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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
곤륜진혼곡(崑崙鎭魂曲)
곤륜무쌍 1권(1화)
작가서문
장르문학의 본질은 무엇보다 ‘재미’에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곤륜무쌍(崑崙無雙)』을 집필함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재미’에 초점을 맞추어 쓰려고 노력했다.
흔히, ‘킬링 타임’이라는 단어는 장르문학을 비하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런데 ‘킬링 타임’이라는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할 수 있는 소설이 되려면 그만큼 ‘재미’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소설에서는 신선한 카타르시스를 창출하는 ‘감동’이나 뭔가 깊이 있는 깨달음을 주는 ‘교훈’도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재미’, ‘감동’, 그리고 ‘교훈’을 두루 갖춘 소설을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세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재미’라는 한 마리의 토끼만을 제대로 잡아 보기로 작정하고 본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 물론, 이 한 마리의 토끼를 과연 제대로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독자님들의 몫이므로.
다만, 아무 생각 없이 읽다 보면 어느새 답답한 일상 가운데서 쌓인 스트레스가 다 사라졌음을 발견하게 하는 글을 써 보고 싶었다. 상황에 휘둘리는 우유부단한 주인공이 아니라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을 통해 통쾌한 대리만족을 창출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사람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반드시 목적에 적합한 행위만을 할 수는 없다. 실용적인 목적에서 탈피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뭔가에 무아지경으로 정신을 빼앗기며 ‘킬링 타임’을 할 때에야 ‘유희’의 목적인 ‘정서적 재충전’이 이루어진다.
모쪼록 본 소설이 무목적의 미학인 ‘유희’의 다른 이름, 곧 ‘킬링 타임’의 기능을 확실하게 달성해 주는 매개가 되기를 바란다.
한가람 배상
제1장 이독제독(以毒制毒)(1)
1
“송구하게도 원로원의 장로님들께 또다시 일선으로 나와 달라는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개파 이래, 두 번째로 맞은 큰 위기입니다. 실로 사활이 걸린 문제이지요.”
“실은 노도도 대충 소식을 전해 들었네. 흑혈회주(黑血會主) 위재항(威渽沆)이 이곳으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벌써 본산의 속가제자들이 세운 지파의 상당수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습니다. 이대로라면 태청오로관(太淸五路關)이 돌파당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싶습니다.”
태을진인(太乙眞人)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허허, 그것참!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군. 그래, 숭의맹(崇義盟)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가?”
“지금쯤이면 이 소식을 충분히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허나, 여전히 이십 년 전의 앙금이 남아 있는 터라 곤륜파(崑崙派)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흑혈회도 이를 알고서 숭의맹으로부터 고립된 우리 곤륜파와의 전면전을 감행한 게 아닐까 합니다. 설사 숭의맹이 마음을 돌이켜 지원을 해 준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이미 소집할 수 있는 장로들은 모두 모였다네. 문제는 그게 아닐세. 혈선지화(血仙之禍) 이후 이십 년이나 지났지만, 노납을 비롯해 당시 살아남은 장로들 대부분은 아직도 주화입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네. 혈선지화가 있기 전의 원로원에 비하면 지금은 그 힘이 일 할에도 이르지 못할 걸세.”
그 말에 태허존자(太虛尊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그 정도일 줄은…….”
“그래도 자네가 장문인이 된 이래로 지난 이십 년간, 곤륜파는 꾸준히 회복되어 왔지. 처음에 비하면 숭의맹과의 관계도 많이 개선되었고. 아무튼, 우리 장로들과 곤륜파의 모든 제자가 힘을 합친다면 당면한 위기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네.”
“물론입니다. 비록 열세이긴 하나, 우리에게는 지형이라는 강점이 있습니다. 사력을 다해 버티면서 싸움을 장기전으로 이끌면, 결국은 숭의맹도 이 일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본산의 많은 속가제자도 내곤륜(內崑崙)을 구심점으로 재차 결집하게 될 테지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곤륜파의 신성한 이 성지가 불한당들의 발에 짓밟히는 일만은 막아야 하네.”
“반드시 태청오로관에서 놈들을 차단할 겁니다. 절대로 내곤륜까지 들어오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네의 그 결의 위에 모든 장로가 함께할 걸세.”
