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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第二章 광동행(廣東行)(4)
잔뜩 독이 오른 얼굴을 한 서연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왠지 그 기세에 눌려 버린 유경은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서연과 눈이 마주친 유경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고, 그런 유경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본 서연은 입을 열었다.
“가자.”
“예? 어딜요?”
“그 녀석, 망가지기 전에 잡아와야지.”
* * *
“……곤란해.”
이십 년 전의 형산 제자가 연 무관이라고 해서 기대했었다. 그러나 얻은 건 실망뿐. 저래서야 낭인(浪人)들의 집단과 다를 바가 없다.
저런 자들과 검을 겨뤘다가는 유일하게 익힐 수 있었던 비파검마저 망가져 버릴 뿐이다.
‘여섯 번짼가.’
이 도시의 무관이란 무관은 다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눈에 차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이곳이 가장 낫지만, 이곳 역시 마음에 들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무관을 바라보았다. 형산의 제자이기에 연무를 보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다.
“하긴, 제대로 된 제자였다면 무관을 열 이유가 없었겠지.”
열 명 정도의 사내들이 검을 펼치고 있다. 익숙한 검. 비파검이다.
그러나 비파검의 형식만 갖췄을 뿐이다. 그것도 간신히 비파검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 저런 검을 비파검이라 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다.
‘무관에서 가르치는 검이니까 요결은 빠져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한데.’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눈만 버린 듯한 느낌.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백아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광동으로 가면 진가(陳家)에라도 찾아가 봐야겠어.”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광동엔 거대한 무파(武派)가 없다. 가장 가까운 거대 문파가 해남과 형산일 정도로 중원 무림의 중심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도 하나의 요소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광동에 근거를 둔 무파들의 세력이 대부분 비등하기 때문이라 것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 광동의 무파 중에서 광동진가(廣東陳家)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역사가 백 년도 되지 않아 세가(世家)에 속하지는 못했으나, 가진 무공은 무림의 유명한 세가에 뒤지지 않았다. 아니, 세가만이 아닌 거대 무파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구파와도 겨룰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진가가 광동의 작은 무가로 머물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어느 무공도 외인에겐 전수하지 않아 그 세력이 작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배울 수야 없겠지만, 고수와 겨뤄 볼 수는 있겠지.’
조용히 중얼거린 백아는 며칠 전에 본 광동성의 지도를 떠올려 보았다.
표행의 최종 목적지는 광주였다. 그곳에서 진가가 있는 남곤산까지는 며칠 거리. 그렇다면 돌아오는 길엔 표행에서 이탈해야 할 것이다.
‘사저가 허락해 줄까.’
이번 표행에 동행하는 형산 문인들의 책임자인 서연을 떠올린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단독 행동을 허락할 그녀가 아니었다.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산을 내려가지 않는 한 행동의 자유란 제한되게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산을 내려온다는 것은 더 이상 형산에 바랄 수 있는 것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하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
이제 이 년만 더 붙어 있으면 십 년을 채운다.
팔 년. 그동안 형산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토납법이나 다름없는 삼합공과 기초 검법에 불과한 비파검법뿐. 허영심에 가득 찬 멍청이가 아니었다면 건천공 역시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건천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도 드러낼 수 없었다. 평제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삼합공에 그쳤다. 건천공이나 현명공 같은 절공은 적전이 아니면 주어지지 않기에, 평제자인 백아는 건천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들킨다 해서 무공을 잃게 되는 일은 없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건 없었다.
“후우―.”
그나마 건천공은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없기에 지금까지 숨겨 올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건천공을 알려 준 멍청한 녀석은 이미 산을 내려갔다.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가업을 이어 무인이 아닌 상인이 되었다고 했다.
아마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형산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기에, 자신이 건천공을 익혔다는 것이 드러날 확률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검은 달랐다. 어떤 검법이든 머릿속에서 되새기는 것만으로는 익힐 수 없다. 설령 기억하고 있더라도 오랫동안 펼치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게다가 검의 요결을 익히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건천공을 익힌 것과 같은 방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비급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면 바로 산을 내려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형산에서 비급을 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장로 이상의 배분이 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적전이건 평제자건 간에, 장로 이하의 신분은 사부, 혹은 무사부가 일러 주는 요결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하긴, 그것도 이제 소용없지.”
백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비파검에 길들어 버린 몸. 걷는 것도, 숨 쉬는 것도 모두 비파검에 최적화 된 상태.
