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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第一章 형산(衡山)(2)
연배가 높은 수련생들에게 들었던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며, 백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녀석한테는 절대 안 져.’
비파검법만 배운 자신과는 달리, 그는 비파검법은 기본 형식만 익힌 후 좀 더 상급의 검을 익히게 될 것이 뻔했다. 어쩌면 천주검법(天柱劍法)이나 이화난검(梨花亂劍) 같은 형산오신검 중 하나를 익히게 될지도 모른다.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형양표국의 이름을 생각하면 그것이 당연하리라.
생각에 잠겨 있는 백아의 귀로 은은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아. 벌써 이렇게 됐나?”
오후 수련을 알리는 소리다.
‘어차피 또 비파검법뿐이겠지.’
그게 한계였다. 막대한 기부금을 가지고 입문하지 않는 한, 고작 해야 표국에나 들어가거나 지방 부호의 보표 일을 하기에나 적합할 정도의 검만 가르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산을 내려가면 그 순간부터 형산에 입은 은혜를 갚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부정할 수 없는 일. 그러나 백아는 왠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 생각을 털어 내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백아는 먼저 신형을 날린 백유의 뒤를 따랐다.
* * *
술시(戌時). 거뭇해진 하늘에 진홍색 줄기가 떠올랐다.
검을 가르치던 무사부는 이미 한 시진 전에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나마 기운 없는 모습으로 목검을 잡고 있던 제자들도 종이 치자마자 검을 내팽개친 채 각자의 숙소를 향해 내달렸다.
무예를 배우러 왔음에도, 그것에 짓눌려 버렸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모두가 떠난 것은 아니었다. 수련장을 떠난 것은 대부분 기부금을 주고 입산한 사람들. 자신의 뜻보다는 부모의 뜻에 의해 올라온 자들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나,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수련자는 모두 자신의 뜻에 의해 산에 오른, 그런 사람들이었다.
‘후우―.’
그들 가운데 있던 백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파검은 더 이상 다듬을 곳이 없었다. 제대로 된 무인이 본다면 허점이 많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몸이 검로를 기억하도록 반복할 뿐. 그 외의 것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무의미함, 그리고 허무함이 찾아든 것을 느낀 백아는 목검을 집어 들고는 수련장을 나섰다.
해가 빨리지는 산속이기에 길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익숙한 길이다. 잘 보이지 않는다 해서 길을 잃을 염려도, 굴러 떨어질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조금 빠른 걸음. 어찌 보면 달리는 듯한 속도로 길을 지나던 백아의 발이 멈췄다.
“응?”
길가 한구석. 사람의 출입이 드문 그곳에 몇 개의 인영(人影)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어른은 아니다.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수련생들일 것이다.
‘이런 시간에 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백아는 소리 죽인 걸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너, 재수 없어.”
툭 내던지는 목소리엔 짜증이 잔뜩 담겨 있었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백아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나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백아는 반쯤 몸을 눕힌 자세를 취하며 그곳을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다섯 명 정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 대의 소년들을 본 백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네 명이 한 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듯한 얼굴. 아마도 이번에 들어온 속가제자일 것이다.
쓸데없는 일에 괜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백아의 머리를 스쳤다.
저런 일은 흔한 일이다.
텃세라고 할까. 조금이라도 오래 붙어 있었던 자들의, 일종의 세력과시다.
“형양표국에서 왔다고 해서 특별 대우라도 해 주길 바랐냐?”
‘……형양표국?’
막 몸을 돌리려던 백아의 발이 멎었다.
나무에 등을 반쯤 기댄 백아의 고개가 그들을 향했다. 어둑한 숲 그림자가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을 뚫고 나온 달빛이 숲 그림자를 치워 주어, 백아는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수련생에게 지급되는 청색 무복을 입은 소년들이 갈의(葛衣)를 입은 소년을 둘러싸고 있다. 조금 전에도 본 모습이지만, 갈의를 입은 소년이 이번에 올라온 형양표국의 셋째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고 있었다.
뭐랄까.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를 둘러싼 소년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조금씩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런 거 바란 적 없는데.”
갈의를 입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퉁명스러움이 가득해,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저 멍청한 녀석들을 따라온 게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뭐라고 했냐?”