***
“어서 성문을 봉쇄하라! 사마외도의 불한당들에게 절대로 침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내곤륜으로 통하는 태청오로관의 하나인 유운관(流雲關)을 책임진 제사호법 성진자(晟珍子)의 독려였다.
중앙의 성문을 중심으로 평균 오 장 높이의 성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채를 향해 수많은 흑의인이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이미 내곤륜과 이어지는 협로와 성곽이 교차하는 지점에 뚫려 있던 성문은 굳게 닫혔다.
아울러, 삼백 명의 곤륜제자는 성곽 위의 보행로에 배치되어 확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무렵, 지척까지 이른 흑의인들은 저마다 비조(飛爪)를 위로 힘껏 던졌다.
그 갈퀴가 성벽 위의 요철 부위에 걸리자, 발톱으로 옥죄는 것처럼 단단하게 부착되었다. 그러자 흑의인들은 밧줄을 잡아당기며 성벽 위로 일제히 기어올랐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보아 그들은 저마다 상당한 경지에 이른 무공의 고수들임이 틀림없었다.
흑의인들 가운데서도 어깨에 황색의 피풍의를 두른 자들은 비조의 도움 없이도 연속으로 성벽을 박차면서 꼭대기까지 가뿐하게 도달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성벽 앞에서 지축을 박차면서 약 삼 장을 치솟은 다음, 불과 서너 걸음 만에 보행로까지 치고 올라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적들에 맞선 유운관의 곤륜제자들 역시 방어선을 사수하고자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흑의인들은 한 손으로 밧줄을 타면서 다른 한 손으로 각자의 병기를 휘둘러 농성하는 곤륜제자들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걷어 냈다. 그 와중에 비조에 의존하지 않고 단숨에 보행로까지 뛰어올라 온 황색 피풍의의 흑의인들은 본격적으로 곤륜제자들을 공격했다.
유운관을 사수하는 곤륜제자들은 도저히 황색 피풍의를 두른 흑의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적의 숫자가 월등하게 많았다. 창졸간에 농성하던 이들은 전부 목숨을 잃었다.
결국, 성문은 뚫렸다.
흑의인들은 유운관을 신속하게 돌파하여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내곤륜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내곤륜 방향에서도 도포를 입은 무인들은 굳이 기다리지 않고 돌격해 오는 적들을 향해 마주 돌진하며 내려갔다.
잠시 후,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검은 물결과 산 위에서 내려오는 하얀 물결이 격돌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내곤륜 측에서는 내공이 가장 심후하고, 무공 또한 으뜸인 원로원의 장로들이 장문인인 태허존자와 함께 제자들을 진두지휘했다.
곤륜파의 제자들은 무서운 기세로 육박해 오는 흑혈회의 무사들을 향해 본격적으로 묵린환(墨鱗環)을 발사했다.
수많은 묵린환이 전면을 뒤덮으며 날아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장로들이 날린 묵린환들은 혜성과 같은 기장을 드리우며 더욱 빨리 쏘아져 갔다.
장로들에 이어 제이선에서 진격하던 곤륜파 일대제자들이 날려 보낸 묵린환에도 내력이 충만히 깃들어 있어서 그 위력이 상당했다.
앞에서 달려오던 많은 숫자의 흑의인들이 묵린환에 몸을 관통당하여 연방 쓰러졌던 것이다.
그동안, 제삼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자들 가운데서 백여 명이 일제히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이에 서릿발 같은 피리 소리가 주변의 대기를 진동시키며 널리 울려 퍼졌으니, 다름 아닌 복마곡성(伏魔哭聲)이었다.
곤륜파의 독문무공을 익힌 제자들의 경우에는 그 소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흑혈회의 흑의인들은 격심한 현기증을 느껴, 움직임이 현저하게 둔화되었다.
흑의인들은 곤륜파 제자들로부터 묵린환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는 가운데 서서히 그것에 적응했고, 점점 더 효과적으로 방어하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난데없이 복마곡성이 울려 퍼지자, 묵린환은 재차 위력을 발휘했다.