이 상태로는 다른 검결을 얻어도 익힐 수 없다.
“……미치겠군.”
‘응?’
처음 듣는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백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장 처음 찾아온 것은 어둡다는 느낌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과 함께 한 발 뒤로 물러난 백아는 팔 척이 넘는 거구의 사나이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봐, 꼬마야.”
“…….”
‘꼬마?’
꽤 오랜만에 듣는 소리지만, 당연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정말 미안한데 말이지…….”
이상한 사람이다. 그러나 왠지 이상한 압박이 느껴졌다. 본능이랄까, 그런 것을 느낀 백아는 조금 더 뒤로 물러나며 허리에 찬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말 미치겠군.”
잘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중얼거리던 사내는 한참 동안 백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백아는 몇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고, 그런 백아를 보며 잔뜩 얼굴을 찌푸리던 그 사내는 한참을 우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너 말야, 가진 것 좀 있냐?”
* * *
“이십 문입니다.”
내밀어진 손을 본 백아는 동전 두 개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사내의 허름한 차림을 힐끗거리던 점소이는 그제야 꾸벅 인사를 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거, 미안하게 됐다.”
“방금 전까지 칼을 날리던 사람에게 인사를 들으려니 이상하군요.”
“미안하다니까.”
머리를 긁적이는 거구의 사내를 본 백아는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호쾌한 도격이 떨어져 내렸다.
본능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느낀 백아의 신형이 뒤로 움직였다. 간발의 차이. 강렬한 도격이 만들어 낸 풍압에 옷이 찢어졌다. 당황한 백아는 내력을 북돋우며 검을 뽑았고, 곧이어 날아온 이격을 쳐 내며 발을 내디뎠다.
태산마저도 무너뜨릴 듯한 도격을 쳐 흐름을 바꿨다. 강하게 내려치던 도격이 흔들렸다. 당황할 법도 하건만, 사내는 몸을 회전시켜 공격의 흐름을 다시 돌려놓았다.
‘젠장.’
횡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철판교(鐵板橋)를 사용해 피한 백아는 검을 잡지 않은 손으로 땅을 짚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 뒤를 따라 내력이 잔뜩 실린 도(刀)가 떨어졌다.
지면에 닿은 도는 엄청난 양의 흙더미와 돌을 뿌렸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가려진 것을 느낀 백아는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예상대로 처음의 일격에 못지않은 공격이 흙더미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 공격은 막을 수 없다고 느낀 백아는 몸을 돌려 그것을 피하며 또 한 번 이어질 공격의 틈을 노리려 했다.
그러나 다음 공격은 오지 않았다.
“……에?”
당황스럽게도 맹렬한 공격을 이어 나가던 사내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야.”
“아아, 그러시겠죠.”
잔뜩 비꼬는 어투를 내뱉은 백아를 멀뚱히 바라보던 사내는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렴 이 벽산도(劈山刀) 장청(張淸)이 도적질을 하려고 했겠어?”
“그럼 그건 뭐였습니까?”
“아니, 난 그냥 돈을 좀 빌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네가 도적 운운하지만 않았어도 도를 들이대지는 않았을 거라구.”
“그런 대도를 든 채 길을 막고 가진 거 없냐고 물어보면 도적으로 보는 게 당연할 텐데요.”
맞는 말이다. 그저 생각하지 못했을 뿐. 그러나 그런 변명은 말 그대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지 우물거리던 사내, 장청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건 그렇지만 말야…….”
“맛있게 드십시오.”
백아와 장청이 앉은 탁자에 소면이 담긴 그릇 두 개가 올라왔다. 살짝 백아의 눈치를 보던 장청은 곧 젓가락을 집어 들곤 그릇 하나를 끌어와 그 안에 담긴 면을 입에 넣었다.
작은 그릇에 담긴 소면은 곧 바닥을 드러내었다.
“저기, 하나 더 시켜도 될까?”
열흘을 굶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왠지 그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 백아는 아직 손을 대지 않은 그릇을 장청을 향해 밀었다.
“그럼, 실례.”
젓가락을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면 그릇은 바닥을 드러내었다.
“미안한데 말이야…….”
“도대체 어쩌다 그 꼴이 된 겁니까.”
“아니 뭐…….”
손짓으로 점소이를 불러 오리구이를 시킨 백아는 이제 됐냐는 듯한 표정으로 장청을 바라보았다.
