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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第一章 형산(衡山)(3)
그러는 사이, 수련을 마치는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성의 없이 검을 휘두르던 아이들 대부분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간혹 검을 쥔 채 조금 전의 자신을 떠올려 보는 아이들도 보였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일 년만 지난다면 모두 다 체념하게 될 것이 뻔하다.
검을 휘두르던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선 백아는 입술을 깨물며 자개봉을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아…….”
익숙한 목소리. 뒤를 돌아본 백아의 눈에 잡힌 건 역시나 백유의 모습이었다.
“별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어.”
“그래?”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백유는 백아를 지나쳐 정면의 바위에 몸을 기댔다.
산 중턱에 있어서인지 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불어온 바람에 피로를 잊어 갈 즈음, 가만히 서 있던 백유의 입이 열렸다.
“너, 섬서 출신이라고 했었지?”
살짝 고개를 돌린 백아는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 흘렸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볼 뿐. 그 외의 반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야?”
“맞아.”
왠지 불만이 서린 것 같은 말투였다. 그것에 고개를 갸웃거린 백유는 백아를 바라보았지만,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뭔가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백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이곳으로 온 거야?”
“응?”
“섬서엔 화산이 있잖아. 굳이 호남까지 올 필요는 없…….”
“그러는 사형은?”
“응?”
“왜 이곳에 온 거야?”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말허리를 잘린 백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나야 호남 출신이니까.”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백아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설명을 바라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반응은 없었다. 알아서 대답하라는 듯한 태도. 백아답다는 생각을 하며, 백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형산에 올라온 적이 있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백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연화봉 중턱에서 검무를 추고 있는 도인을 봤어. 그렇게 화려한 검무도 아니었는데, 무려 두 시진이나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었어.”
“검무?”
이상하다는 듯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백유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그것 때문에 형산에 온 거야.”
짧은 설명.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너는 왜 여기까지 온 거야? 검을 배우고 싶었다면 화산으로 가는 편이 유리했을 텐데.”
“화산은 안 돼.”
“네 자질이면 충분히 적전이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사형도 마찬가지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놀림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짝 볼을 부풀린 백아는 백유를 향해 못마땅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런 걸로 생각하면 사형이 훨씬 앞서잖아.”
“나야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
그냥 얼버무리려 한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것을 말할 이유가 없다고 느껴, 백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화산은 안 된다는 거야?”
대화를 그만두려 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걸음을 붙잡는 말에 백아는 발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꼭 말해야 돼?”
찌푸린 눈살이 보여, 백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백유에게서 시선을 뗀 백아는 그대로 산을 내려갔다. 수련 시간도 끝난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곳에 있어 봤자 기분만 더 나빠질 뿐이다.
‘화산으로 갈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
화산이 형산보다 나은 곳이라는 건 자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곳으로 온 것은 그럴 수 없기 때문.
그 일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곳이 아닌 화산에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었다. 기분이 극도로 나빠져 무작정 검을 휘두르고 싶어졌다.
“젠장.”
주먹을 쥔 손으로 근처의 나무를 때렸다. 알싸한 통증. 손이 부어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백아는 다시 손을 들어 조금 전의 나무를 다시 때렸다.
기억엔 없지만, 몇 번을 들었는지 알지도 못할 정도로 못이 박힌 일.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야, 너.”
불쾌한 느낌. 눈살을 찌푸린 백아는 몸을 돌렸다.
“이게 어디서 눈을 부릅뜨고…….”
백아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소년 둘이 보였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 듯, 그들의 얼굴에도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가만히 그들을 보던 백아의 눈살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가장된 불쾌함. 단지 화풀이 상대를 찾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파악한 탓이다.
“야, 지금 우릴 무시하는 거냐?”
“……꺼져.”
“하?”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은 소년들은 백아를 바라보았다.
“뭐 이런 겁대가리 없는…….”
