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데빌 엠페러 1(5화)
3장 암살자(2)


나는 슬쩍 몸을 옆으로 움직여 그의 팔을 피했다. 그러고는 오른발로 그의 다리를 걸었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가 바닥에 쓰러졌다.
이렇게 간단히 균형을 빼앗겨서야 어떻게 힘을 쓴단 말인가? 남을 괴롭히기 전에 자신부터 다스려야 하는 것을…….
나는 발을 들어 소년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타격감이 전해져 왔다. 이 정도 타격감이라면 늑골이 몇 개는 부러졌을 것이다.
조금 심하게 손을 쓴 것일까?
예상대로 소년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세실이 다급하게 외쳤다.
“루비오, 사람을 죽이면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 죽지는 않아. 그보다 플린은 어때?”
“아! 플린…….”
그녀는 재빨리 플린을 향해 뛰어갔다.
나는 꿈틀거리는 소년들에게 다가갔다.
“다시 한 번 플린을 괴롭히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소년들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사…… 살려 줘.”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나 단 한 명만은 빌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지르고 있던 소년이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악!”
늑골이 부러졌는데도 달려드는 것을 보면 근성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았다.
그 근성을 좋은 일에 썼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단전에 모아 두었던 내력을 다리로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발뒤꿈치로 소년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이 수법은 무당파 무영신각의 일초인 무영투지였다. 상대의 다리를 가격해 뼈를 부러뜨리는 위력적인 초식이었다.
소년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튀어나왔다.
“으악!”
늑골과 정강이뼈가 부러진 소년이 바닥을 뒹굴었다. 심한 부상에 근성도 한계에 달했는지 소년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아아악!…… 죽는다. 나 죽는다.”
나는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죽는다고? 엄살부리지마! 지금의 고통을 똑똑히 뇌리에 새기란 말이야. 이유도 없이 남을 괴롭히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소년은 계속해서 비명을 내질렀다.
“내 다리! 내 다리!”
그의 비명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와 우리를 둘러쌌다.
그중에는 학생들의 사부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나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루비오 군, 이게 무슨 짓인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나는 두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악당들을 혼내 준 것뿐입니다.”
악당들을 혼내 줬지만, 나는 그날 수업을 하나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

은발이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와 있었다. 은발의 주인공은 아름다운 여인도, 날카로운 눈을 가진 미청년도 아니었다. 그는 번뜩이는 안광을 가진 노인이었다.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내 마음을 읽으려는 듯.
나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은 스승님의 눈과 닮아 있었다.
20년 전 이별한 내 스승님.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무당산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노인은 스승님과 비슷한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서 말했다.
“자네는 자네의 행동이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앞서 그는 자신을 아카데미의 학장인 돈 드 넬슨이라고 소개했다.
무당파로 따지면 장문인과 마찬가지인 위치였다. 그런 높은 사람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악당은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던가?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들이 먼저 플린을 때렸습니다. 플린은 잘못한 것이 없었는데도 맞았습니다. 이것은 부조리한 일입니다. 옳지 못한 일입니다.”
넬슨이 말했다.
“플린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플린과 아자크 왕자는 모두 아크바스 왕국의 사람이 아닌가?”
두 사람이 같은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참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그럼 다른 소년들은? 다른 소년들도 다 같은 나라 사람이란 말인가? 아니면 아자크가 왕자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사람을 때려도 된단 말인가?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문제란 말입니까? 그들은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플린을 괴롭혔습니다.”
넬슨이 나를 질책했다.
“자네는 자네의 스웨인 왕국은 생각도 하지 않는 건가? 아자크 왕자가 잘못되어 죽기라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건가?”
“제가 그를 죽이면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라도 일어난단 말입니까?”
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군. 그러면서도 주먹을 사정없이 날리다니. 자네는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건가?”
내가 때린 소년이 왕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솔직하게 말해서 크게 놀랐다. 내가 높은 신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왕족과 함께 공부하고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나와 다른 나라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아버지인 루비오 공작에게 해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한데 넬슨의 말에 따르면 다른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더 심각한 것 같았다.
나는 넬슨에게 굽히지 않고 말했다.
“그래도 모른 척 넘길 수 없었습니다.”
넬슨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우리 엘라인 아카데미는 자체 사법권을 가지고 있네. 학우를 괴롭히는 상급생이 있다면 선도위원에게 신고를 했어야지. 대뜸 주먹부터 날리면 어떻게 하는가? 그건 옳은 방법이 아닐세.”
“주변에서 선도위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학장님께 묻겠습니다. 플린이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동안 선도위원들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겁니까?”
넬슨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안광을 번뜩이면서 말했다.
“루비오 군, 아자크 왕자에게 사과하게.”
그의 눈빛이 내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지만 난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그런 녀석에게 사과하란 말씀입니까?”
넬슨이 강하게 나왔다.
“자네가 사과하지 않는다면 난 자네를 독방에 가둘 수밖에 없네.”
독방으로 날 협박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가 주겠다. 난 겨우 그런 것에 굴복하는 사내가 아니다.
“차라리 독방에 가겠습니다.”
넬슨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내가 끝까지 굽히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렇게 고집이 센 건가? 내가 자네를 독방에 보내면 루비오 공작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그대는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해 보지 않는 건가?”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공격해 들어왔다. 처음에는 조국, 그다음에는 아버지였다.
그러나 나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스스로 부끄럽다고 생각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힘없는 후배를 괴롭히려 한 이들을 혼내 준 것이 죄라면 그 대가를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에게 머리를 굽히는 것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짓은 영혼이 죽은 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긴 한숨을 내쉰 넬슨은 나를 독방에 가두었다. 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

