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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인종 1권



대왕 인종 1권(1화)
프롤로그


핼쑥한 모습에 인종은 말없이 조용히 자신의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살아온 대궐 밖으로 나서는 인종을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종의 앞에는 검은 도포 자락에 긴 수염을 기른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인종은 걸으며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미련은 아니었다.
중종의 적자로 태어나 30년 넘게 왕세자로 살았고 짧지만 왕도 해 보았다. 평생에 자식이 없어 후사를 동생에게 물려주어야 했지만 그것도 미련은 없었다.
팔자에 없는 자식이니 바란다고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가 문뜩 떠올랐다.
자식을 낳아 놓고 젖 한 번 못 물려보고 떠났을 어머니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집권하고 1년도 되지 못해 제대로 된 정사 한 번 펼쳐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남으로는 왜구들이 들끓고 북으로는 야인들이 들끓어 조선의 백성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조선이 건국 된 지 어언 150여 성상 좋은날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용상에 앉으면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워 줄 것이라 다짐했다. 강병을 육성해 왜구와 야인들이 조선을 넘보지 못하게 하리라 다짐했다. 못난 지아비지만 어린 나이에 시집와 시어머니 등쌀에 하루도 편할 날 없는 중전 박씨도 눈에 밟혔다.
자신이 없으면 이 큰 궁궐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가야 할 터인데… 어린 시동생과 시어머니의 등쌀에 얼마나 고생을 할지 못내 걱정스러운 인종이었다.
“미련을 버리게나.”
앞서 걸어가는 사자는 이런 인종의 착잡한 마음을 알았는지 미련을 버리라 말하지만 그것이 어찌 인력으로 될 것인가. 생각해 보니 참으로 허망한 삶이었다.
사자를 따라 걷고 또 걸어 이름도 알 수 없는 산천을 무수히 지나쳐 도착한 곳은 명계(冥界)였다.
“이곳에서 기다리시게.”
서너 평 남짓한 방 안에 여럿의 사람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모두 인종과 같은 처지이리라.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으며 못내 미련을 못 버리고 현생에 살아 있을 가족들을 걱정하며 오열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루가 지나갔다. 처음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나갔다. 전날 들어온 사람들 또한 모두 떠나가고 다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종은 살아생전 왕으로 살았기에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고 은연중 생각했다. 때문에 자신의 처결도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특권의식은 아니었다. 왕이란 현생에서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죄에 따라 사형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임금이었다. 지켜야 할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으면 그 원한도 풀어 주어야 했다. 책임이 막중한 자리인 만큼 그 대가도 크리라 여겼다. 자신은 필시 지옥을 가리라 여겼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모두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인 듯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대화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빌어먹을 왜구들 때문에 이 무슨 난리냐.”
“왜구보다도 그 빌어먹을 현감이 더 밉소.”
“그러게 말이여, 그렇게 왜구에 대한 방비를 해야 한다고 간청했는데 빌어먹을 현감 놈이 병사들을 조련할 생각은 안 하고 군포 받은 것을 횡령해서는 치부하기 바쁘니 이런 사단이 날 줄 알았다니까.”
“윗말에서는 몇 명이나 당했소?”
“우리 마을은 반이 죽었다니까.”
“그래도 우리 마을보단 낫소. 우리 마을은 젊은 처자들이 죄다 끌려갔소.”
“우리 마을은 빌어먹을 왜구 놈들이 도공들을 죄다 납치해 가 버렸네.”
“도공을요?”
인종은 가만히 눈을 감고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자 하니 서해나 남해의 어느 마을이 왜구들에게 크게 당한 듯 보였다.
안타까웠지만 지금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신 또한 병으로 죽어 판결을 기다리는 망자이니 저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떠나고 며칠이 지나가 다시 서너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사자가 들어왔다. 인종은 자신을 판결하지 않고 계속 방치만 해 두자 궁금하여 사자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저는 이대로 내버려 두십니까?”
사자는 인종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보였다.
“기다리시게, 조만간 이 방에서 나가게 될 것이네.”
사자가 나가고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종은 그 방 안에 홀로 남겨졌다. 이제 더 이상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며칠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적적하게 홀로 지내고 있는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하나가 사자의 안내도 없이 혼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네가 조선 왕, 이호인가?”
