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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인종 1권(2화)
1. 생자일필사(生者一必死) 재반생구세(再反生求世)(1)
조선왕조신록 인종 1년 7월 1일 첫 번째 기사.
상(上)이 훙서(薨逝)하다.
묘시(卯時)에 상(上)이 청연루) 아래 소침(小寢)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인종 1년 7월 1일 승전내시(承傳內侍) 김승보(金承寶)가 나와서 말하였다.
“상께서 훙서하실 때에 분부하기를 ‘나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내 상사(喪事)를 보살필 만한 아주 가까운 사람이 없는 것을 조정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윤흥인(尹興仁)·윤흥의(尹興義) 형제로 하여금 내 상사를 감호(監護)하게 하라고 대신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승하한 인종의 유교(遺敎)를 전하자 경회루 아래 수각에서 대기하고 있던 영상과 좌상 승지와 사관은 통곡을 하였다.
국상이 발표되자 문무백관들이 근정전에 모여 통곡을 하였고 성균관·사학(四學)의 유생들이 광화문 밖에 모여서 종일 끊임없이 곡하고 여염의 천인(賤人)과 규중(閨中)의 부녀도 누구나 다 달려가 울부짖었다.
좌의정 유관을 삼도감 총호사(三都監摠護使)로, 동지중추부사 이명규를 수릉관(守陵官)으로 삼아 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대비가 영상·좌상에게 전교하기를,
“사정전에 빈전을 설치하는 것은 예전에 그런 예가 없었고 또 대내에 너무 가까우므로 옳지 않을 듯하니, 예종(睿宗) 때의 전례에 따라 충순당(忠順堂)에 빈전을 설치하는 것만큼 온편하지 못할 것이다.”
영상·좌상이 회계하기를,
“전일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상(喪) 때에 합당한 곳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통명전(通明殿)에 빈전을 설치했었는데 물의가 이제까지도 그르게 여기니, 이제 어찌 다시 잘못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충순당은 후원(後苑)의 거칠고 소활한 곳이므로 결코 거론할 수 없습니다.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오직 사정전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다면 사정전에 빈전을 설치하도록 하라.”
때는 서기 1545년 음력 7월 1일 조선 12대 임금인 인종이 서른한 해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세상을 등졌다. 태어난 직후 생모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를 7일 만에 잃고 계모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랐다.
조성왕조실록 인종 7월 1일 첫 번째 기사의 사신의 논담을 보면, ‘상은 자질이 순미(純美)하여 침착하고 온후(溫厚)하며 학문은 순정(純正)하고 효우(孝友)는 타고난 것이었다.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늘 종일 바로 앉아 언동(言動)은 때에 맞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한계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위한 뒤로는 정사(政事)할 즈음에 처결하고 보답하는 데에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고 때때로 어필(御筆)로 소차(疏箚)에 비답(批答)하되 말과 뜻이 다 극진하므로 보는 사람이 누구나 탄복하였다. 외척(外戚)에게 사정(私情)을 두지 않고 시어(侍御)에게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궁위가 엄숙하였다. 중종(中宗)이 편찮을 때에는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으며 친히 약을 달이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어선(御膳)을 전연 드시지 않았다. 이렇게 한 것이 거의 20여 일이었고 대고(大故)를 만나게 되어 음료(飮料)를 마시지 않은 것이 5일이었으니 애통하여 수척한 것이 예도에 지나쳐서 지극히 쇠약하여 거의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졸곡(卒哭)이 되어 조정(朝廷)이 권제(權制)를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다가, 대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청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허락하였으나 실은 실행하지 않았다. 창덕궁(昌德宮)에서 경복궁(景福宮)으로 이어(移御)하여서는 중종이 평일에 거처하던 곳을 보고 가리키며 ‘여기는 앉으신 곳이고 여기는 기대신 곳이다.’ 하고 종일 울며 슬피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병이 위독하던 밤에는 도성(都城) 사람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자지 않고 궐문(闕門)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상의 증세가 어떠한가 물었으며, 승하하던 날에는 길에서 누구나 다 곡하여 울며 슬퍼하는 것이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라고 적었다.