“너희, 머리도 나쁘구나.”
저쯤 되면 이미 도발이다.
머리가 크지 않은 아이들이라 해서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다. 하물며 그것이 자기들과 비슷한 나이의 아이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라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당연히,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엔 흥분으로 인한 홍조가 짙게 깔렸다.
“이 자식이!”
“결국은 이거잖아. 마음에 안 드니까 덤벼라. 아냐?”
피식 웃어 보인 갈의 소년은 갑작스럽게 손에 들린 목검을 휘둘렀다. 가장 오른쪽에 있던 청의 소년의 머리를 강타한 목검은 두 번째 소년을 노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공격이어서인지 두 번째 소년 역시 반항하지 못한 채 목검을 얻어맞았다.
열 살 남짓한 소년의 손에 들린 목검이라 해도 흉기다. 맞아서 죽지는 않는다 한들 어린 소년들이 견디기엔 너무도 큰 충격. 당연히 그런 것에 타격을 받은 소년들은 머리를 감싸 쥔 채 주저앉았다.
남은 것은 둘……이라고 생각한 갈의 소년이 몸을 돌렸을 때, 어디선가 튀어나온 목검이 그의 등을 때렸다.
“윽!”
“이 건방진 새끼가!”
풀숲에 숨어 있었을 또 한 명의 청의 소년의 기습을 받은 갈의 소년이 쓰러졌다. 그다지 강한 공격이 아니어서인지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발길질은 가늘게 붙어 있는 그의 정신을 마구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만 해.”
“넌 뭐야!”
폭행을 제지하려는 소리를 들은 소년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넷도 아니고 다섯이라…….”
“상관하지 마.”
“싫은데.”
“너도 죽고 싶냐?”
직설적인 협박을 들은 백아의 입에 웃음이 떠올랐다.
우습다. 무슨 검로를 따르는 것도 아닌 마구잡이식 공격. 그것도 정면이 아닌 뒤쪽에서의 기습을 한 주제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이 너무도 바보같이 느껴졌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등 뒤로 숨겨 놓았던 목검을 들어 올렸다.
마구잡이식의 공격을 퍼붓던 소년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 완벽한 비파검의 기수식이 백아에게서 펼쳐졌다.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금방이라도 폭력을 휘두를 것 같던 소년들이 움츠러들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백아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하냐.”
“이익!”
오기가 치솟은 걸까. 청의 소년 중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멍청하긴.”
그저 손목을 아래로 내린 것뿐. 그런데도 그 소년은 피하지 못했다.
탁. 하는 다소 가벼운 타격음이 백아의 귀에 들렸다. 그러나 가벼운 것은 소리뿐이었는지, 이마에 목검을 맞은 소년은 기괴한 신음을 내며 바닥을 굴렀다.
신음조차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소년을 본 다른 아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눈에 독기를 피워 올린 소년들은 고함을 지르며 백아에게 달려들었다.
‘늦잖아.’
속도도 제각각. 공격 방향도 제멋대로다.
가볍게 들려진 목검이 몇 차례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가벼운 타격음이 귀를 울린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짤막한 비명과 신음.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백아를 향해 달려들었던 소년들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을 굴렀다.
형편없는 모습이다.
같은 무공, 같은 시간을 수련했는데도 이런 차이가 난다.
집중의 차이. 수련에 몰두한 정도의 차이다.
“괜찮냐?”
쓰러진 갈의 소년을 향해 다가간 백아는 발을 들어 그를 툭툭 건드렸다. 기절하지는 않았는지, 낮은 신음을 흘린 소년은 잠시 후 머리를 부여잡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으윽.”
갈의 소년은 반쯤 몸을 일으키다 털썩 주저앉았다. 걷어차인 통증이 심한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잔뜩 인상을 쓴 소년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소년은 몸을 일으켜 쓰러진 청의 소년들을 몇 차례 걷어차고는 백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냐?”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던 백아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참견이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툴툴거린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한 얼굴. 꽤 자존심이 강한 유형이라고 생각한 백아는 피식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 멍이라도 지우고 나서 그렇게 말하지 그랬냐.”
“으윽.”
얼굴에 난 멍을 매만진 소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젠장.”
