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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第二章 광동행(廣東行)(2)


그런 면에서는, 조금 전에 본 검은 자신에게 적합한 검이 아니었다.
“곤란한데.”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들고 있던 검을 다시 허리에 맸다. 그 무게만큼이나, 아쉬움이 짙게 느껴졌다.
애써 그것을 지웠다. 터져 나오는 한숨도 함께 지웠다.
‘언젠간…….’
손을 꽉 쥐며, 백아는 자신의 검을 노려보았다.

반년이 지나, 백아도 이제 열다섯이 되었다.
헌헌장부(軒軒丈夫)로 볼 만큼 키가 많이 자랐지만, 그런 표현을 쓰기엔 아직 어린 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
그 미묘한 선에 서 있는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분위기가 짙게 느껴졌다.
“여전하군.”
처음 형산을 내려와 들렀을 때와 변함없는 모습. 형양(衡陽)은 삼 개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자신, 그리고 형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비파검법만을 배우고 있는 자신.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을 텐데도 여전히 비파검법만을 고집하는 무사부를 떠올린 백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답답하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특별 대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적전으로 받아들이기도 곤란한 상황이기에, 평제자와 수련생의 지도를 맡은 청진으로서는 골머리를 썩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긴, 다른 장로들 눈치도 봐야 했겠지.’
애써 위안을 삼은 백아는 다시 생각을 이어 나갔다.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건 형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양표국과 손잡고 강서성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형산은, 호북성 형문산 인근에 근거를 둔 은성장(銀城莊)과 강서성 남창(南昌)에 근거를 둔 유성검문(流星劍門)의 연합에 가로막혀 간신히 정강산 일대로 진출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두 문파를 상대하는 것은 형산에겐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은성장주가 무당의 속가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속가라 한들 무림 제일문파인 무당과의 관련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무당과의 충돌마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맞닥뜨려, 형산과 형양표국은 강서성에서의 후퇴를 결정했다.
백아가 처음 산을 내려온 것은 그 결정이 내려진 지 두 달이 지나서였다.
‘형양표국도 난리였었어.’
형산이 받은 타격도 컸지만, 형양표국이 받은 타격은 그보다 한층 더 깊었다.
형산으로서는 형양표국이 입은 손실을 만회해 줘야 할 필요를 느꼈고,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산을 내려가지 않았던 평제자들마저 내려 보내 흔들리는 형양표국의 입지를 다시 공고히 해 주었다.
그 사건 이후 강서로의 진출을 포기한 형산과 형양표국은 광동을 주시했다.
“해남파는 본토로 잘 나오지 않으니 상관없다는 거겠지.”
광동성엔 주목할 만한 문파가 없었다. 비록 해남도가 가깝다고는 하나, 성의 경계를 넘어 세력을 떨치는 무당과는 달리 해남파(海南派)는 해남도(海南島)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강서에서 겪은 실패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내려온 것도 그것 때문이고.”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은 형양표국으로선 세력 확장보다는 표물 운송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광동으로의 진출에 있어, 무력에 의존해야 하는 일은 전부 형산의 몫이 되었다.
산에서 내려온 형산 문하의 수만 사십여 명. 장로의 적전도 셋이나 됐다.
“어이!”
생각에 잠겨 있던 백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을 안 해?”
“아, 미안.”
형양표국이라는 현판이 걸린 대문 앞에서 손을 흔드는 유경을 본 백아는 막 떠오른 생각을 지워 버렸다.
“흐음.”
“왜?”
“글쎄.”
잠시 머뭇거리던 유경은 곧 표정을 수습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직도 생각 없어?”
“뭐?”
“계속 형산 문하로 남아 있을 거냔 말야.”
그제야 무엇을 말하는 건지 깨달은 백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유경이 형산을 떠나기 전에도 했던, 백련검의 제자가 될 생각이 없냐는 말일 것이다.
“지난번에 대답했던 걸로 아는데.”
“의숙이 화내던데. 자기가 매화검수 수준도 안 되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 녀석이라면 그 낯짝이나 한 번 봐야겠다면서 말야.”
“틀린 말은 아니지. 호남제일검이라고 해도 문파에 속해 있지 않은 무인이라서 높게 평가 받는다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뭐, 그렇긴 한데…….”
