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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第一章 형산(衡山)(4)


형양표국이 꽤 크다고는 하나 일개 표국에서도 대접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내심 그를 경쟁 상대로 여기고 있던 백아로서는, 조금이나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형산의 문하가 그 정도 대접밖에 받지 못한다니.’
자신이 처음 형산에 들어올 때도 형산 문하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당시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박한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형산이라는 문파의 세가 커질수록 그 문하에 대한 대우는 박해지고 있었다.
장로급의 적전제자나 제대로 된 무인 대접을 받을 뿐. 지금은 어느 정도 이름 있는 중소 문파의 제자가 형산의 문하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
거대한 무관으로 전락해 버린 형산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어때? 같이 내려갈래?”
“아니. 됐어.”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열넷. 산을 내려가기엔 조금 이른 나이다.
비단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면에선 지금 내려가는 게 최선일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더 나은 문파나 스승을 찾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딱히 이 산에 정이 든 것도 아니었다. 이미 간신히 붙어 있던 정도 떨어져 이제는 그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장소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백아는 이곳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혹시 알아? 십 년 정도 붙어 있으면 불쌍해서라도 제대로 된 검을 가르쳐 줄지?”
“칠 년씩이나 있었다면서 아직도 그런 기대를 하는 거야?”
“삼 년만 더 버티면 십 년이니까.”
“같이 내려가자니까. 내가 의숙한테 말하면 제자로 삼아 줄지도 몰라.”
“의숙?”
“내가 지난번에 말했잖아. 일 년에 한두 번 오는 의숙이 있다고.”
“백련검(百鍊劍) 능현(凌弦)?”
고개를 끄덕이는 유경을 보며 백아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나쁘지 않은 제안. 백련검이라면 호남제일검(湖南第一劍)으로 불리는 절정검객이다.
그의 제자가 된다면 형산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백아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왜?”
“백련검은 화산과 견줄 수 없잖아.”
“하. 형산 문인이 화산과 견주길 바라는 거야?”
“그럼 안 돼?”
“장문인도 포기한 걸 하겠다고? 그것도 지금의 형산에서?”
“형산에 남아 있으면 희망이라도 있어. 등천제룡십이식(騰天帝龍十二式)이나 회풍낙안검이라면 매화검법(梅花劍法)보다 성취가 낮아도 매화검법을 꺾을 수 있을 테니까.”
“화산엔 매화검법만 있는 게 아니야.”
“그래도 매화검수는 상대할 수 있을 거 아냐.”
“등천제룡십이식은커녕 육합검법(六合劍法)도 안 가르쳐 주는 형산에서 뭘 배우겠다는 거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장문제자라도 되겠다는 거야, 뭐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유경을 본 백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맞는 말이다. 장문제자라도 된다면 모를까, 평제자인 백아가 배울 수 있는 건 잘해 봐야 절영검법 정도다. 만약 눈먼 장로의 적전이 된다면 칠살검법(七殺劍法)이나 원비칠식(猿臂七式)을 배울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간다면 형산오신검 중 하나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등천제룡십이식이나 회풍낙안검은 장문인의 제자와 선택된 장로의 제자들만 배울 수 있었다.
“매화검수를 꺾고 싶었으면 차라리 항산으로 가지 그랬어. 절매산엽검식(絶梅散葉劍式)은 매화검에 극성인데 말야.”
“검의 상성으로 이기는 건 이기는 게 아냐. 네 말대로 매화검이 아니라 다른 검을 꺼내 들면 이길 수 없잖아.”
잠시 말을 끊은 백아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검법은 여자가 익히기에나 적당한 거라구.”
“생각은 있었나 보네.”
“당연하지.”
왠지 단호하게 들리는 대답에, 유경은 고개를 돌려 백아를 바라보았다.
“화산 문인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글쎄.”
애매한 대답이다.
“뭔데?”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있다는 걸까, 아니면 없다는 걸까.