인종이 유명을 달리하고 3일째 되는 날 중전인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는 수라간 나인이 올리는 미음을 다시 물렸다. 부군인 인종이 죽고 단 한 모금의 곡기도 입에 넣지 않았다.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고 억울했다.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독살이었다. 그날 저녁 금상은 즉위하고 처음으로 용안에 밝은 미소를 띠었다.
대비께오서 친히 떡을 건네며 지난날 혹여 섭섭했던 일이 있었더라도 모두 잊고 성군이 되길 바라셨다며, 기실 어마마마도 자신을 아들로 인정하신 것이라며 어마마마의 말씀처럼 성군이 되실 것이라 환하게 웃던 인종이었다.
그날의 일을 생각하니 다시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내장이 모두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자신의 부군이지만 금상은 하늘이 내린 성군이었다.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폐지되었던 현량과(賢良科)를 부활하고 기묘사화 때의 희생자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伸寃)해 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혹자들은 인종의 이런 행보에 조선의 앞날에 서광이 비춘다며 성군임을 떠벌려 말하기도 했으며 저 대국이라는 명나라 사신들조차 인세에 보기 드문 효자요, 성군이 되실 것이라며 추켜세워 주지 않았던가.
흠이라면 오직하나 친족에 관한 일에 대해서만큼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을 쓰는 인종이었다.
그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데 태어나 7일 만에 어미를 잃고 임금 노릇하느라 바쁜 아버지는 보기 힘든 상황에 계모의 손에 자란 탓인지 언제나 애정에 목말라 했으며, 특히 친족들에게 만큼은 그 구애함이 극에 달한 것이다.
“중전마마, 영의정 윤인경 대감과 좌의정 유관 대감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무표정한 상태로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대로 부군을 따라갈 것이라 다짐하고 있던 중전에게
전날부터 끊임없이 대신들이 미음을 들라 하며 찾아왔다. 그들이 말한다고 죽기로 각오한 중전이 마음을 바꿀 리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세자빈에 간택되어 오직 인종 한 사람만을 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가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는 중전 박씨였다. 남은 세월 그 길고 긴 세월을 높은 담장 안에 갇혀 철창 안 새처럼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인종 1년 7월 4일 조선왕조실록 6번째 기사.
조정에 공포한 대행왕의 유교.
영의정 윤인경이, 중전이 언문으로 쓴 대행왕의 유교를 주서(注書) 안함에게 주어 승정원(承政院)에 보이니, 승지(承旨)·사관(史官) 등이 둘러 앉아 펴서 읽고 누구나 다 통곡하였다. 곧 문자로써 번역하여 별지에 써서 조정(朝廷)에 공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대행왕께서 임종 때에 전교하기를 ‘내가 우연히 이 병을 얻어서 부왕(父王)께 종효(終孝)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망극한 심정을 어떻게 죄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산릉(山陵)은 백성의 폐해를 덜도록 힘쓰고 반드시 부왕과 모후(母后) 두 능의 근처에 써야 한다. 상장(喪葬)의 모든 일은 되도록 소박하게 하고 상례도 일체 예문을 따르게 해야 한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말할 일이 있거든 반드시 대신에게 의논하여 일체 그 말을 들어야 한다.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오래 있던 사부(師傅)와 요속(僚屬)도 많이 있으니, 어찌 내 뜻을 아는 사람이 없겠는가. 송종(送終)하는 모든 일은 절대로 사치하지 말도록 하라.’ 하셨는데, 반복하여 백성의 폐해를 더는 것을 생각하고 전교하셨다. 망극한 중에 전교하신 것을 들었으므로 죄다 기억하지 못하여 대강만을 전한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나도 어찌 오래 살 수 있겠는가. 위급하게 되면 어느 겨를에 처리할 일을 알리겠는가. 대행왕의 능소(陵所)를 정한 뒤에 그 같은 언덕 안에 나를 묻을 곳도 아울러 정하는 것이 내 지극한 바람이다. 대행왕을 위하여 정한 경역이 길면 상당(上堂)·하당(下堂)을 만들어야 할 것이고, 모자란다면 합장(合葬)하는 것도 전례가 있다.”
