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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4화)
3장 암살자(1)


시간의 수호자 마드라므가 사라진 뒤, 나는 멍하게 서 있었다.
“후우! 우화등선한 신선이라고 해도 그들만 못 하겠지. 그들은 인간이 아닌 신이니까.”
다시 의자에 앉았을 때 나는 오른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의 제목은 루비오 연대기…….
루비오 일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책상 위에 있다고 하더니 손에 쥐어 주고 갔군. 이상한 사람이야. 아, 사람은 아니지.”
나는 책을 펼친 뒤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책에 나오는 인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었다.

―알란 드 루비오
스웨인 왕국의 공작이며, 군무 대신이다. 전쟁에서 수차례 공을 세워 지금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들인 루비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다.

―란지 드 발칸
루비오의 형이다. 그는 계모의 아들로 발칸 백작의 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루비오 공작의 친아들이 아니다. 그의 친아버지는 공작 부인의 전남편인 발칸 백작.

―안나 드 루비오
알란 드 루비오의 두 번째 아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발칸 백작을 공작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전처의 아들인 룬 드 루비오를 죽이려 하고 있다.

―마리안느 드 루비오
루비오 공작과 안나 드 루비오 사이에서 태어난 딸. 루비오와 사이가 좋다. 그 때문인지 어머니와는 불화가 있다.