묵린환도 거의 바닥나고, 흑혈회 무리의 기세도 한풀 꺾일 무렵, 곤륜파의 제자들은 다들 맹수의 발톱처럼 손을 구부리며 운룡조(雲龍爪)를 시전했다. 그런 다음, 주춤하는 적들에게 달려들어 조공(爪功)을 펼쳤다.
2
“변변치 못한 것들!”
흑의인들의 사이가 갈라지는가 싶더니, 그곳으로부터 독특한 복장을 한 거구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금은사로 수놓아진 휘황찬란한 흑포를 두르고 있었고, 손가락에도 여러 개의 굵직굵직한 가락지들을 끼고 있었다.
등에는 용봉의 무늬가 금은사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적색의 피풍의를 두르고 있었다.
“과연 곤륜파의 명성이 허명은 아니었군.”
연이어 금포인은 기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사자후에는 측량하기 어려운 내공이 실려 있어 곤륜산의 험산 준령으로 울려 퍼지던 복마곡성마저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복마곡성의 영향에서 벗어나자 흑의인들은 본래의 위력을 회복했고, 이제는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곤륜파의 제자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위재항은 지면을 박차며 높이 치솟았다. 그런 다음, 그는 곧장 피리를 불고 있는 제자들의 가운데로 난입하여 쫙 펼친 손바닥을 사방으로 마구 휘저었다.
그러자 금세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위재항의 커다란 양쪽 손바닥에는 대추 하나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에서 가공할 만한 흡입력이 발생하여 주변의 사람들을 마구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위재항이 펼치는 흡성대법(吸星大法)으로 인해 인근에 있던 곤륜파의 제자들은 몸도 가누지 못한 채로 딸려 갔다.
위재항의 손바닥이 몸에 닿을라치면, 끔찍한 살풍경이 벌어졌다. 새하얀 도포를 입은 제자들은 일순간에 백 세가 넘은 노인처럼 처참한 몰골로 변해 버렸다. 그 과정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진저리를 쳐 댔다.
손바닥이 떨어지는 순간, 그들은 머리와 사지가 몸통과 분리되며 사방으로 널브러졌다.
기이한 구멍이 뚫려 있는 양쪽 손바닥을 사방으로 휘젓고 있는 위재항으로부터 반경 오륙 장의 범위는 강력한 흡입력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리를 불고 있던 대부분의 곤륜파의 제자들은 미처 달아날 겨를도 없이 위재항에 의해 온몸이 산산조각 나면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광경을 목도한 곤륜파의 많은 제자는 역겨움을 참지 못해 구역질을 하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이를 계기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아연실색한 곤륜파 제자들의 사기는 순식간에 확 꺾였고, 흑혈회의 흑의인들은 더욱 살기등등하게 공세를 펼쳤다.
그 와중에도 곤륜파의 장로들은 청량선(淸凉扇)을 전개하여 연방 밀려드는 흑혈회의 무리를 막아 냈다.
“늙어 빠진 쥐새끼들이 어지간히도 설쳐 대는군.”
자신의 위력에 압도당하여 두려움에 질린 적들의 모습을 잠시 음미하던 위재항의 양쪽 손바닥에 있는 채기혈(採氣穴)에서는 다시금 강력한 흡입력이 생겨났다.
가공할 만한 흡입력을 몸소 감지하게 된 태을진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사이에 다른 장로 두 명의 몸이 갈가리 찢겼다. 그 광경에 격분한 태을진인은 위재항과 동귀어진하겠다는 각오로 쇄도해 갔다.
‘필생의 공력을 쏟아 넣은 투골선(透骨扇)을 시전한다면 능히 놈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태을진인의 각오를 알아차린 다른 세 장로도 그와 함께 위재항을 향해 육박해 갔다.
하지만 위재항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력한 상대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두 팔을 휘저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인력(引力)의 소용돌이가 발생했다. 장로들은 균형 감각을 잃고서 바닥으로 하릴없이 곤두박질쳤다.
어느새 위재항의 채기혈은 태을진인의 정수리 위로 얹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태을진인은 자신의 모든 공력을 순식간에 위재항에게 빼앗기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 주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이후 태허존자의 퇴각령이 내려지자, 살아남은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줄행랑을 쳤다.