소태 씹은 표정을 지은 장청은 한참 동안 머리를 긁어 댔다. 답답한 느낌에 잔뜩 얼굴을 찌푸린 백아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쯤, 장청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장청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열여덟에 강호에 출도해 벽산도라는 별호를 얻은 그는 강서와 복건, 광동 일대에서 나름대로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비록 명문 정파의 기명제자는 아니었지만 그 무공은 일류를 넘어서 있었고, 몇 차례의 협행을 통해 얻은 명성은 꽤 높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의 사부가 호리도(弧悧刀) 곽영(郭英)이라는 데에 있었다.
삼십 년 동안 개방(짵幇)에 몸을 담고 있던 곽영은 개방을 나와서도 거지 시절의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개방을 나와 사업을 운영하며 개방을 돕는 보통의 걸개들과는 달리, 그는 개방을 나와서도 거지와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심지어 개방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장원의 장주가 일자리를 주겠다고 찾아왔을 때도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그는, 어느 날 강서성을 지나다 한 아이를 줍게 되었다.
그 아이가 바로 장청이었다.
뭣도 모르고 곽영의 제자가 된 순간부터 장청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요?”
“좀 더 들어 봐.”
탁자 위에 올라온 오리구이를 씹으며, 장청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부라는 것이 무공을 얼마나 잘 가르치느냐에 따라 그 좋고 나쁨이 갈린다면, 곽영은 틀림없는 일류 사부로 분류될 것이다. 무골이긴 하나 기재는 아니었던 장청이 불과 십 년 만에 벽산도라는 외호를 가지게 된 것만 놓고 봐도 곽영이 가진 스승으로서의 자질은 대단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을 놓고 보면 곽영은 절대 제대로 된 사부라 할 수 없었다.
“열여섯에 처음으로 열 냥이 넘는 돈을 벌었지.”
살점을 다 발라낸 오리발이 그릇에 담겼다.
“현상금 사냥꾼이었어.”
장청이 열일곱이 될 때까지 사냥과 구걸로 생활을 영위하던 곽영은 장청이 열여덟이 되자마자 관아로 찾아가 수배자 명단을 받아 왔고, 몇 장의 명단을 살피던 그는 그중에서 한 장을 꺼내 장청에게 건네주며 그곳에 실린 수배자를 잡아 올 것을 명령했다.
무모하게도 말도 안 된다며 반항을 시도하던 장청은 생애 처음으로 죽음에 필적할 만한 공포를 느꼈고, 그는 자신의 선택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움막을 나와 수배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 후.
곽영은 열 냥의 은자를 챙길 수 있었고, 그 사건을 시작으로 장청의 협행이 시작되었다.
백에 달하는 범죄자들과의 사투를 벌이면서 수십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장청의 무공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처음 나섰을 때 이류를 조금 상회했던 장청의 무공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어느새 복건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곽영 역시 장청에 대한 간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장청을 자신의 전낭으로 생각하는 곽영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장청은 몰래 복건을 빠져나왔고, 약 이 년 동안 곽영을 피해 강서와 광동 일대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열흘 전에 사부를 만나 버린 거지.”
“……할 말이 없군요.”
웃어야 할지 애도를 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이다.
어느새 오리구이는 뼈만 남아 있었다. 아직도 배가 안 찼다는 듯한 얼굴로 탁자를 보던 장청은 고개를 저으며 애써 아쉬움을 달랬다.
‘벽산도라…….’
그런 장청을 보면서 백아는 조금 전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이 장청을 도적으로 오인하면서 벌어진 격투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처음의 호쾌한 도격이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피할 수도 없었겠지.’
열흘 동안 굶었다면 체력과 내력 모두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리 내력이 심후하다 한들 기본적인 체력이 받쳐 주지 않으면 무기를 들어 올릴 수조차 없다. 물론 열흘 동안 굶은 걸로는 그런 상태까지는 가지 않는다. 비록 배고픔을 지울 수는 없으나, 내력을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의 손실은 어느 정도까지는 막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열흘이라면 체력과 내력 모두 정상일 때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쓰러진 걸 보면 그것도 안 됐던 건가.”
“뭐?”
“별거 아니에요.”
“그래?”
“그보다 이제 어쩔 겁니까?”
장청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현청에 찾아가서 수배자 명단이라도 받아 봐야지.”
“흐음.”