백아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백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백아 자신이 아닌 선대의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유경은 얼핏 들려온 말을 놓쳐 버렸다.
“응?”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말야.”
침울한 목소리. 뭔지 모를 한이 서린 듯한 그를 보면서도, 유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第二章 광동행(廣東行)(1)


“……이걸론 안 돼.”
잔뜩 눈살을 찌푸린다.
너무 익숙하다. 언제 어디서고 펼칠 수 있는 검. 그래서 더 큰 문제가 된다.

―신공절학은 없다. 어떤 무공이든 만 번 단련하면 천하제일이 될 수 있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이미 퍼질 대로 퍼져 시정잡배들조차도 한두 수는 익히고 있는 육합권으로도 고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육합권을 익혀 고수가 될 수는 없다.
육합권으로 고수가 될 수는 있지만, 시정에 떠도는 육합권으로는 고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만 번의 고련 끝에 진기 도인법을 알아낸다면 고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도인법을 알아낸다 한들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만 번의 단련이 오히려 독이 된다.
물론 백아의 경우는 그런 것과는 달랐다. 제대로 된 검문에서 제대로 된 검을 배웠다. 그래서 나쁜 습관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칠 년. 이미 만 번을 넘긴 지는 오래. 눈을 감고서도 비파검법을 능숙하게 펼칠 수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변초를 가미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비파검이다.
그렇게 유명한 검법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호남의 무인이라면 모두 한두 번씩은 비파검을 견식해 본 사람들이다.
비파검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이미 반쯤 지고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
더군다나 호남의 무인들 이상으로 비파검을 잘 알고 있을 오악검파의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차라리 그때 따라갈 걸 그랬나.”
이십 일 전에 형산을 떠난 유경을 생각했지만, 백아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털어 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도 없어.’
최소한 다른 검법을 하나 정도는 익혀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산을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검법’을 배우기에 가장 좋은 방편일 뿐, 최선의 선택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산을 내려가서 배울 수 있는 검이라야 뻔했다. 고작 해야 커다란 무관에서 가르치는 검. 잘해 봐야 거대 문파의 속가들이 가르치는 기초 검법뿐이다.
다른 문파에 들어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일단 형산의 문하가 된 이상, 제대로 된 문파라면 자신을 받아 주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기적적으로 구파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형산의 문하였다는 전적이 있는 자신에게 제대로 된 검을 가르칠 리가 만무했다.
결국 죽으나 사나 형산의 검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비칠식(猿臂七式)이라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원비칠식이라면 매화검을 상대할 수 있다. 물론 그 화후가 더 높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 원비칠식 역시 가볍게 다룰 만한 검은 아니지만, 이십사수(二十四手) 매화검법(梅花劍法)에 비하면 조금 처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백아로서는 그런 원비칠식마저도 익힐 수 없었다.
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권, 각, 심지어 경공마저도 마찬가지. 장로의 적전이 아닌 백아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큰 도시의 무관에서 가르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육합문(六合門)으로 가는 게 나으려나.’
하남성(河南省) 정주(鄭州)에 위치한 육합문. 완벽한 속가문파인 그곳이라면 자신을 받아 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받아 줄 것이다. 비록 평제자라 하나 자신은 건천공을 익히고 있다. 신공의 반열엔 들지 못했지만 절정의 기공임은 분명한 그것.
꾸준히 익히기만 한다면 일류까지는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다.
소림과 숭산검문에 밀리는 육합문이라면 일류에 간신히 드는 무인이라도 잡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곳에서 육합도법을 얻으면 된다.
‘……아니야.’
강한 무공을 원하는 거라면, 차라리 마교(魔敎)나 녹림(綠林)에 투신하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그런 걸로는 아무것도 안 돼.’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 강해질 수는 있겠지만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마교에 투신한다면 마인으로, 녹림에 투신한다면 범죄자로 낙인찍힐 뿐이다.