곤륜진혼곡(崑崙鎭魂曲)
곤륜무쌍 1권(1화)
작가서문
장르문학의 본질은 무엇보다 ‘재미’에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곤륜무쌍(崑崙無雙)』을 집필함에 있어서 바로 이러한 ‘재미’에 초점을 맞추어 쓰려고 노력했다.
흔히, ‘킬링 타임’이라는 단어는 장르문학을 비하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런데 ‘킬링 타임’이라는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할 수 있는 소설이 되려면 그만큼 ‘재미’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소설에서는 신선한 카타르시스를 창출하는 ‘감동’이나 뭔가 깊이 있는 깨달음을 주는 ‘교훈’도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재미’, ‘감동’, 그리고 ‘교훈’을 두루 갖춘 소설을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세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재미’라는 한 마리의 토끼만을 제대로 잡아 보기로 작정하고 본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 물론, 이 한 마리의 토끼를 과연 제대로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독자님들의 몫이므로.
다만, 아무 생각 없이 읽다 보면 어느새 답답한 일상 가운데서 쌓인 스트레스가 다 사라졌음을 발견하게 하는 글을 써 보고 싶었다. 상황에 휘둘리는 우유부단한 주인공이 아니라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을 통해 통쾌한 대리만족을 창출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사람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반드시 목적에 적합한 행위만을 할 수는 없다. 실용적인 목적에서 탈피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뭔가에 무아지경으로 정신을 빼앗기며 ‘킬링 타임’을 할 때에야 ‘유희’의 목적인 ‘정서적 재충전’이 이루어진다.
모쪼록 본 소설이 무목적의 미학인 ‘유희’의 다른 이름, 곧 ‘킬링 타임’의 기능을 확실하게 달성해 주는 매개가 되기를 바란다.
한가람 배상
제1장 이독제독(以毒制毒)(1)
1
“송구하게도 원로원의 장로님들께 또다시 일선으로 나와 달라는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개파 이래, 두 번째로 맞은 큰 위기입니다. 실로 사활이 걸린 문제이지요.”
“실은 노도도 대충 소식을 전해 들었네. 흑혈회주(黑血會主) 위재항(威渽沆)이 이곳으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벌써 본산의 속가제자들이 세운 지파의 상당수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습니다. 이대로라면 태청오로관(太淸五路關)이 돌파당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싶습니다.”
태을진인(太乙眞人)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허허, 그것참!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군. 그래, 숭의맹(崇義盟)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가?”
“지금쯤이면 이 소식을 충분히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허나, 여전히 이십 년 전의 앙금이 남아 있는 터라 곤륜파(崑崙派)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흑혈회도 이를 알고서 숭의맹으로부터 고립된 우리 곤륜파와의 전면전을 감행한 게 아닐까 합니다. 설사 숭의맹이 마음을 돌이켜 지원을 해 준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이미 소집할 수 있는 장로들은 모두 모였다네. 문제는 그게 아닐세. 혈선지화(血仙之禍) 이후 이십 년이나 지났지만, 노납을 비롯해 당시 살아남은 장로들 대부분은 아직도 주화입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네. 혈선지화가 있기 전의 원로원에 비하면 지금은 그 힘이 일 할에도 이르지 못할 걸세.”
그 말에 태허존자(太虛尊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그 정도일 줄은…….”
“그래도 자네가 장문인이 된 이래로 지난 이십 년간, 곤륜파는 꾸준히 회복되어 왔지. 처음에 비하면 숭의맹과의 관계도 많이 개선되었고. 아무튼, 우리 장로들과 곤륜파의 모든 제자가 힘을 합친다면 당면한 위기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네.”
“물론입니다. 비록 열세이긴 하나, 우리에게는 지형이라는 강점이 있습니다. 사력을 다해 버티면서 싸움을 장기전으로 이끌면, 결국은 숭의맹도 이 일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본산의 많은 속가제자도 내곤륜(內崑崙)을 구심점으로 재차 결집하게 될 테지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곤륜파의 신성한 이 성지가 불한당들의 발에 짓밟히는 일만은 막아야 하네.”
“반드시 태청오로관에서 놈들을 차단할 겁니다. 절대로 내곤륜까지 들어오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네의 그 결의 위에 모든 장로가 함께할 걸세.”
