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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백응 1권
1화
형산(衡山)
작가 서문
자주 다니는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다.
솔개는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
솔개는 약 40세가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된다.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고,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나날이 힘들게 된다.
이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 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한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든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다.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그리고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이리하여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이다.
1) 세광테크놀로지 대표 정광호님의 글입니다.
사실 이 글을 읽은 것은 형산백응이라는 원고를 쓰기 시작한 이후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내용을 이곳에 적는 것은, 이 글이 형산백응이라는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주인공인 백아는 위에 나온 것과 같은 늙은 매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늙은 매가 찾고자 하는 모습과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매가 갖춰 갈 모습, 그리고 그 둘이 겪어야 할 고통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모습을 갖추게 되면 드넓은 하늘을 제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되겠지요.
저는, 그 과정을 제대로 그려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 글을 읽어 주시는 여러분께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적어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한 글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겁니다.
제가 쓴 글을 즐겁게 읽어 주신 분들이 있다면, 노력에 대한 최고의 보답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이 글이 책으로 나오게 해 주신 뿔미디어의 사장님과 지 실장님, 허 부장님을 비롯한 뿔미디어 식구 분들과 제 글을 좋게 보아 주신 백연님, 단향님, 그리고 문피아의 독자 분들과 커그, 라니안, 글터의 주민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예(刈) 배상
第一章 형산(衡山)(1)
짙은 운무가 산허리를 휘감는다.
아침 일찍 일어난 안개가 마치 승천하려는 용의 모습처럼 보인다.
구름 사이로 칠십이 개의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운봉무쇄(雲封霧鎖)라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 그 사이로 십여 개의 전각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고색창연한 건물보다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한 건물이 더 많았다.
형산의 줄기를 타고 세워진 전각들.
호남 제일 검문인 형산파가 둥지를 튼 곳이다.
“……늦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있는 걸까.
손에 쥔 목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조금 전과 같은 자세를 취한 소동(小童)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형은 좀 더 빨랐어.”
볼을 가볍게 부풀린,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아 퉁명스럽다기보다는 귀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잠시 자신의 손을 보던 아이는 고개를 젓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파검법(琵琶劍法). 형산에 들어오자마자 익히기 시작해 이제 햇수로 오 년이 되도록 붙잡고 있는 검이었다. 아직 진기의 흐름이 완벽하진 않으나 적어도 형식만은 비슷한 나이의 제자 중에선 가장 완벽하게 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검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며,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에 백유(白柳)의 검을 본 순간 그 자신감은 무너져 버렸다.
분명히 완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더 강했다. 형식에 어긋났다기보다는 형식을 초월한 듯한 느낌. 그 검에 비하면 자신의 검은 죽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뭐가 다른 거지?”
백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고작 열 살이 갓 넘은 아이가 해결하기엔 너무도 난해한 문제.
오랫동안 그 생각에 골몰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사부한테 물어봤자 호통만 칠 게 뻔한데.’
수련생의 교육을 맡은 청진을 떠올린 소동, 백아(白牙)의 눈에 우울함이 깃들었다.
오악검파.
중원의 오악에 둥지를 튼 다섯 개의 검문(劍門)을 뜻하는 단어다.
수많은 명산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다섯 개 명산.
태산과 화산, 숭산과 항산, 그리고 형산.
이 다섯 개의 명산엔 그 이름을 딴 검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추구하는 바도 달랐다. 그러나 이 다섯 문파는 오악에 둥지를 틀었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이 다섯 문파의 수장은 항상 화산이 차지하고 있었다. 구파에 들어갈 만큼 성세가 강한 화산은 오악검파에 속한 다른 검문들과는 그 수준이 달랐다. 고작 해야 한 성의 패자도 자처하기 힘든 다른 오악검파와는 달리, 중원 제일 검문이라는 이름에 도전하고 있는 화산은 언제나 부동의 일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문파들 역시 그것을 인정했다. 화산의 절대적 우위는 자명했다. 그것에 도전하고자 한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제일이 아닌 제이에 머물러 있었다.