“그렇소만 누구십니까?”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 말하겠네. 자네의 판결이 늦어지는 것은 자네를 다시 돌려보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일세. 어찌 되었든 자네는 한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네. 만약 자네가 다시 돌아간다면 그냥 가서는 안 되네, 말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자네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곳에 왔네. 가까이 오게.”
시간이 없다는 말에 인종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잠시 멈칫거리며 머뭇거리자 백발의 노인이 다시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 하네, 어서 가까이 오게.”
재차 시간이 없음을 강조하자 인종은 이미 죽은 상황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노인 곁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인종이 다가오자 손을 들어 인종의 이마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자 노인이 일어서며 한마디 했다.
“앞으로 자네는 당분간 명계에 머물게 될 것이네, 이대로 판결을 받고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헛일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본래의 몸으로 돌아간다면 분명 얼마가지 못하고 또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네. 하여 내가 자네에게 명계의 판관들이 판결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능력을 심어 두었네. 자네는 앞으로 죽은 자들의 영혼을 통해 그 사람의 일생을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네. 하니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부디 오랫동안 왕 노릇 하며 살다가 다시 돌아와야 할 것이네.”
노인은 더 이상의 말도 없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뭔가에 홀린 듯 인종은 노인의 말을 곱씹어 보았지만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만 자신이 다시 되돌아 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기대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며칠이 흐르고 다시 사자가 서너 명의 사람들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모두 40대 이상의 남자들로 대부분의 망자가 그러하듯 그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찬찬히 들어온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세 명은 40대로 보였고 한 명은 60대로 보였다. 말없이 가만히 앉아서 한숨만을 쉬는 사람도 있었고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파묻고 있거나 벽에 기댄 채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60대 노인은 표정 없는 얼굴로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은 죽기 전 몹시 힘들었는지 키에 비해 매우 왜소해 보였다. 안쓰럽다는 생각에 노인에게서 눈을 못 떼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노인을 바라보자 인종의 머리에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인종은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은 아이가 태어나서 두 해가 못 되어 어미를 잃고 아비 손에 이끌려 젖동냥을 다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자란 소년은 10대가 되어 아비를 따라 온갖 궂은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20세가 되기도 전에 아비는 죽고 홀로 남은 소년은 투탁(投託)을 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방도가 나오지 않은 소년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건넛마을 양반집에 스스로 노비가 되어 들어간 것이다.
30살이 다되어 갈 무렵 주인 양반은 집안 하녀 중 하나와 짝을 지어 주었고 몇 년 동안 자식 넷을 낳고 그중에 셋을 돌림병으로 잃어버렸다. 그의 삶은 한과 슬픔으로 점철되어갔다.
40살이 넘어 주인 양반이 관에 붙들려 가면서 그마저 가족과 함께 살아가던 그의 삶은 끝나 버렸다. 부인과 자식이 따로 떨어져 팔려 갔기 때문이다. 부인은 어느 양반집 식모로 팔려 갔고 자식은 향교의 관노비로 본인은 숯을 구워서 파는 곳으로 팔려 가 하루 종일 나무를 하고 숯을 구웠다.
그때부터 노인은 제발 죽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으니 제발 자신을 빨리 데려가 달라고 하늘에 빌고 또 빌며 20년을 보냈다.
60이 다 되어 갈 무렵 향교에 관노비로 팔려 갔던 자식이 찾아왔다. 하룻밤을 머문 자식은 떠나면서 수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떨어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부자는 그렇게 이별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노인은 삶을 마감했다.
“내가 죄인이로다.”
인종은 노인의 삶이 어떻게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왔는지 보다 그 삶이 너무도 안쓰럽고 안타까워 가슴이 아려 왔다.
한참 동안 격하게 떨려 오던 가슴이 진정되자 벽에 기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응시하자 그 남자의 삶 또한 마치 스스로 살았던 삶처럼 인종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종은 그때서야 백발의 노인이 했던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명계의 판관들이 망자들을 판결할 때 사용한다는 방법이 이것이리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삶을 알 수 있으니 판결 또한 항상 올바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망자들이 하나둘씩 나가고 다시 새로운 망자들이 들어왔다. 그러기를 몇 차례 인종은 망자들이 드나들 때마다 하나하나 모두 살펴보며 그들의 삶을 살펴보았다. 모두 하나같이 안타깝고 안쓰러운 삶이었다.