***
“어서 성문을 봉쇄하라! 사마외도의 불한당들에게 절대로 침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내곤륜으로 통하는 태청오로관의 하나인 유운관(流雲關)을 책임진 제사호법 성진자(晟珍子)의 독려였다.
중앙의 성문을 중심으로 평균 오 장 높이의 성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채를 향해 수많은 흑의인이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이미 내곤륜과 이어지는 협로와 성곽이 교차하는 지점에 뚫려 있던 성문은 굳게 닫혔다.
아울러, 삼백 명의 곤륜제자는 성곽 위의 보행로에 배치되어 확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무렵, 지척까지 이른 흑의인들은 저마다 비조(飛爪)를 위로 힘껏 던졌다.
그 갈퀴가 성벽 위의 요철 부위에 걸리자, 발톱으로 옥죄는 것처럼 단단하게 부착되었다. 그러자 흑의인들은 밧줄을 잡아당기며 성벽 위로 일제히 기어올랐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보아 그들은 저마다 상당한 경지에 이른 무공의 고수들임이 틀림없었다.
흑의인들 가운데서도 어깨에 황색의 피풍의를 두른 자들은 비조의 도움 없이도 연속으로 성벽을 박차면서 꼭대기까지 가뿐하게 도달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성벽 앞에서 지축을 박차면서 약 삼 장을 치솟은 다음, 불과 서너 걸음 만에 보행로까지 치고 올라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적들에 맞선 유운관의 곤륜제자들 역시 방어선을 사수하고자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흑의인들은 한 손으로 밧줄을 타면서 다른 한 손으로 각자의 병기를 휘둘러 농성하는 곤륜제자들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걷어 냈다. 그 와중에 비조에 의존하지 않고 단숨에 보행로까지 뛰어올라 온 황색 피풍의의 흑의인들은 본격적으로 곤륜제자들을 공격했다.
유운관을 사수하는 곤륜제자들은 도저히 황색 피풍의를 두른 흑의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적의 숫자가 월등하게 많았다. 창졸간에 농성하던 이들은 전부 목숨을 잃었다.
결국, 성문은 뚫렸다.
흑의인들은 유운관을 신속하게 돌파하여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내곤륜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내곤륜 방향에서도 도포를 입은 무인들은 굳이 기다리지 않고 돌격해 오는 적들을 향해 마주 돌진하며 내려갔다.
잠시 후,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검은 물결과 산 위에서 내려오는 하얀 물결이 격돌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내곤륜 측에서는 내공이 가장 심후하고, 무공 또한 으뜸인 원로원의 장로들이 장문인인 태허존자와 함께 제자들을 진두지휘했다.
곤륜파의 제자들은 무서운 기세로 육박해 오는 흑혈회의 무사들을 향해 본격적으로 묵린환(墨鱗環)을 발사했다.
수많은 묵린환이 전면을 뒤덮으며 날아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장로들이 날린 묵린환들은 혜성과 같은 기장을 드리우며 더욱 빨리 쏘아져 갔다.
장로들에 이어 제이선에서 진격하던 곤륜파 일대제자들이 날려 보낸 묵린환에도 내력이 충만히 깃들어 있어서 그 위력이 상당했다.
앞에서 달려오던 많은 숫자의 흑의인들이 묵린환에 몸을 관통당하여 연방 쓰러졌던 것이다.
그동안, 제삼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자들 가운데서 백여 명이 일제히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이에 서릿발 같은 피리 소리가 주변의 대기를 진동시키며 널리 울려 퍼졌으니, 다름 아닌 복마곡성(伏魔哭聲)이었다.
곤륜파의 독문무공을 익힌 제자들의 경우에는 그 소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흑혈회의 흑의인들은 격심한 현기증을 느껴, 움직임이 현저하게 둔화되었다.
흑의인들은 곤륜파 제자들로부터 묵린환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는 가운데 서서히 그것에 적응했고, 점점 더 효과적으로 방어하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난데없이 복마곡성이 울려 퍼지자, 묵린환은 재차 위력을 발휘했다.