“형산에서도 백련검을 이길 만한 사람은 많아.”
“그럼 뭐 해. 그런 사람들은 널 제자로 받아 주지도 않을 텐데.”
정곡을 찔렸다.
그렇다. 분명히 그게 문제다.
형산에 몸담은 지 벌써 팔 년. 그러나 아직도 백아는 삼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봐.”
“뭘?”
“너, 나한테 몇 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상당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이었다.
“……삼십 초 정도?”
“일 년 전엔 비슷했어. 안 그래?”
백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류를 넘어 일류를 바라보게 된 유경과 아직도 그저 그런 무인인 자신. 그러나 불과 삼 개월 전까지만 해도 둘 사이에 차이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록 승리를 가져가는 일은 없었다 해도, 언제나 그 차이는 매우 작았다.
그러나 백 일 남짓한 시간이 지난 지금, 유경과 자신의 차이는 너무도 크게 벌어졌다.
백아는 왠지 모르게 낙오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냐.’
그런 것은 아니다. 뒤떨어진 것이 아니기에 낙오자라는 단어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저 성장이 멈춘 것. 한계가 찾아온 탓이다.
능력의 한계가 아니었다. 다만 형산의 평제자라는 위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어 버렸기에 그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쉽게 말해, 평제자로 머무는 형산 문하로서의 한계에 도달해 버린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나와. 몇 년만 더 지나면 받아 주는 사람도 없을걸?”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왠지 모를 반발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됐어.”
“고집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유경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비급이라도 구해다 줄까? 절정 검법이라면 무리지만 소청검(小淸劍) 정도라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야.”
“나한텐 안 맞아.”
“왜?”
“비파검에 길들어 버렸으니까.”
형산의 검이 아니면 안 된다. 비파검을 활용할 수 있는 검이 아니면 익힐 수 없게 되어 버려, 그것과 다른 체계를 가진 검은 오히려 악영향을 줄 뿐이다.
“비파검만 미친 듯이 수련한 거야?”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니까.”
“……그것만 팠다면서 삼십 초밖에 못 버틴다고?”
“너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검이니까.”
“그래도 내력만 깊어지면 일류 소리는 들을 수 있을 텐데.”
“아직 십 년은 일러.”
“그런 것치고는 미묘하게 태평하다, 너.”
태평한 걸로 보인 걸까.
틀렸다. 절박하다 해야 옳았다. 단지 표현하지 않을 뿐. 절정 검법에 대한 욕구는 이미 머리끝까지 차 오른 상태였다.
단지, 그런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건.”
둘의 대화에 이질적인 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사저…….”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효율적이지 못해. 이럴 시간이 있다면 검이라도 한 번 다듬어 보는 게 어때?”
“……저, 이 녀석은 비파검만 팔 년째 잡고 있는 녀석인데요.”
“시간이 검을 완성시키는 건 아냐. 일 년 동안 수련한 사람이 십 년을 수련한 사람을 이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아.”
“이미 오 년 전부터 완성되어 있었다구요, 저 녀석은.”
그렇지 않냐는 듯한 시선이 닿았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그러지 않기도 곤란한 상황이다. 물론 비파검이라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까지 단련한 지 오래였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비파검을 누를 만한 무공을 충분히 익힌 상대를 만난다면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런 망설임을 어떻게 받아들인 걸까.
그 둘을 보던 여인은 살며시 검을 손에 쥐었다.
“증명해 봐.”
“곤란하군요, 그건.”
“어째서?”
“비파검을 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팔 년 동안 잡고 있었다고 했지. 수련을 게을리 한 게 아니라면 그냥 비파검일 리가 없어.”
그 말에 갑자기 오기가 치솟아올랐다.
백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의를 입은 여검객의 모습과 그 손에 쥐어진 패검(佩劍)이 반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자개봉에서의 검무.
그 주인을 앞에 둔 지금, 긴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화난검이라고 했지.’
유서연. 운현자(雲玄子)라 불리는 청현의 제자다.
도문에 들지 않아 도호는 없다. 속가제자가 아님에도 규율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특이한 존재. 그러면서도 장로의 적전에 들어 형산오신검 중 하나를 배운 여인.