형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인자가 될 수 없다면 이인자에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 일인자가 넘볼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화산을 제외한 나머지 네 검문 중 제일인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 가장 옳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형산이었다.
삼십육로(三十六路) 회풍낙안검(廻風落雁劍).
형산의 절기 중 하나인 이 검법으로 인해 형산은 다른 세 문파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검문들에게도 회풍낙안검에 뒤지지 않을 만한 절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일정한 경지에 이른 고수의 수에선 형산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어, 형산의 위치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만큼 공고해 보였다.
그러나 십 년 전부터 그 자리는 태산의 것이 되어 있었다.
검에서 밀린 것이 아니다. 세(勢)에서 밀린 것이다.
천제(天祭)를 올리기 위해 태산에 올랐던 황제의 눈에 태산의 무인이 들어오면서부터 형산에 대한 태산의 위협은 점점 그 크기를 키워 나갔다.
그렇게 오 년. 그사이 금의위의 이 할이 태산의 문인으로 채워졌고, 태산에 대한 황실의 지원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 결과, 가까이 있는 제남의 황보가에게도 밀리던 태산은 어느새 화산과도 견줄 만한 성세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장한 태산을 바라보는 다른 세 문파의 심기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화산은 그런 태산을 향해 코웃음을 칠 뿐이었지만, 형산과 숭산, 항산은 화산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인자의 자리를 굳혀 놓았던 형산이 받은 충격이 가장 컸고, 검에만 매진했던 형산의 문인들은 세력 확장에 눈이 먼 속인들이 되고 말았다.
청진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평생을 검에만 매진했다. 그러나 어이없는 방법으로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했으나, 어느새 태산의 위명은 중원 각지로 뻗어 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산에 대해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던 형산의 이름은 묻혀 버렸고, 이제는 호남성의 그저 그런 문파로만 취급 받았다.
형산의 문인들이 검에 대한 뜻을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검은 적당히 익히기만 하면 된다고 할 게 뻔해…….’
한숨을 내쉰 백아는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벌써 오 년째 비파검법만을 잡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형산오신검까지는 아니더라도 육합검(六合劍)이나 절영검(絶影劍) 중 하나에 입문할 시기이건만, 평제자로 입문한 형산의 어린 제자들은 아직도 내가 공부와 기초 검법만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견디다 못해 산을 내려간 제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떠난 사람들은 몇 년이라도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울 수 있었던 사람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제자들은 형산의 문인들이 의욕을 잃은 시기에 들어와 기본적인 것만 배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도가에 가까웠던 형산은 완전한 속가문파로 바뀌어 버렸다. 재질이 아닌 기부금의 액수가 배울 수 있는 무공을 결정하게 되어 버린 형산.
그렇게 받아들인 기부금은 형산을 살찌워, 형산은 호남을 넘어 강서까지도 넘볼 수 있는 거대 문파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 좋은 걸까.”
몇 달 전에 형산에 온 화산의 문인이 내뱉은 말이 백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초가집에 기와지붕을 얹어 놓은 격이다.”
그 말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사제?”
“……아.”
“여기서 뭐 해?”
“그냥…….”
청색 무복을 입은 소년, 백유를 본 백아는 검을 든 손을 살짝 감췄다.
“수련 중이었어?”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내심 경쟁 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백아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형양표국에서 수련생이 들어온다며?”
“응? 어. 너도 들었어?”
“얼마나 가져왔대?”
“글쎄.”
겨우 수련 중인 평제자에 불과한 그들이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호남성 남부의 운송을 거머쥐고 있는 형양표국이라면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닐 것이다.
형산과 형양표국은 호남을 넘어 강서로 세력을 뻗치려 하고 있었다.
목적이 같고 원하는 것이 다른 두 세력이 손을 잡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두 세력은 더 강한 결속을 약속했고, 그 약속에 따라 형양표국주의 셋째 아들은 형산 장로의 제자로 들어오게 되었다.
약속을 맺은 지 이 년.
올해 열 살이 된 형양표국주의 셋째 아들이 형산으로 들어올 시기가 된 것이다.
