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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第二章 광동행(廣東行)(3)
“국주님이 가시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아, 악양에 있었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무릉산에서 표물을 털렸어. 작정하고 덤벼든 건지 산채까지 버리고 도주한 놈들을 잡겠다고 난리시던데.”
“끄응.”
형양표국의 시작과 함께한 표두 중 한 명인 오 표두(五驃頭) 전일기(全一其)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론 표물을 털린 일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신용의 하락은 물론 배상 문제도 처리해야 했다. 보통의 산적들은 통행료를 받는 걸로 만족하기에 표물이 털리는 일은 흔치 않으나, 가끔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아예 작정을 하고 한탕 벌인 후 숨어 버린 산적을 찾는 건 매우 힘들고 피곤한 일이었다.
중소 표국이라면 모를까, 형양표국의 표물을 터는 정신 나간 산적은 거의 없었다. 있다면 지금처럼 일을 벌인 후 숨어 버리는 경우뿐이었다.
금액 면에서 보면 작은 일이나 신용이 걸려 있는 문제인 데다 차후의 일을 생각하면 국주가 나서서 처리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형양표국 정도의 표국이라면 표두 한두 명 정도 보내 처리하는 것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그놈의 성질, 아직도 못 버렸나.”
“그래서 할아버님은 못 가시고, 아버님은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고 하시니 내가 가야지.”
“일공자님과 이공자님은…….”
“첫째 형은 할아버님한테 끌려갔어. 둘째 형은 행방불명.”
“끄으응.”
다시 한 번 신음을 흘린 전일기는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십니까?”
“형산 제자. 이번에 내려왔어.”
화제가 자신에게 향한 것을 느낀 백아는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그것을 받은 전 표두를 잠시 바라보던 백아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곤 입을 열었다.
“혹시 백유라는 분을 모르십니까?”
“예?”
“이곳의 표사로 계신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보이지 않더군요.”
“형산 문하입니까?”
“그렇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백아에게서 시선을 돌린 전일기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잘 생각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실망한 백아의 눈살이 찌푸려지려 할 때, 뭔가를 떠올린 전일기의 얼굴에 색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아, 그 사람…….”
“알고 계십니까?”
전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 개월 정도 같이 지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을 떠났죠.”
“왜?”
“처음부터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표사로 썩기엔 아까운 사람이었지요.”
유경의 질문에 답한 전일기의 표정이 변했다. 백아는 그 변화를 눈치 챘고,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이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져, 백아는 전일기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표두님이 본 그분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 아, 실례했습니다.”
잠시 멍하게 있었던 것을 깨달은 전일기는 고개를 숙여 사죄를 표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엔 그저 그런 무인으로 보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형산은…….”
막말을 이어 가던 그는 바로 눈앞에 있는 두 소년이 형산의 문하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백아는 괜찮으니 계속 말해 달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그제야 안심한 전일기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냥 산속에 있는 커다란 무관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아, 물론 적전제자야 일류고수들이지만 그들은 형산 전체의 일 할도 안 되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간의 인식은 이미 그렇게 굳어진 지 오래였다. 일반인들만이 아닌 강호인들 역시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오악검파는, 화산을 제외하면 모두 거대 무관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뿌리내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형산은 그런 인식을 바꿔 놓지 못했다.
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절정에 다다른 무인의 수는 구파(九派)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에선 구파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인식을 바꿔 놓지 못한 것은, 그 힘을 가지게 된 계기가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한 것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좀 다르더군요.”
“어떻게 달라 보였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딱 꼬집어서 말하긴 어렵습니다. 뭐, 그래도 확실히 무공 면에서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광서삼귀(廣西三鬼)가 서른 초를 채 못 버텼으니까요.”
“광서삼귀가?”
“예, 도련님. 그래서 처음엔 적전제자인 줄 알았지 뭡니까.”
“대단한데.”
유경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나 백아는 그럴 수 없었다.