그런 그녀를 보며, 백아는 묘한 패배감에 젖어 들었다.
‘내가 그걸 배웠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뭐 하는 거야, 너.”
“그만두겠습니다.”
“뭐?”
“말씀하신 대로 수련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백아는 허리춤에 가져갔던 손을 다시 내렸다. 당황스럽다는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유경과 서연을 애써 무시하며, 백아는 형양표국 내부로 발을 옮겼다.
“잠깐 기다려.”
막 문턱을 넘어가려 할 때 들려온 소리에, 백아는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난 그만둬도 좋다고 한 적 없어.”
“…….”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기회에 기를 꺾어 놓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백아 역시 다른 평제자들처럼 적전제자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 것을 완전히 꺾어 버리려 하는 것이리라.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 백아는 형양표국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뒤를 따라온 유경과 서연도 표국 내부로 들어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곳을 향해 발을 옮겼다.
표사들의 숙소를 지나자 넓은 연무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을 멈춘 서연이 검을 빼 들었다.
‘할 수 없지.’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렇지만 이미 허락해 버린 마당에 그것을 번복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백아는 검을 들어 올렸다.

* * *

형양표국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약 삼십여 년 전, 악록산을 지나던 삼류 보표가 기연을 얻었다.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도법을 얻은 그 보표가 선택한 것은 어이없게도 협객이 아닌 상인이었다. 그는 고향인 형양으로 돌아갔고, 그동안 모은 재산으로 작은 상점을 차렸다.
조그만 상점을 차린 그에게 형양의 건달패가 접근했다. 그러나 길바닥에서 굴러먹던 건달들이 절정 도법을 얻은 그를 이길 리 만무했다. 보호비를 뜯으러 왔던 건달들은 오히려 그의 수하가 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다른 건달패들은 위협을 느껴 그 보표를 향해 칼을 들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본의 아니게 형양의 암흑가를 통일해 버린 보표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형양 암흑가의 대부로 남는 것도 나쁘진 않으나 위험이 너무 컸다. 여러 개로 갈려 있던 형양의 암흑가를 뭉쳐 놓고 보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규모의 집단이 만들어져 버렸던 것이다.
위협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된다면 호남에 터를 잡은 무림문파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정도 규모로 커져 버린 집단을 관부에서 그냥 놓아 둘 리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들을 표사로 만들어 표국을 열었다.
상문십이도(喪門十二刀) 유상(劉相).
표국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도법과 이름을 호남 일대에 떨쳤다.
비록 내력의 부족으로 인해 절정은 되지 못했다 하나, 그의 도법을 감당할 수 있는 비적(匪賊)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형양표국의 표사들에게도 상문십이도를 간략화시킨 여섯 초식의 도법인 육투도(六鬪刀)를 가르쳐, 형양표국은 규모나 무력 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져 있었다.
그렇게 세워진 표국의 역사가 오 년이 지나갈 무렵, 형양표국은 수적들에게 표물을 빼앗겨 표국의 존립마저 위험해질 정도의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동정수로채와의 충돌에서 유상이 흑룡채(黑龍寨)의 채주를 일도에 베어 버림으로써, 형양표국은 명실상부한 호남 제일 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십 년.
형양표국은 호남을 넘어 다른 성으로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표행 준비가 한창이었다. 수십 명의 일꾼이 짐을 나르고 있었다. 고가의 물건도 적지 않은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럿 보였다.
그런 사람들 사이로 청색 무복을 입은 두 소년이 끼어들었다.
“도련님,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뭐야, 잊어버린 거야?”
“예?”
“이번엔 나도 따라가야 하잖아.”
짐이 잔뜩 실려 있는 마차에 털썩 주저앉은 유경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태도로 말을 맺었다.
엄밀히 말해서 지금 준비하는 표행은 표행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표행이란, 표국이 의뢰를 받아 물건을 운반해 주는 여정을 가리켰다. 따라서 의뢰를 받지 않은 상태의 운송은 표행이라 할 수 없었다.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다.
“광주 태수를 만나서 광동에서의 영업을 허가 받아야 한다…… 라는 명목 하에 뇌물을 전달해야 하는 일인데, 적어도 국주나 국주의 직계가 가야 뭔가 모양새가 좋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