1화
형산(衡山)
작가 서문
자주 다니는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다.
솔개는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
솔개는 약 40세가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된다.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고,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나날이 힘들게 된다.
이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 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한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든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다.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그리고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이리하여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이다.
1) 세광테크놀로지 대표 정광호님의 글입니다.
사실 이 글을 읽은 것은 형산백응이라는 원고를 쓰기 시작한 이후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내용을 이곳에 적는 것은, 이 글이 형산백응이라는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주인공인 백아는 위에 나온 것과 같은 늙은 매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늙은 매가 찾고자 하는 모습과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매가 갖춰 갈 모습, 그리고 그 둘이 겪어야 할 고통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모습을 갖추게 되면 드넓은 하늘을 제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되겠지요.
저는, 그 과정을 제대로 그려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 글을 읽어 주시는 여러분께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적어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한 글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겁니다.
제가 쓴 글을 즐겁게 읽어 주신 분들이 있다면, 노력에 대한 최고의 보답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이 글이 책으로 나오게 해 주신 뿔미디어의 사장님과 지 실장님, 허 부장님을 비롯한 뿔미디어 식구 분들과 제 글을 좋게 보아 주신 백연님, 단향님, 그리고 문피아의 독자 분들과 커그, 라니안, 글터의 주민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예(刈) 배상
第一章 형산(衡山)(1)
짙은 운무가 산허리를 휘감는다.
아침 일찍 일어난 안개가 마치 승천하려는 용의 모습처럼 보인다.
구름 사이로 칠십이 개의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운봉무쇄(雲封霧鎖)라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 그 사이로 십여 개의 전각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고색창연한 건물보다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한 건물이 더 많았다.
형산의 줄기를 타고 세워진 전각들.
호남 제일 검문인 형산파가 둥지를 튼 곳이다.
“……늦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있는 걸까.
손에 쥔 목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조금 전과 같은 자세를 취한 소동(小童)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형은 좀 더 빨랐어.”
볼을 가볍게 부풀린,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아 퉁명스럽다기보다는 귀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잠시 자신의 손을 보던 아이는 고개를 젓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파검법(琵琶劍法). 형산에 들어오자마자 익히기 시작해 이제 햇수로 오 년이 되도록 붙잡고 있는 검이었다. 아직 진기의 흐름이 완벽하진 않으나 적어도 형식만은 비슷한 나이의 제자 중에선 가장 완벽하게 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검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며,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에 백유(白柳)의 검을 본 순간 그 자신감은 무너져 버렸다.
분명히 완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더 강했다. 형식에 어긋났다기보다는 형식을 초월한 듯한 느낌. 그 검에 비하면 자신의 검은 죽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뭐가 다른 거지?”
백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고작 열 살이 갓 넘은 아이가 해결하기엔 너무도 난해한 문제.
오랫동안 그 생각에 골몰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사부한테 물어봤자 호통만 칠 게 뻔한데.’
수련생의 교육을 맡은 청진을 떠올린 소동, 백아(白牙)의 눈에 우울함이 깃들었다.
오악검파.
중원의 오악에 둥지를 튼 다섯 개의 검문(劍門)을 뜻하는 단어다.
수많은 명산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다섯 개 명산.
태산과 화산, 숭산과 항산, 그리고 형산.
이 다섯 개의 명산엔 그 이름을 딴 검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추구하는 바도 달랐다. 그러나 이 다섯 문파는 오악에 둥지를 틀었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이 다섯 문파의 수장은 항상 화산이 차지하고 있었다. 구파에 들어갈 만큼 성세가 강한 화산은 오악검파에 속한 다른 검문들과는 그 수준이 달랐다. 고작 해야 한 성의 패자도 자처하기 힘든 다른 오악검파와는 달리, 중원 제일 검문이라는 이름에 도전하고 있는 화산은 언제나 부동의 일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문파들 역시 그것을 인정했다. 화산의 절대적 우위는 자명했다. 그것에 도전하고자 한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제일이 아닌 제이에 머물러 있었다.