사신이 논하기를, 아, 애통하다. 대행왕의 유교를 차마 볼 수 있으랴. 백성을 사랑하는 염려를 성회(聖懷)에서 늦추지 아니하여 병환이 위독하신 데도 한탄하여 ‘백성이 마침내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훙서할 때에도 백성의 폐해를 덜라고 분부하셨으니, 대개 중종의 상이 있고 나서 산릉의 일이 겨우 끝나자, 잇달아 네 중국 사신의 일로 온 나라 백성의 재력(財力)이 이미 다한데에 성념(聖念)이 근간(懃懇)하여 마지않았으니 어찌 이 때문에 더욱이 마음이 타지 않았겠는가. 하늘이 나이를 더 주어 그 인심(仁心)·인정(仁政)을 우리 동방에 크게 펴게 하였다면, 그 치화(治化)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늘이 동방을 돕지 아니하여 우리 백성이 지치(至治)의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아, 애통하다.
또 사신은 논한다. 훙서할 때에 ‘일체 예문을 따르라.’고 훈계한 까닭은 어찌 나라의 일이 예(禮)에 어긋나는 것이 심한 것을 늘 보았고 중종의 상 때에 어긋난 일이 더욱 많아 깊이 한탄한 나머지 이렇게 분부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대렴·소렴을 미리 하고도 염하는 것을 돌보지 않고 궁인에게 맡겼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가 그 분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사신은 논한다. 대행왕은 평시에 눕거나 기대어 피로해 졸은 적이 없고 늘 한 방에 바로 앉아 있는 것이 담담하여 마치 서생(書生) 같았고 편찮을 때에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증세가 위중하여져서야 비로소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였으므로 측근의 신하들이 비로소 그 병환이 깊어진 것을 알았다. 경회루(慶會樓)에 벼락 치던 날에는 대행왕의 증세가 이미 위독하였는데, 측근 신하가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물었으니 ‘마음이 안정된 지 이미 오랜데 무슨 놀랄 것이 있겠는가.’ 하고, 또 ‘어느 곳에 벼락이 쳤느냐?’고 묻자, 측근 신하가 성려(聖慮)를 놀라게 할 것이 염려되어 숨겨서 말하기를 서쪽에 벼락이 친 듯하나 아직은 확실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미안하다는 뜻을 제상에게 말하고 싶다.’ 하였다. 또 늘 측근 신하에게 말하기를 ‘음식을 조절하고 약을 먹으면 권제(權制)를 따르지 않더라도 지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마침 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권제를 따르더라도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하였고, 정신을 잃게 되어서는 스스로 헛소리를 하였는데, 번번이 경연(經筵)에 관한 일을 말하거나 청강(聽講)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소리였다. 초하룻날 밤 기절하였다가 되살아났을 때에 정염(鄭콦)이 들어가 진맥(診脈)하려는데 궁인(宮人)이 손을 끌어내니, 대행왕이 이미 말은 못하게 되었으나 마음속에는 매우 싫어하는 듯이 손을 움츠리고 내놓지 않았다. 윤임(尹任)이 곁에 있다가 그 뜻을 알고서 궁인을 뿌리쳐 보내고 나아가 손을 끌어내니, 정염이 그제야 진찰하였다. 아, 이 몇 가지 작은 일로도 대행왕의 수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고 사관이 쓰고 기사를 마무리할 때 밖에서 급하게 기별 없이 문이 열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대전내관이 뛰어 들어와 믿지 못할 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전, 전하께옵서! 전하께옵서 소생하셨나이다. 전하께옵서 숨을 쉬시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전하는 내용에 승정원 내부가 발칵 뒤집혔다. 마침 기사를 모두 작성하고 되살펴보고 있던 기사관(記事官) 윤결(尹潔)은 너무 놀라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승정원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윤결이 사정전 안으로 들어서자 상을 치르고 있던 대신들과 궁인들이 상복을 입은 채로 웅성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마침 내의원 의관이 들어 몹시 황망한 표정으로 금상의 용안을 살피고 있었다. 윤결은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대신들의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연통을 받고 급히 발걸음을 한 것인지 중전과 대비가 사정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찌 된 것이냐! 주상께서 소생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냐!”
