아! 오른쪽이었지. 그래! 스웨인 왕국 학생들은 저쪽이었지.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나를 부축해 오른쪽 복도로 접어들었다.
이곳의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이층 복도에 늘어선 방만 해도 수백 개는 족히 될 것 같았다.
밖에도 이렇게 큰 건물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황궁과도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찾았다!”
그녀는 열여섯 번째 문 앞에서 멈췄다.
“여기 루비오 군의 이름이 있네.”
나는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맑게 웃었다.
“그럼 몸조심하고. 다시 한 번 말해 둘게. 몸에 이상이 있으면 반드시 보건소로 와야 해. 루비오 군, 잊지 말라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내가 몇 살인지도 몰랐다.
문을 닫은 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방도 넓었다.
왼쪽 벽면에는 책장이, 반대편에는 책상이 놓여 있었다.
“후―! 혼자만을 위한 방 치고는 거창한데?”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침대 위를 비췄다.
무당파에서 이렇게 큰 방을 쓰는 것은 결혼한 부부와 일대 제자뿐이었다.
나는 어떤 이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난 지금부터 그것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 약병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약병 겉면에는 길고 가는 글씨가 깨알처럼 쓰여 있었다.
“폴리아케미나스?”
음? 내가 이 이상한 글씨를 읽을 수 있는 건가? 어째서 가능한 거지? 나는 이 글자를 배운 적이 없는데.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한자뿐인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의 편의를 봐준 거지. 글씨를 모르면 생활이 안 될 테니까.”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긴 은발의 사나이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청룡!”
“청룡이라니. 사르디안므 님을 말하는 건가? 미안하지만 난 그분이 아닐세.”
그는 청룡이 아니었지만 청룡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은발의 사나이가 내 물음에 대답했다.
“난 시간의 수호자 마드라므. 사르디안므 님의 하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걸세.”
시간의 수호자?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건가?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어째서 날 찾아온 것이죠?”
마드라므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
그는 대단한 미남자였다. 이제껏 그와 같은 미남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르디안므 님의 고약한 취미 때문이지.”
사르디안므의 고약한 취미란 십중팔구 나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자네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하기 위해서 왔지.”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계약에서 빠진 부분인가요?”
마드라므가 길쭉한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렇다고 해 두지. 그분은 무엇을 하든 설명을 많이 안 하시거든.”
“어떤 것입니까?”
“자네의 행동에 관한 것일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앞으로 만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자네의 이전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네.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나?”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말한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영혼이 바뀌었다는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래도 자네에게 확답을 듣고 싶네.”
나는 표정을 굳히면서 말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된 겁니까?”
마드라므가 혀를 찼다.
“쳇! 자네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알고 있는가? 사르디안므 님은 그저 지켜보시기만 할 뿐 전혀 도와주시지 않아. 차원을 무시하고 영혼을 옮긴 것도 모자라. 죽어 가는 자를 살리다니…….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걸까.”
그는 내가 살아났기에 뭔가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드라므가 피식 웃었다.
“뭐, 자네가 죄송해야 할 건 없지. 자네는 내가 말한 것과 사르디안므 님과의 약속, 그 두 가지만 잘 지키기만 하면 되는 거야.”
“계약은 충실히 수행할 것입니다. 방금 말한 것도 지키겠습니다.”
그러자 마드라므가 내 어깨에 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자네에게 각인 주문을 걸어 버리면 간단할 텐데……. 사르디안므 님은 어째서 그러지 못하게 하는 걸까. 자네는 사르디안므 님과 어떤 관계인가?”
내가 막 대답을 하려는 순간 그의 몸이 빛을 뿜어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가 사라지고 없었다.
“질문을 던지고 사라지다니? 예의가 바른 사내는 아닌 것 같군.”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를 훔치고 지나갔다.
“예의가 바르지 못한 것 같다고? 바쁜 것이라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사라졌다고 생각한 마드라므가 내 뒤에 서 있었다. 가슴이 섬뜩했다.
그래서 난 반격했다.
“이런 식으로 절 놀리시는 겁니까?”
마드라므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후후……. 놀리려는 의도는 아니었네.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어서 말이야.”
마드라므는 인간이 아닌 존재 치고는 빈틈이 많은 것 같았다.
“자네가 궁금해하는 것은 것들은 책상 위에 있네. 자네의 가족이나 그에 따른 이야기들 말이지. 영혼이 바뀐 것이기에 기억을 옮길 수는 없었다네. 자네가 고생을 좀 하게.”
그러니까 가족 사항이나 그에 따른 것들이 저 위에 적혀 있으니, 직접 머릿속에 넣으란 말이군.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드라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해가 빠르군.”
그도 청룡처럼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마드라므가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진짜 사라지도록 하지. 앞으로 다시는 자네 앞에 나타나는 일이 없을 걸세. 이별일세. 영원을 여행하는 자여.”
다음 순간, 섬광과 함께 마드라므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진짜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마드라므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했다.
“영원을 여행하는 자. 이건 나를 말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