서로를 바라보며 황당해 하고 있던 소년들의 눈에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목검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공격해 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소년들은 당황해 하며 몸을 물렸다. 그러나 악착같이 쫓아온 목검이 그중 하나의 가슴을 때렸고, 가슴을 맞은 소년은 뼈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비명을 토해 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며 비틀거린 탓에 옆쪽을 얻어맞아 쉽게 부러진 갈비뼈가 가슴을 찔렀다.
비명을 토해 내며 쓰러진 친구를 본 소년의 눈에 독기가 피어올랐다.
급히 몸을 숙여 주먹만 한 돌멩이를 주워 든 소년은 그것을 백아를 향해 집어 던졌다.
날카로운 소리에 백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지척으로 다가와 있어, 백아는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내력이라도 있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내력을 쌓기엔 이른 나이이기에, 백아는 빠르게 날아든 돌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날아든 돌엔 미약하나마 내력이 실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돌에 맞은 오른팔이 벌써부터 부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건방진 새끼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동작이 꽤 민첩했다.
검을 앞으로 찔러 넣어 움직임을 막으려 했지만, 소년은 오히려 그것을 위로 쳐 내며 달려들었다.
‘제길.’
날이 서 있는 검이라면 의도대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들고 있는 것은 목검. 타박상은 입을지언정 베이지는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이 손으로 목검을 쳐 낸 소년은 백아의 멱살을 잡고는 주먹을 내질렀다.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에 부딪힌 입술 안쪽이 찢어지는 느낌. 날카로운 통증이 그 뒤를 이어, 금방이라도 비명을 내지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구타는 몇 차례 더 이어졌다. 그럼에도 비명을 전혀 지르지 않는 백아를 질렸다는 듯이 쳐다본 소년이 손을 놓았을 때, 비명을 참고 있던 백아의 입이 막 멱살에서 떨어진 소년의 손을 물어뜯었다.
“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을 붙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소년. 그를 보는 백아의 눈에선 살기마저 느껴졌다.
떨어진 검을 쥔 백아가 소년을 내리치려 할 때, 갑작스럽게 날아든 목검이 그런 백아를 막아섰다.
“그만 해.”
검을 내리치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선 백아의 눈이 자신을 막아선 목검의 끝을 향했다.
“비켜.”
“그만 하라고 했어.”
단호한 말투. 이럴 때의 백유는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입술을 깨물며 쓰러진 소년을 바라본 백아는 슬쩍 검을 내렸다. 그러나 기분이 풀리지 않아, 백아는 들고 있던 목검을 쓰러진 소년의 얼굴을 향해 집어 던졌다.
“너…….”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잔뜩 드러낸 백아는 다시 한 번 쓰러진 소년들을 보곤 몸을 돌렸다.
얻어맞은 뺨이 얼얼했다. 입 안은 심하게 터졌는지 비릿한 핏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좀 더 때렸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돌아가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쳇.”
근처 계곡에 들러 입 안을 씻어 냈다. 따끔하게 느껴지는 통증. 찢어진 부분에 물이 닿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
“너, 정말 죽일 생각이었잖아.”
“……그런 거 아냐.”
다시 입 안을 헹궈 낸 백아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바보는 아냐. 사람을 죽이는 게 어떤 건지는 알고 있어.”
“우발적인 살인이라는 것도 있어.”
“…….”
막 반론을 내뱉으려던 백아의 입이 멎었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찾아들었다. 지루할 정도의 고요함. 물이 흐르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시간마저도 멈춰 버린 듯한 착각이 들었으리라.
한참을 그러고 있던 백아는 입을 열었다.
“아까, 왜 화산에 안 갔냐고 했지?”
백아의 말을 들은 백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붙잡을 백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끝내려 한 말을 다시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 탓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도 화산에 가려고 했어. 예전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죽여야 될 사람이 그곳에 있어.”