간혹 잘못된 삶을 살다 온 사람도 있으나 자라 온 환경과 주변 여건을 알고 있는 인종으로서는 그를 나쁘다고 마냥 욕할 수는 없다고 느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어느 날 사자가 다시 찾아왔다.
“따라 나오게.”
오랫동안 말조차 걸지 않던 사자가 인종을 불렀다. 대답 없이 인종이 조용히 일어나 사자를 따라나섰다. 어떤 판결이 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리라 다짐하는 인종이었다.
끝없이 이어져 있는 회랑을 걷고 또 걸었다. 회랑의 끝에는 물처럼 출렁이는 파란빛의 막이 있었다. 문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도 본 적 없는 것이다.
푸른 막 앞에 선 사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 자네의 판결은 시작하지 못했네. 애초에 자네를 이끌고 올 수 없었는데 자네가 끌려오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져 버렸네, 그 일로 명왕이신 염라대왕께서 참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네, 어찌 되었든 자네에 대한 판결은 더 미루어질 것 같네. 그동안 나와 함께 망자들을 인도하는 일을 해 주어야겠네, 따라오시게.”
“허면 저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다시 돌아간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사자로 망자들을 인도하며 산다는 것입니까?”
“자네를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려보내려면 시간을 건너뛰어야 하네, 이미 자네의 몸은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 장례가 모두 끝나 땅속에 들어갔는데 다시 돌려보낸다고 살 수 있겠나? 하니 시간을 건너뛰어 자네가 죽음에 이른 그 시간대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일이 쉽지 않네. 500년에 한 번씩만 가능하다네.”
“500년이라고요?”
“그러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지 우선 날 따라오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자는 푸른 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따라 인종 또한 막 안으로 들어섰다.
푸른 막을 통과하여 나온 곳은 살아생전 보았던 한양이었다.
“어찌하여 이곳으로 온 것입니까?”
“오늘 자네가 인도해야 할 망자들이 이곳에 있으니까.”
인종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사자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말없이 걷기만 했던 인종은 고개를 들어 사자가 들어서는 집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사자는 인종의 외가로 들어선 것이다.
“이럴 수는……!”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의 외삼촌과 사촌동생이 죽임을 당했다. 소윤 일파와 대비 윤씨가 벌인 일이었다. 그 뒤로 인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을 여러 번 겪어야 했다. 자신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만으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죽음으로 해서 자신의 외가와 형제들 그리고 친형제인 봉성군 완과 충성을 다했던 신하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눈물겨운 시간을 보낸 인종은 얼마 후 다시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인종은 사자와 함께 수없이 많은 곳과 수없이 많은 망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청의 발호로 명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동쪽 끝까지 와서 거대한 땅을 차지했다. 연해주를 차지하고 사할린을 차지했다.
양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아시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가 막부시대를 끝내고 대정봉환으로 왜왕이 실권을 다시 되찾고는 조선을 침략했다.
끝없는 환란과 누란(累卵)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민족이 사라질 것이라 여겼지만 외세의 덕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연이어 벌어진 내전으로 다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남북 분단으로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민족 간 분열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라를 팔아먹었던 매국노는 해방 후에도 떵떵거리며 잘만 살았다.
그 상황에 남한은 남남갈등으로 서로 불신하며 싸우기를 밥 먹듯이 했다. 독재와 탄압으로 민중은 고통 속에 신음해야 했다. 독재가 끝나도 동서 간의 화합은 요원했으며 북한은 기아로 수십만이 죽어 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한쪽으로 독재를 향수하면서 찬양하며 다른 한쪽으로는 독재를 비난했다. 예를 중시하던 유교는 마치 국가를 위난하게 만든 원죄를 가진 종교 취급당했으면 자신들의 뿌리인 단군은 거부당했다. 말세였다.
위정자부터 일용직 노동자까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돈이었다. 조금 먹고 살 만해지자 자신의 처지와 국가의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만함과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그렇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조선의 12대 임금 이호가 되돌아 갈 수 있는 서기 2045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