얼핏 보아도 가족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작위를 노리는 공작 부인이라……. 평온한 집안은 아니군.”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약병들을 치우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이건 대체 왜 이렇게 늘어놓은 거야? 생사단이라도 만들려고 한 건가?”
똑! 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루비오, 있어?”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루비오 연대기를 책상 서랍에 넣으면서 대답했다.
“누구?”
“나야, 세실.”
세실? 누구지?
누군지 몰랐지만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문을 열면서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니야. 몸은 괜찮아?”
그녀의 파란 눈을 보는 순간, 나는 그녀가 내 뒤에 앉았던 소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 마음이 놓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보다시피 괜찮아.”
세실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오늘 오전 강의도 전부 빼먹고, 점심도 안 먹었잖아. 그래서 보건소로 찾아갔는데, 거기에도 없고……. 무슨 일이 난 게 아닌가 걱정했어.”
점심시간이 지났다고? 마드라므 때문에 끼니도 거르게 된 거군.
나는 살짝 말을 돌렸다.
“잠을 좀 잤어.”
그녀는 순순히 내 말을 믿었다.
“그랬구나. 다음 강의는 들어올 거지?”
음……. 다음 강의라……. 어떻게 해야 하지? 그 플린이라는 소년이 없으니 어딜 나갈 수가 없군.
나는 보건소에서 썼던 방법을 다시 한 번 쓰기로 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러는데, 세실이 도와줄 수 있겠어?”
“그렇게까지 안 좋은 거야? 그럼 쉬는 게 좋지 않겠어?”
“다들 열심히 하는데 나만 빠지면 곤란하잖아. 배울 것이 산처럼 많은데 말이야.”
그녀는 잠시 망설인 뒤 말했다.
“음, 알았어.”
내가 문밖으로 나가려 하자 세실이 말했다.
“지팡이하고 책은?”
“아! 보건소에 두고 온 것 같은데.”
“할 수 없네. 그럼 보건소부터 가자.”
나는 반 발짝 뒤에서 그녀를 따라갔다.
복도에는 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다.
내가 학생들이 왜 많은지 묻자, 세실은 강의와 강의 사이의 시간이어서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대답을 해 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내가 그 이유를 모르는 걸 이해할 수 없는 것이리라.
가능하면 그녀에게 질문을 하지 말아야지.
여자의 직감이란 무서운 것. 자칫 정체가 탄로날 수도 있었다.
보건소에 도착하자 앞서 만났던 미인이 우리를 반겼다.
“루비오 군, 괜찮아?”
“괜찮습니다.”
“오라, 세실 양이 보살펴 주는 건가?”
세실이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유피아나 선생님, 그런 거 아니에요. 루비오의 책과 지팡이를 찾으러 왔어요.”
그녀의 이름이 유피아나였군.
유피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그건 방금 플린이 가져갔는데? 자기가 루비오에게 전해 주겠다고 말이야.”
“플린이요?”
플린이? 길이 엇갈린 건가?
우리는 보건소을 나와 플린을 찾아 나섰다.
세실은 초조해 보였다.
“강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플린은 어딜 간 거지?”
쿵!
누군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몇 명의 소년이 한 명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소년을 알고 있었다. 그는 플린이었다.
세실이 어깨를 움찔하면서 말했다.
“루비오, 플린이야. 어째서…….”
플린을 둘러싸고 있는 소년들은 키가 크고 덩치도 우람했다. 플린은 그들을 당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건방진 녀석!”
“그러게……. 어디서 이름에 드를 붙여.”
“가짜잖아. 이 녀석의 이름.”
세실이 소년들을 알아보고는 말했다.
“저들은…… 상급생들이야.”
상급생이라? 사형(師兄)쯤 되는 걸까? 나이 어린 사제를 괴롭히다니. 못난 사형들이군.
플린은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바닥에는 두 개의 지팡이와 책 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내게 책과 지팡이를 전해 주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그들과 마주친 것이다.
“눈에 띄지 말라고 했지?”
플린이 몸을 웅크리면서 말했다.
“나는…… 나는…….”
퍽!
플린의 옆구리를 누군가 걷어찼다. 플린은 숨을 쉬기 힘든 듯 헉헉거리면서 다음 말을 내뱉지 못했다.
나는 세실을 지나쳐 앞으로 나갔다.
저들은 악이었다. 그것도 그릇된 악이었다. 나는 악을 용납할 수 없었다.
세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루비오, 안 돼. 다섯 명이나 되잖아…….”
나는 오른손을 들어 흔들었다. 괜찮다는 신호였다.
무당산을 내려온 뒤, 이런 불량배들을 수없이 만나 왔다. 여럿이 남을 괴롭히는 이들은 보통 실력이 형편없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멈춰라!”
소년들이 일제히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세실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루비오가…… 루비오가 사고를 치고 말았어. 선도위원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가장 키가 큰 녀석이 나를 향해 말했다.
“멈추라고? 저건 누구야?”
그러자 붉은 옷을 걸친 소년이 대답했다.
“루비오 같은데?”
“루비오? 스웨인의 루비오 공작의 아들 말인가?”
“그래, 약골 루비오.”
“이거 잘되었는데. 마침 저 녀석도 손을 봐주려고 했었단 말이야.”
“할 거야? 스웨인 왕국 사람이잖아?”
“물론. 내가 스웨인 왕국 따위를 겁낼 것 같아? 뼈대도 없는 스웨인이나 메디세는 거품일 뿐이야. 겁낼 것은 없어.”
소년들은 쓰러진 플린을 뒤로하고 내게 다가왔다.
자신들보다 작은 소년을 여럿이서 괴롭히다니. 이건 비겁하다 못해 한심했다.
이들은 어디서 배운 것일까? 그릇된 악 중에서도 가장 저급한 악을…….
빨간 옷을 입은 소년이 내 어깨로 손을 뻗으면서 말했다.
“이봐, 루비오. 페트리 교수 수업 때 뻗었다면서? 약골이 나대면 그렇게 되는 거야.”
나는 그의 손이 어깨에 닿기 전에 몸을 움츠리면서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그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돌려 버렸다.
나는 상대의 무공 수위를 몰랐기에 전력을 다해서 손을 썼다.
손목이 돌아가는 순간 소년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악! 손이!”
내가 사용한 것은 무당파의 금나수인 호조십삼수 중 두 번째 초식인 호조영수였다.
나는 소년의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무공을 모르는 건가?”
소년들은 대답 대신 주먹을 날렸다.
“이 녀석!”
“감히 에릭을 쳤어!”
“루비오 주제에!”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때린 게 아니라 손목을 꺾은 것뿐이야.”
소년들은 무공을 배우지 못한 듯 손발을 쓰는 법이 형편없었다.
이런 실력이라 떼로 몰려다닌 건가? 혼자서는 하급생 하나조차 당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약한 하급생을 괴롭혀 쾌감을 얻었을 것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남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는 것, 그것은 정말로 그릇된 악이었다.
내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들의 손발을 피하면서 급소를 가볍게 타격하는 것만으로 모두를 제압할 수 있었다.
“크윽!”
“악! 얼굴이…….”
“허리가…… 숨을…… 숨을 쉴 수가…….”
나는 허리를 숙인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소년의 등을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이 바닥에 쓰러졌다. 남은 것은 키가 가장 큰 소년뿐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플린에게 용서를 빌어라.”
소년이 얼굴을 붉혔다.
“용서를 빌라고? 루비오, 네 녀석이…… 감히 내게 그런 말을 내뱉다니.”
나는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잘못을 알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건가?”
그러자 소년이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반성이라고? 벌레 같은 녀석이! 지금 당장 어깨를 부셔 주마!”
그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