형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인자가 될 수 없다면 이인자에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 일인자가 넘볼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화산을 제외한 나머지 네 검문 중 제일인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 가장 옳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형산이었다.
삼십육로(三十六路) 회풍낙안검(廻風落雁劍).
형산의 절기 중 하나인 이 검법으로 인해 형산은 다른 세 문파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검문들에게도 회풍낙안검에 뒤지지 않을 만한 절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일정한 경지에 이른 고수의 수에선 형산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어, 형산의 위치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만큼 공고해 보였다.
그러나 십 년 전부터 그 자리는 태산의 것이 되어 있었다.
검에서 밀린 것이 아니다. 세(勢)에서 밀린 것이다.
천제(天祭)를 올리기 위해 태산에 올랐던 황제의 눈에 태산의 무인이 들어오면서부터 형산에 대한 태산의 위협은 점점 그 크기를 키워 나갔다.
그렇게 오 년. 그사이 금의위의 이 할이 태산의 문인으로 채워졌고, 태산에 대한 황실의 지원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 결과, 가까이 있는 제남의 황보가에게도 밀리던 태산은 어느새 화산과도 견줄 만한 성세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장한 태산을 바라보는 다른 세 문파의 심기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화산은 그런 태산을 향해 코웃음을 칠 뿐이었지만, 형산과 숭산, 항산은 화산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인자의 자리를 굳혀 놓았던 형산이 받은 충격이 가장 컸고, 검에만 매진했던 형산의 문인들은 세력 확장에 눈이 먼 속인들이 되고 말았다.
청진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평생을 검에만 매진했다. 그러나 어이없는 방법으로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했으나, 어느새 태산의 위명은 중원 각지로 뻗어 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산에 대해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던 형산의 이름은 묻혀 버렸고, 이제는 호남성의 그저 그런 문파로만 취급 받았다.
형산의 문인들이 검에 대한 뜻을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검은 적당히 익히기만 하면 된다고 할 게 뻔해…….’
한숨을 내쉰 백아는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벌써 오 년째 비파검법만을 잡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형산오신검까지는 아니더라도 육합검(六合劍)이나 절영검(絶影劍) 중 하나에 입문할 시기이건만, 평제자로 입문한 형산의 어린 제자들은 아직도 내가 공부와 기초 검법만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견디다 못해 산을 내려간 제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떠난 사람들은 몇 년이라도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울 수 있었던 사람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제자들은 형산의 문인들이 의욕을 잃은 시기에 들어와 기본적인 것만 배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도가에 가까웠던 형산은 완전한 속가문파로 바뀌어 버렸다. 재질이 아닌 기부금의 액수가 배울 수 있는 무공을 결정하게 되어 버린 형산.
그렇게 받아들인 기부금은 형산을 살찌워, 형산은 호남을 넘어 강서까지도 넘볼 수 있는 거대 문파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 좋은 걸까.”
몇 달 전에 형산에 온 화산의 문인이 내뱉은 말이 백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초가집에 기와지붕을 얹어 놓은 격이다.”
그 말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사제?”
“……아.”
“여기서 뭐 해?”
“그냥…….”
청색 무복을 입은 소년, 백유를 본 백아는 검을 든 손을 살짝 감췄다.
“수련 중이었어?”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내심 경쟁 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백아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형양표국에서 수련생이 들어온다며?”
“응? 어. 너도 들었어?”
“얼마나 가져왔대?”
“글쎄.”
겨우 수련 중인 평제자에 불과한 그들이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호남성 남부의 운송을 거머쥐고 있는 형양표국이라면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닐 것이다.
형산과 형양표국은 호남을 넘어 강서로 세력을 뻗치려 하고 있었다.
목적이 같고 원하는 것이 다른 두 세력이 손을 잡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두 세력은 더 강한 결속을 약속했고, 그 약속에 따라 형양표국주의 셋째 아들은 형산 장로의 제자로 들어오게 되었다.
약속을 맺은 지 이 년.
올해 열 살이 된 형양표국주의 셋째 아들이 형산으로 들어올 시기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