독방은 아카데미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축축하고 음습했다.
지하실의 독방은 아카데미에서 죄를 저지른 학생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죄를 저지르는 학생 수가 줄어 많은 방이 비어 있었다.
지금 사람이 들어 있는 방은 내가 있는 이 방 하나뿐이었다.
“휴―! 독방행인가?”
방에는 엷은 빛이 들어와 모든 것이 희미했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
책이나 말벗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나는 왕자를 때려서 실신시키고, 귀족의 다리뼈를 부러뜨렸다.
하지만 그들은 악이었다. 신분이 높다고 악을 용납하란 말인가?
탐관오리를 혼내 주는 것은 협객의 도리였다. 그릇됨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협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악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독방 안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적막한 삶에 익숙한 나였지만 이곳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카데미에 용맥이 흐른다는 것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었다.
용맥은 보통 땅 위가 아닌 땅속을 흘렀다. 생각해 보라. 용맥의 위쪽인 지상에서도 엄청난 정기를 모았는데, 용맥이 흐르고 있는 지하에서 정기를 모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엄청난 양의 정기를 모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토납법을 이용해 대지의 정기를 모았다. 예상대로 가슴을 타고 맑은 정기가 쉼 없이 흘러들어 왔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내력이 끊임없이 증가했다.
소주천을 일주시키자 머릿속이 더할 수 없이 맑아졌다. 이윽고 내력을 단전에 밀어 넣자 뜨거운 기운이 아래에서부터 밀려왔다.
단전에 기라고 부를 수 있는 내력이 모여 있었다.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무당심법의 입문 과정이 지나간 것이다.
겨우 한 시진……. 난 한 시진 만에 무당심법의 입문 과정을 통과한 것이다.
이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입문 과정을 넘기는 데는 보통 반년에서 일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진도가 지나치게 빠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내공 수련이 힘든 것은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길을 걷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난 삶에서 그 길을 걸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길을 찾거나 물을 필요 없이 그저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하나 더, 이곳에는 정기의 원천인 용맥이 있었다. 용맥은 끊임없이 정기를 제공해 토납법의 효율을 극대화했다.
결국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엄청난 속도의 연공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빠른 연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이 정도 속도로 연공을 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
나는 이곳이 독방이라는 것도 잊은 채 연공에 몰두했다.
저녁 식사가 나올 무렵에는 벌써 채운의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채운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가 3년 이상 수련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그것을 나는 용맥의 도움으로 단 몇 시진 만에 돌파해 낸 것이다.
기뻤다. 이곳에서 눈을 뜬 뒤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무당산에서 내가 채운의 단계에 이른 것은 4년 만이었다. 이런 속도라면 몇 년 안에 내가 평생 이루지 못했던 화경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서 무신의 경지라는 현경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슬며시 욕심이 생겼다. 혹시 생사경을 넘어선 심무상의 경지에도 이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심무상이나 생사경의 경지는 무당 장문인도 이르지 못한 꿈의 경지였다. 아무리 용맥이 있다고 해도 무당심법만으로는 무리였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감히 다가갈 수도 없었다.
끼익…….
“식사다.”
문 아래에 만들어진 작은 문으로 저녁 식사가 나왔다. 하지만 나는 연공에 열중했기 때문에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차디찬 우유와 딱딱한 빵을 입에 넣은 것은 소주천을 여섯 번 일주하고 나서였다.
나는 우유 한 모금과 빵 한 조각을 먹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다 먹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연공에 시간을 쓰고 싶었다.
이곳은 연공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용맥으로 정기가 넘칠 뿐 아니라 빛과 소리가 없어 절로 집중이 되었다.
얼마나 연공을 했을까?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아침 식사다.”
아침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밤새 연공을 한 것인가?
잠을 자지 않고 밤새 연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머리가 맑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나는 잠시 몸을 일으켜 현음지맥과 태초양맥을 움직여 보았다.
내력이 내가 마음먹은 대로 흘렀다.
이것은 예문의 경지가 아닌가?
예문의 경지에 이르면 무당파에서도 중수 대접을 받았다.
무당심법을 꿰고 있었다지만, 단 하루 만에 중수의 경지에 오르다니……. 이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머리는 이해했지만 가슴은 납득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