‘광서삼귀를…… 삼십 초 만에?’
자신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광서삼귀가 일류 고수인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류에서 일류 사이. 거대 문파가 없는 광서 일대에서만 머무른 것을 봐도 그다지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들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그러나 그 셋은 언제나 함께 다녔다. 게다가 도문(道門)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합격진까지 익히고 있기에, 절정에 이른 무인이라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들을 삼십 초 내에 쓰러뜨렸다는 것은 이미 절정을 넘어서려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검법을 사용했는지 알아보셨습니까?”
“비파검법인 것 같긴 했습니다만, 글쎄요. 그러고 보면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습니다.”
“비파검법…….”
그럴 리가 없다.라고 백아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외쳐 댔다.
현 세대의 형산 문인 중에서 가장 완벽한 비파검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단연 자신이었다. 그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었다. 무사부인 청진은 물론, 조금 전에 검을 나눴던 서연 역시 그것을 인정했다.
그런 자신도 광서삼귀를 만난다면 이길 수 없었다. 아니, 그 셋 중 하나만 만나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잘못 본 거 아냐? 비파검으로는 그럴 수 없어.”
“저도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적이 움직이는 것보다 먼저 공격하고, 적이 공격하는 것보다 빨리 피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하―.”
정론(正論)이다.
맞는 말이다. 적을 쓰러뜨리고 싶으면 적이 피할 수 없는 공격을 하면 된다. 그리고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적의 공격을 피하면 된다.
그렇지만, 그런 게 항상 가능하다면 굳이 초식이라는 것이 생길 이유가 없다.
믿고 싶으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머릿속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것에서 희망을 느낀 가슴은 고개를 끄덕이라 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움. 그것을 느낀 백아는 이성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 건 불가능해.”
비파검은 비파검일 뿐. 아무리 수련해도 절정 무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강한 내력을 얻는다 해도 비파검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는 명확했다.
결국, 그것이 기본공의 한계였다.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린 백아를 본 유경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절정의 보법(步法)이라도 익혔나 보지.”
“뭐?”
“절정의 신법이나 보법만 있으면 자기보다 검공이 뛰어난 상대도 이길 수 있어. 실제로 개방 장로 중엔 신법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럴지도…….”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아무리 보법이 뛰어나다 한들,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정말 비파검만으로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걸까.
‘모르겠어.’
혼란만 더 가중될 뿐이다.
백아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자꾸 사람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혹시 어떤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자꾸만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던 백아는 몰려오는 피로감을 이기지 못해 눈을 감아 버렸다.
* * *
침주(?洲)를 거쳐 의장(宜章)에 도착했다. 호남성의 끝자락에 닿은 표행은 광동으로 들어가기 위한 절차를 하나씩 밟아 나갔다.
련주(連州)와 양산(陽山)을 거쳐 청원(淸遠)과 화도(花都)를 지나면 광주에 도착한다. 그 사이에 사용할 물건을 구입하는 일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 통과 절차를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표행이라는 것은 시간에 상당히 구애받는 일이었다. 물론 이번은 표행과는 다른 성질의 이동이기에 딱히 시간적 효율성을 추구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오랫동안의 습관은 이런 이동에서도 가장 효율적인 시간 관리를 하도록 하고 있었다.
“광주 태수가 누구였더라?”
“……도련님.”
“아아, 몰라. 난 그냥 얼굴만 잠깐 비출 테니까 알아서 잘해 줘.”
“그건 곤란해.”
전일기와 실랑이를 벌이던 유경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떨궜다.
“이번 일엔 형양표국만이 아닌 형산 역시 관련되어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럼 사저가 대신 나가면 되잖아요.”
“네가 빠지면 아무것도 안 돼.”
“저기…….”
“명령이야.”
서연은 귀찮아 하는 기색이 역력한 유경을 향해 작은 은패(銀牌)를 내보였다.
“장문인께서도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있어. 설마 형양표국이 형산과 관계를 끊겠다는 건 아니겠지?”