“뭐?”
“아니…… 형양표국에서 온 유경이다. 넌?”
“백아.”
“아아, 그게 너였냐?”
전혀 의외의 말을 들은 백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바닥에 쓰러진 소년이 흘린 신음을 들은 유경은 잔뜩 인상을 쓰며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찼다. 그러고서도 분이 안 풀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백아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더 이상의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사부가 말한 사람 중에 네 이름이 있었어. 두 명이었는데, 나머지 한 명은 기억이 안 나네.”
‘사형이겠지.’
아마도 다른 한 명은 백유일 것이다.
“뭐라고 했는데?”
“자기 제자가 된 이상 그 녀석들보다 뒤처지면 가만 안 두겠다고.”
피식 웃어 보인 백아와는 달리, 나름대로 심각한 표정을 지은 유경은 고개를 돌려 쓰러진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녀석들이야 상대할 가치도 없지만, 너 정도라면 나쁘진 않겠지.”
“무슨 소리야?”
“경쟁자로 인정해 주겠다 이거다. 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왠지 나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마음대로.”
유경은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부어오른 눈두덩에서 통증이 느껴져 유경은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장난하는 거 아냐.”
“뭐, 나쁘지 않겠지.”
가볍게 손을 내민 백아의 눈에, 어느새 골짜기 사이로 얼굴을 내민 달이 보였다.
형산의 수련은 가볍지 않다.
하나의 틀을 이룬 문파의 수련은 엄격한 체계가 갖춰지게 마련이다. 호남 제일 검문이라는 명성을 가진 형산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것은 근래에 받아들인 평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었다.
십삼로 비파검. 평제자들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검공.
이미 몸에 익을 대로 익어 굳이 시연을 보지 않아도 능숙하게 펼칠 수 있었다.
‘또…….’
오늘도 역시 비파검이었다.
어차피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가 없었다 해서 실망이 없는 건 아니다.
한숨. 긴 호흡을 내뱉은 백아는 목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검공의 기본은 손이다. 모든 초식은 손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법. 검의 움직임에 신경 쓰지 말고 손에 신경을 쏟아라.”
언제나 듣던 말. 이미 외워 버렸다.
‘검이 흔들리는 것은 힘이 부족하기 때문.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교정될 문제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검이 흔들리는 것은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힘이 생기면 신경 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교정될 문제니 그것에 너무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벌써 몇 년 동안 들어온 말이다. 그것은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인지 그곳에 몰려 있는 모두의 눈엔 졸음과 지루함이 떠올라 있었다.
모두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백아는 고개를 돌렸다.
‘후우―.’
빈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유경의 자리였던 곳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채우고 있었다.
유경이 들어온 지 팔 개월. 유경은 비파검에 어느 정도 능숙해지자마자 이곳을 떠나 자개봉의 백운정(白雲亭)으로 거처를 옮겼다.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장로 이상의 인물에게 사사받게 되리라.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설명이 끝났다. 이젠 수련을 할 시간. 목검을 쥔 손이 자연스레 들렸다.
익숙해진 동작이기에 끊김이 없다. 아직 힘이 부족해 검 끝이 떨릴 뿐. 그것을 제외한다면 흠 잡을 곳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세를 교정해 주러 다가오던 교관의 발이 멎었다.
‘놀랍군.’
아직 어린 소년. 그런데도 자세만으로는 자신과 비슷할 정도다.
교정할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교본 그 자체. 그 모습을 그대로 화첩에 담아 두고 싶을 정도였다.
올려진 목검을 내리긋는 모습도 마찬가지. 힘이 부족할 텐데도 정확한 속도로 휘두르고 있었다.
“아까워.”
평제자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예전의 형산이라면 저런 아이를 평제자에 머무르게 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형산은 달랐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한들, 아무 기여도 없는 아이를 적전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특전이라는 것은 문파에 기여한 아이들에게나 주어지는 것. 만약 재능이 아깝다는 이유로 적전으로 받아들인다면, 문파에 기여를 함으로써 적전 자리를 보장 받았던 아이들은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그 아이들은 형산을 버리고 태산으로 몰려가려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화산으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씁쓸한 표정을 띄운 그는 고개를 돌려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