중전이 몹시 힘든 표정이 역력한 채로 대전내관에게 묻자 의관의 행동을 살펴보고 있던 내관이 중전 앞에 다가가 아뢰기 시작한다.
“중전마마, 2각쯤 전부터 상궁과 나인들이 꿈에 주상 전하께옵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망극한 소리를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하의 용안을 살피던 중 전하께옵서 숨을 쉬시는 것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분명 전하께옵서는 숨을 쉬시옵니다.”
“어찌 이런! 어디 보자 비켜 보아라!”
급한 마음에 중전은 뒤늦게 따라 들어온 대비를 무시한 채 인종에게로 다가갔다. 중전 역시 3일 전에 숨이 멈춘 것을 직접 확인하였다. 그런데 한 번 멈춘 숨을 어찌 다시 쉰단 말인가? 말로 들어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중전이 다가가자 살펴보던 내의원 의관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중전이 인종에게 다가가 손가락을 코밑에 대고 귀를 가져다 대자 죽은 줄 알았던 인종의 코에서 뜨거운 기운을 내보내며 규칙적으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 전하! 어찌 이런 일이! 이런 황망할 때가 있는가. 살아 계신 주상 전하를 아……!”
중전은 인종이 되살아 난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혼절을 하고 말았다. 3일간 곡기를 전혀 먹지 않아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 급하게 달려와 부군이 되살아났음을 확인하고는 기쁜 마음과 함께,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그대로 혼절한 것이다.
옆에서 말없이 이를 지켜보던 대비 윤씨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뭐라 말도 못한 채 멀뚱히 인종과 중전을 보고 있었다. 3일만 지나면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꿈에 그리던 용상에 앉는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 그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차마 좋다고 웃을 수도 나쁘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관들이 급하게 이곳저곳에 알렸는지 사정전 외부에 있던 대신들이 줄줄이 정전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중전마마를 어서 뫼시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던 내관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것은 영의정 윤인경이었다.
영의정의 불호령이 대비의 눈치를 잠시 살피던 대전내관과 상궁들이 중전을 들쳐 업고 중궁전으로 가자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대비 문정왕후가 인종에게 다가가 인종의 안색을 살폈다.
분명 핏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는데, 다시 되살아 난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처럼 인종의 얼굴에 핏기가 돌고 있었다. 작지만 숨소리마저 들리고 있었다.
‘그래 봐야 며칠 더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너는 그대로 저승으로 가야 했어!’
속으로 독한 말을 내뱉는 것과는 다르게 대비는 온화한 표정으로, 아니 어쩌면 죽은 지아비가 돌아온 것처럼 기쁜 표정을 만들고는 뒤돌아 대신들에게 하명을 했다.
“주상이 살아 있음이 확실하니 어서 안으로 모시고, 어의가 옆에 붙어 주상의 옥체를 살피게 하시오. 뭣들 합니까! 주상이 다시 되돌아오신 것입니다! 정신들 차리세요!”
대비의 명에 영상과 좌상은 급히 내관들에 명하며 인종이 타고 갈 만한 들것을 준비하게 했고 죄인이라며 곡기를 끊고 스스로 벌을 청하고 있는 어의를 불러오라 명했다.
기사관 윤결은 이런 모든 상황을 꼼꼼히 기록하여 승정원으로 돌아온 뒤 정리를 하다. 문뜩 이틀 전에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인종 1년 7월 2일(임술) 9번째 기사.
경성(京城)에 밤에 소동이 있었다.
상께서 승하하시던 날에 경중(京中) 사람들이 스스로 경동(驚動)하여 뭇사람이 요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괴물이 밤에 다니는데 지나가는 곳에는 검은 기운이 캄캄하고 뭇수레가 가는 듯한 소리가 난다.’ 하였다. 서로 전하여 미친 듯이 현혹되어 떼를 지어 모여서 함께 떠들고 궐하(闕下)로부터 네거리까지 징을 치며 쫓으니 소리는 성 안을 진동하고 인마(人馬)가 놀라 피해 다니는데 순졸(巡卒)이 막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3∼4일 계속 된 후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