“하아―.”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표국이야 어찌 되건 상관없다면 그냥 중간에 빠져나갈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큰형님이 가만 놔둘 리 없지.’
유경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되잖습니까, 가면.”
“그런데 그 녀석은 어디 있지?”
“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유경은 한참 후에야 서연이 말하는 것이 백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 이 근처 무관에라도 간 모양이죠.”
“무관?”
“실전은 무리더라도 비무 정도는 가능하잖아요. 그런데 그 녀석은 왜…….”
“비무라니, 무슨 소리야?”
중간에 말이 잘린 것에 조금은 불만스러워하며, 유경은 어깨를 들썩이곤 대답을 주었다.
“그 녀석이 배운 건 비파검법뿐이잖아요.”
“그런데?”
“비파검은 너무 잘 알려져 있으니까요. 새 검법을 익히지 못할 바에야 그걸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알아내야겠다고…….”
“멍청하긴!”
“……예?”
갑작스레 터져 나온 고함에 놀란 유경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연을 바라보았다.
“겨우 일개 무관에서 쌓은 경험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랬다가는 오히려 검이 망가져 버리는데!”
“그래도 경험은 필요하잖아요. 솔직히 경험만 있었으면 지난번에도…….”
자신을 째려보는 서연의 눈초리에 유경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비무에서 느꼈듯이, 백아에게 실전 경험이 있었더라면 서연에게 칠 초 만에 패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한 가지만 물어볼게. 너 말야, 나하고 겨루면 얼마나 버틸 것 같아?”
“글쎄요. 쉽게 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전력을 다하면 십 초면 충분해.”
단언하는 듯한 말투에 기분이 상했다. 유경은 그런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그것을 느낀 서연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아닐 것 같아?”
“제 할아버님도 그건 불가능해요.”
“가능해.”
딱 잘라 말했기 때문일까. 유경은 어째서인지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원래 절정이란 건 그런 거야.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벽을 넘은 사람은 그 벽을 넘지 못한 사람을 쉽게 이길 수 있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동수였던 두 사람이 하루 만에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 건 그 벽을 깼느냐 깨지 못했느냐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야.”
설명을 이어 가던 서연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비파검만 익힌 사람은 내 검을 일 초도 못 버티는 게 정상이야. 혹시라도 내력이 나보다 앞선다면 어찌어찌 몇 초 정도 더 버티겠지.”
유경의 얼굴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말을 끊었던 서연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고, 고개를 젓던 그녀는 유경의 표정을 보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적전도 아닌 평제자가 나보다 내력이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래. 겨우 삼합공(三合功)으로 그런 걸 해낼 수는 없어. 설령 건천공이나 현명공(玄冥功)을 익혔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나 역시 절정 기공을 익혔고, 내가 익힌 이화난검(梨花亂劍)은 형산오신검에 들어갈 만큼 수준이 높은 절기니까.”
“그럼?”
“검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했다는 뜻이야.”
“예?”
전혀 뜻밖의 말에 유경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비파검만 팔 년 동안 잡고 있었다고 했지? 그리고 수련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내 검을 칠초나 받아 냈어. 그건 비파검이 완전히 몸에 녹아들었다는 말이야. 걷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모두 비파검에 최적화 되어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요?”
“그런데 잡다한 기술이 끼어들면 그 흐름이 깨져 버려. 수준이 후퇴해 버린다구.”
“그럼…….”
“고수하고 몇 번만 겨루면 절정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녀석이 망가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지.”
그제야 유경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녀석은 나한테도 얼마 못 버티는데요?”
“그거야 네가 비파검을 잘 알고 있으니까. 아직은 벽을 못 넘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고개를 내젓던 서연은 한숨을 내쉬곤 다시 입을 열었다.
“도대체가…… 백유도 그렇고 그 녀석도 그렇고, 왜 다들 이렇게 사람 귀찮게 만드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