묵린환도 거의 바닥나고, 흑혈회 무리의 기세도 한풀 꺾일 무렵, 곤륜파의 제자들은 다들 맹수의 발톱처럼 손을 구부리며 운룡조(雲龍爪)를 시전했다. 그런 다음, 주춤하는 적들에게 달려들어 조공(爪功)을 펼쳤다.
2
“변변치 못한 것들!”
흑의인들의 사이가 갈라지는가 싶더니, 그곳으로부터 독특한 복장을 한 거구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금은사로 수놓아진 휘황찬란한 흑포를 두르고 있었고, 손가락에도 여러 개의 굵직굵직한 가락지들을 끼고 있었다.
등에는 용봉의 무늬가 금은사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적색의 피풍의를 두르고 있었다.
“과연 곤륜파의 명성이 허명은 아니었군.”
연이어 금포인은 기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사자후에는 측량하기 어려운 내공이 실려 있어 곤륜산의 험산 준령으로 울려 퍼지던 복마곡성마저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복마곡성의 영향에서 벗어나자 흑의인들은 본래의 위력을 회복했고, 이제는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곤륜파의 제자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위재항은 지면을 박차며 높이 치솟았다. 그런 다음, 그는 곧장 피리를 불고 있는 제자들의 가운데로 난입하여 쫙 펼친 손바닥을 사방으로 마구 휘저었다.
그러자 금세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위재항의 커다란 양쪽 손바닥에는 대추 하나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에서 가공할 만한 흡입력이 발생하여 주변의 사람들을 마구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위재항이 펼치는 흡성대법(吸星大法)으로 인해 인근에 있던 곤륜파의 제자들은 몸도 가누지 못한 채로 딸려 갔다.
위재항의 손바닥이 몸에 닿을라치면, 끔찍한 살풍경이 벌어졌다. 새하얀 도포를 입은 제자들은 일순간에 백 세가 넘은 노인처럼 처참한 몰골로 변해 버렸다. 그 과정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진저리를 쳐 댔다.
손바닥이 떨어지는 순간, 그들은 머리와 사지가 몸통과 분리되며 사방으로 널브러졌다.
기이한 구멍이 뚫려 있는 양쪽 손바닥을 사방으로 휘젓고 있는 위재항으로부터 반경 오륙 장의 범위는 강력한 흡입력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리를 불고 있던 대부분의 곤륜파의 제자들은 미처 달아날 겨를도 없이 위재항에 의해 온몸이 산산조각 나면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광경을 목도한 곤륜파의 많은 제자는 역겨움을 참지 못해 구역질을 하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이를 계기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아연실색한 곤륜파 제자들의 사기는 순식간에 확 꺾였고, 흑혈회의 흑의인들은 더욱 살기등등하게 공세를 펼쳤다.
그 와중에도 곤륜파의 장로들은 청량선(淸凉扇)을 전개하여 연방 밀려드는 흑혈회의 무리를 막아 냈다.
“늙어 빠진 쥐새끼들이 어지간히도 설쳐 대는군.”
자신의 위력에 압도당하여 두려움에 질린 적들의 모습을 잠시 음미하던 위재항의 양쪽 손바닥에 있는 채기혈(採氣穴)에서는 다시금 강력한 흡입력이 생겨났다.
가공할 만한 흡입력을 몸소 감지하게 된 태을진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사이에 다른 장로 두 명의 몸이 갈가리 찢겼다. 그 광경에 격분한 태을진인은 위재항과 동귀어진하겠다는 각오로 쇄도해 갔다.
‘필생의 공력을 쏟아 넣은 투골선(透骨扇)을 시전한다면 능히 놈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태을진인의 각오를 알아차린 다른 세 장로도 그와 함께 위재항을 향해 육박해 갔다.
하지만 위재항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력한 상대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두 팔을 휘저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인력(引力)의 소용돌이가 발생했다. 장로들은 균형 감각을 잃고서 바닥으로 하릴없이 곤두박질쳤다.
어느새 위재항의 채기혈은 태을진인의 정수리 위로 얹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태을진인은 자신의 모든 공력을 순식간에 위재항에게 빼앗기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 주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이후 태허존자의 퇴각령이 내려지자, 살아남은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줄행랑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