육합문에 들어가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음지와 양지의 차이만 있을 뿐, 형산에 남아 있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 무공은 강해질 수 있을 것이나, 평판은 한층 더 나빠질 뿐이다.
그래서야, 의미가 없다.
답답함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어쩐지 바람도 불지 않았다. 답답함을 지우고 싶어, 백아는 천주봉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신형을 날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곡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머리를 스쳤다.
“응?”
발을 멈췄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 사이에서 하얀 백광이 흘러나왔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수련이라도 하는 건가.’
자개(紫蓋)봉 중턱. 이 시간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저 빛을 만들어 내는 검의 주인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곳을 찾았으리라.
갈등이 찾아왔다.
발을 돌리는 것이 옳았다. 같은 문파라 해도 다른 사람의 수련을 훔쳐보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평제자라면 굳이 이런 곳까지 와서 검을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장로의 적전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원래대로라면 발을 돌려야 하지만, 갈등이 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더 강한 검.
본다고 해서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을 선택하라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
‘……간다.’
그런 갈등을 애써 지워 버리며, 백아는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싸늘한 백광이 눈을 어지럽혔다.
간신히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는 거리에 멈춰 선 백아의 몸이 바위 뒤로 움직였다.
바람의 움직임에 신경 쓰며, 자신에게서 풍기는 땀의 냄새가 흘러가지 않도록 자리를 잡았다.
그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좁은 바위 틈새가 눈에 들어왔다.
‘운이 좋은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새끼손가락이 겨우 지나갈 만한 틈.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시야는 충분히 확보되었다.
‘여자?’
의외라고 생각하며, 백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검을 가진 채 홀로 형산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형산의 문하뿐이다. 그리고 그중 여제자는 드물었다. 수련생이나 평제자 중에선 한 명도 없고, 장로나 장문의 제자 중에서나 간혹 보였다.
그런 부류의 사람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놀란 탓인지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조심스럽게 내력을 운기해 평정을 찾고, 호흡을 늦추며 다시 작은 틈에 눈을 대었다.
쾌검(快劍)일까, 환검(幻劍)일까.
수없이 많은 검영(劍影)이 어둠을 찢었다. 검 날에 반사된 달빛이 환상을 만들었다. 비파검법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검영.
절정검법이란 바로 저런 것이리라.
반 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빠르게 움직이던 검이 멎었다. 안타까움. 그러나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한 번만 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야.’
아무래도 오늘의 검무는 끝난 것 같았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 풀잎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몸을 일으켜 자리를 피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숨어 있던 곳을 지나치는 그녀를 보며, 백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굴까.”
아까도 생각했지만, 분명히 수련생이나 평제자는 아니었다. 그들 전부를 안다고는 하지 못해도 그중에 여자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제자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런 검을 펼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장로나 장문인의 제자일 것이다.
저 멀리 사라지는 인영을 본 백아는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조금 전에 본 검의 궤적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듯, 검집을 빼내지 않은 검을 그대로 들어 빠르게 휘둘렀다.
‘젠장…….’
안 된다.
처음은 비슷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흐트러졌다. 오기로 계속 휘둘러도 나오는 것은 비파검법. 조금 전의 검이 기억에 남아 있는데도, 일초 반식도 나오지 않았다.
‘비파검에 너무 길들었어.’
눈을 감아 조금 전에 본 검의 궤적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건천공으로 인해 밝아진 눈은 그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는 몸. 눈을 지나 뇌리에 박힌 기억을, 몸이 따라 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무작정 검을 휘둘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비파검의 검로를 밟아 가도록 길들여진 몸.
이 상태로는 어떤 검을 배워도 비파검이 섞여 들 뿐이다.
‘비파검을 버리는 건 불가능해.’
십 년쯤 노력한다면 비파검의 흔적을 지워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 차라리 비파검을 활용할 수 있는 검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