아직 어린 아이가 입에 담기엔 너무도 무거운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아, 그 말을 들은 백유는 당황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백아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도 날 알아. 물론 지금은 잊었겠지만.”
“그, 그래?”
“그래서 화산엔 못 가.”
씁쓸한 느낌이 가득한 말. 그것을 내뱉은 백아는 고개를 돌려 백유를 바라보았다.
“이제 대답이 됐어?”
차가운 눈.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친 백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얀 달이 떠올랐다.
연화(蓮花)봉 너머로 살며시 고개를 내민 달. 시린 백광이 눈을 부시게 한다.
열넷. 형산에 들어온 지도 벌써 칠 년이 지났다.
살짝 손을 움직여 검을 휘두르자, 시린 달빛이 검에 맺혔다.
이 년이 지나도록 달라진 것은, 목검이 진검으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배울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비파검법뿐.
지난 이 년 동안 내력은 더 깊어졌다. 그러나 검은 그대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형식은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상태였기에, 더 이상의 발전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건천공(乾天功)이라도 배울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산을 내려가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이대로 내려가 봤자 그저 그런 삼류 무사 취급을 받을 뿐이다. 예전이었다면 형산의 문하라는 것만으로도 대접 받을 수 있었겠지만, 태산의 영향을 받아 무관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어 버린 지금의 형산에 대한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당연히 형산 문하에 대한 대접도 점점 박해져, 지금의 형산 제자는 무관 출신의 무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가를 받을 뿐이다.
형산의 세가 점점 커져 온 것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겠지만, 특출 난 고수의 수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걸론 부족해.”
거액을 기부하고 입문한 녀석을 꼬드겨 건천공을 익힐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익혀 왔던 기초 토납법과는 차원이 다른 절학(絶學).
일 년…… 아니 육 개월만 더 빨리 익힐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것이다.
“아무래도 비파검법만으로는 무리겠지.”
원비칠식(猿臂七式)만이라도 익힐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 육합검법(六合劍法)이라도 배울 수 있었다면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물론 비파검과 육합검의 차이가 뚜렷한 것은 아니나, 하나의 검에 대해 정체를 느낀 지금으로서는 다른 검에 대한 욕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내력을 운용하고 있어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지만, 새벽의 바람은 참기 힘들 정도로 차갑게 느껴졌다.
“산을 내려가야 하나.”
이대로 있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차라리 산을 내려가 먼발치에서라도 진짜 고수들을 보는 것이 훨씬 나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것도 마냥 좋은 방법인 건 아닐 것이다.
“내려간다니?”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목소리기에, 백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냥 해 본 말이야.”
살짝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백아의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더 빨라졌어.’
“그냥 해 본 말 같지 않은데?”
“너도 슬슬 내려갈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남색 경장(輕裝)을 걸친 소년, 유경의 고개가 살짝 흔들렸다.
이 년 전 형산을 시끄럽게 했던 형양표국주의 셋째 아들. 기부금에 딸려 오는 형식적 제자인 걸로만 생각되던 유경은 또 한 번 형산을 놀라게 했다.
입문한 지 일 년 만에 비파검법을 완벽하게 익혔다. 오 년간 그것을 붙잡고 있던 백아와 견주어도 크게 떨어지지 않을 만큼 숙련된 시연을 보인 유경은 곧바로 형산의 장로인 청허에게 절영검법(絶影劍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일 년.
속가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유경은 다음 대의 형산 제일 후기지수로 내정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뭐. 아버지도 재촉하더라. 이제 내려올 때 되지 않았냐면서 말야.”
“혹시, 백유 사형 이야기 들었어?”
“응?”
“일 년 전에 하산해서 형양표국으로 들어갔잖아.”
유경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더라?”
“……됐다.”
정말 모른다는 표정이다.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조금 놀랐다. 백유라면 충분히 두각을 드러낼 거라 생각했건만, 유경은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일에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백유조차도 그저 그런 무인으로 취급 받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